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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 제2강 금강경 경의 제목과 法會因由分 第一(법회인유분제일)
金剛般若波羅蜜經
제2강 경의 제목과 법회인유분 제1
法會因由分 第一(법회인유분 제일)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여시아문하사오니 일시에 불이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하시니라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으로 구하시니라)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著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이시에 세존이 식시에 착의지발하시고 입사위대성하사)
乞食하실새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걸식하실새 어기성중에 차제걸이하시고 환지본처하사)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니라
(반사흘 하시고 수의발하시며 세족이하시고 부좌이좌하시니라)
제 1, 법회가 열린 인연[法會因由分,법회인유분]
이와 같은 내용을 저는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기수(祇樹)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 일천 이백 오십 명의 큰스님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는 공양(供養)을 드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袈裟)를 입으시고 발우(鉢盂)를 들고 사위성(城)에 들어가서 걸식(乞食)하셨습니다. 그 성안에서 차례대로 걸식하여 마치시고 본 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교재
금강경 강의 제 2강에 들어가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8만대장경에 의한 금강경의 위치에 대해서 대강 말씀드렸습니다.
2강은 금강경의 제목과 아울러서 제1법회인유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의에 앞서 교재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면 번역한 것을 교재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한문교재를 선택하였습니다. 사이버 대학 강의라는 이 강의의 특성상 우리가 정식으로 경전을 공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여느 법회와는 달리 경전 글자를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고 공부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더구나 금강경은 소의경전이고 우리가 평생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야 하는 교과서 경전인 까닭에 최소한도 우리 불자라면 금강경 정도는 한자(漢字)로 소화하고 살아야 한국의 불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이 점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금강반야바라밀경)
경의 제목
금강경(金剛經)이라 부르는 이 경의 구체적 제목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입니다.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반야”는 지혜입니다. “바라밀”은 ‘저 언덕에 이르다’ 또는 ‘모든 일들을 다 해결하다’는 뜻입니다. “경”은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낱낱의 뜻을 다 연결하면 “금강반야바라밀다경” 이라는 제목의 뜻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견고하고 날카롭고 빛나는 지혜로써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삶의 문제’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고 있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가정문제, 자녀진학문제, 노사(勞使)문제, 직장승진의 문제, 나아가서 삶과 죽음의 문제, 병고(病苦)의 문제 등이 다 포함 됩니다. 다이아몬드와 같이 견고하고 빛나는 지혜의 가르침이면 이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표현하는 또 다른 해석으로 “벼락과 같은 가르침이다”라는 다이나믹한 표현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을 벼락을 치듯이 이 반야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한꺼번에 요절을 내 버린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라밀이라는 말에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수많은 세월동안 깊이 연구되어 왔기 때문에 제목해석으로써도 금강경의 주된 내용을 다 해설하고 있습니다. 경전 전체를 공부하지 못한다면 경전 제목만이라도 소상하게 잘 이해하면 됩니다. 경전의 전편을 다 읽지 못한다면 제목만 읽어도 됩니다. 경전 제목만 사경해도 본문 전체를 사경하는 것에 버금가는 공덕이 있고 효과가 있다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경전 전체를 외우기가 힘이 들면 제목만 외워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경전의 제목 안에 그 경전의 뜻이 다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제목에 마음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法會因由分 第一
금강경은 크게 긴 경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수많은 논서를 쓰는 경이기도 합니다. 출판된 것만 보아도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조사스님들이 주석을 달고 소초를 쓴 것이 금강경53가해라고 하는 방대한 양의 주석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금강경5가해라고 해서 다섯 분의 명해석을 한편에 모아놓은 해설서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양무제의 아들인 소명태자(?~531)가 금강경을 내용에 따라서 32단락으로 나누고 네글자씩 이름을 붙인 해석이 간단하면서도 가장 우수한 해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단락을 구분한 것이 학문적으로 완전한 단락의 구분은 아니지만, 90퍼센트는 맞는 내용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근거로 금강경을 해설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교재도 이 ‘32분절’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법회인유분 제일(法會因由分 第一)
첫 단락의 제목이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라 되어 있는데 ‘법회를 열게 된 그 원인’ ‘법회가 열린 까닭’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경전에는 다 법회가 열리게 된 이유가 있지요.
오늘 우리가 모여서 공부하는 것도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듯이 금강경이라 하는 천하의 둘도 없는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데 왜 까닭이 없겠습니까?
경전을 먼저 한 구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경전은 읽는 법이 있습니다.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하시니라
여시아문하사오니/ 일시에 불이/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사/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으로 구하시니라./
긴 문장에서 재 띄고, 사위국 약간 띄고, 기수급고독원 사실은 기수도 좀 띄고 급고독원 이렇게 띄고 그 다음에 여도 약간 띄어야 합니다. 대비구중 또 띄고 천인백오십인으로 구하시니라. 이렇게 토를 달아봤습니다
육성취(六成就)
전통적으로 경전은 신,문,시,주,처,중(信聞時主處衆)이라고 하는 여섯가지 조건에 의해서 성립이 됩니다. 이것을 6성취(六成就)라고 합니다. 6하원칙과 유사합니다.
좀더 세분화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시(如是) 이와 같이 들었다 ‘이와 같이’라고 하는 말로써 ‘모두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문(我聞)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어디에 가서 ‘누가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가 아니고 ‘누가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을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라고 전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도 들은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게 들릴 수가 있습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라는 것도 다른 사람은 달리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원칙이 이 속에 깔려 있습니다.
일시(一時)에, 어느 때라고 해석합니다. 천구백몇년 혹은 이천몇년도가 아닙니다. 일시라고 하는 ‘어느 때’는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500년이 지났든 1000년이 지났든 우리가 경을 펼치고 공부하는 이 순간이 일시이고 어느 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경전에 특정한 날짜를 표기했더라면 살아있는 글이 아닌 죽은 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표현 하나에서도 경전의 위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불(佛) 부처님께서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사위국기수급고독원이라는 곳에 계셨다. 사위국은 부처님 당시 교화활동의 중요한 무대입니다. 기수급고독원이라는 절이름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흔히 기원정사라고 부르는 절입니다. 이 절은 불교 역사상 가장 큰 절이고 가장 아름다운 절이며 가장 위대한 절입니다. 부처님이 이곳에 25년간이나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현존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기원정사는 불교역사에서 제1사찰로 칩니다. 한국불자들도 이곳에 성지순례를 많이 가는데, 불자들은 ‘기원정사’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런데 모든 경전이 다 기수급고독원에서 설해진 것도 아닌데 특별히 금강경에 기수급고독원을 등장시킨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기수급고독원이라고 하는 이 절은 기타(祇陀)태자가 숲을 보시하고 급고독(給孤獨)장자가 절을 지은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조건없이 보시하는 것’ ‘급고독’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늘진 곳에서 사는 사람, 고독한 사람, 외로운 사람,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들을 돕는 거부장자가 있었습니다. 본래의 이름이 있었겠지만 이 장자의 활동이나 인생의 목표가 그대로 별명이 되었습니다. 바로 급고독 장자입니다. 그가 세운 절을 금강경에서 우정 등장시키는 것은 금강경의 보살정신인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을 조건 없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를 하려면 자기자신을 철저히 비워야합니다. 조건 없이, 상(相)없이, 나라고 하는 관념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금강경의 정신에 맞춰서 기수급고독원이 등장한 것입니다.
여대비구중(與大比丘衆) 큰 비구스님들 1250인은 상수대중이라고 해서 그 당시 세존을 항상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께서 큰제자들인 10대 제자들부터 기타 많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著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이시에 세존이 식시에 착의지발하시고 입사위대성하사)
乞食하실새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걸식하실새 어기성중에 차제걸이하시고 환지본처하사)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니라
(반사흘하시고 수의발하시며 세족이하시고 부좌이좌하시니라)
그 때 세존이 식시에 착의지발하시고 입사위대성하사 걸식하실 때 어기성중에 차제걸이 하시고 환지본처하사 반사흘하시고 수의발하시며 세족이 하시고 부좌이좌 하시다.
이것이 제1분입니다.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著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이시에 세존이 식시에 착의지발하시고 입사위대성하사)
그 때 세존이 식사를 하실 때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사위국은 성(城)인데 그것이 큰 성이니까 사위대성이라고 했습니다.
乞食하실새(걸식하실새)
그곳에 들어가셔서 걸식을 하셨습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부처님 당시의 근본 생활규칙을 그대로 따른다는 뜻에서 지금도 걸식을 합니다. 북방불교만 걸식을 하지 않고 식사와 생활 및 모든 필요한 도구를 사전에 준비를 해서 절에서 식사를 처리합니다. 그런 것은 기후라든지 생활이라든지 여러가지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대중부에서 발달한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부처님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각각 조건과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규칙을 가지고 크게 문제삼지 않습니다.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어기성중에 차제걸이하시고 환지본처하사)
부처님은 걸식을 하시고 성중에 들어가서 순서대로 걸식을 다해 마치십니다. 차제(次第)라고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 속에는 어느 집에서든지 한 번 걸식을 시작하면 순서대로 일곱 집에서 밥을 비는 7가식을 한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집이라고 뛰어 넘거나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뛰어넘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집에서 시작을 하면 거기서부터 동쪽이든 서쪽이든 앞이든 뒤든 간에 자기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일곱 집에서 걸식을 합니다. 한바룻대 밥을 얻는데 일곱 집에서 얼마만큼씩 얻으면 되겠습니까? 한 집에서 크게 두 숟가락만 밥을 떼서 주면 7집만 돌면 크게 한바룻대가 됩니다. 딱 두 숟가락입니다.
금강경의 종지(宗旨)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상없이 모든 삶을 펼치는 데 있다’ 라고 했을 때 ‘밥 두숟가락 떠주는 심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아주 간단합니다.
“밥 두 숟가락”이 금강경의 열쇠
어떤 보시를 하든지 어떤 봉사를 하든지 상대에게 밥을 두숟가락 떠주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것도 부처님께 올리는 일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설사 거지에게 밥 두 숟가락을 떠줬다고 해도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거나 그 일이 가슴 깊이 남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무주상(無主相)입니다. 이 열쇠 하나면 금강경 전체를 다 풀 수가 있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간단해요.
그래서 서론에 해당되는 이 자리에 ‘순서대로 걸식을 했다’라는 말을 쓰고 있고 그 중에 ‘걸식’이라고 하는 말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걸식해 마치고 본처에 돌아왔습니다. 본처(本處)란 부처님이 계시던 곳입니다. 기원정사이지요.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니라
(반사흘하시고 수의발하시며 세족이하시고 부좌이좌하시니라)
첫 구절을 전통적으로 반사흘(飯食訖)이라고 읽습니다. 가운데 글자는 ‘밥 식(食) 밥 사(食) 먹을 사(食)’라는 음과 뜻을 가지고 있지만 앞에 밥 반(飯)자가 있으니 여기서는 동사로서 먹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밥을 먹는 일을 마치고 옷과 발우를 거두었습니다.수의발(收衣鉢)입니다. 스님들이 탁발을 하러 갈 때나 예배를 드릴 때 입는 옷이 각각이고 부처님 같은 경우는 설법하실 때 입는 옷이 있기 때문입니다. 옷이 다르기 때문에 탁발하러 갔을 때 입던 옷을 거두어서 정리를 하고 발을 씻고 나서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대목에서 “금강경의 깊은 뜻이 다 설해졌다”라고 합니다. 걸식이라는 부분에서 주는 사람은 ‘밥을 두 숟가락 떠주듯이’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보살행을 한다거나 남에게 무엇인가 베풀 때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지요. 또 아무리 몸에 밴 거지라 하더라도 남에게 뭔가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자기를 텅텅 비우지 않는다면 받는 사람도 제대로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철저히 비워야만 제대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회인유분인 제일분의 내용이 앞으로 흘러갈 금강경 전편(全篇)의 중요한 뜻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걸식에서 나아가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가 상(相)이 없이 주고 받을 때, 어떤 관념도 다 떨어진 상태에서 서로를 위할 때, 모든 인간관계는 다 조화를 이루고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다 원활하게 해결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법회인유분에서 나온 걸식의 이유고 급고독 장자가 등장하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제1분 정리
이것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금강경의 제목 : 다이아몬드와 같이 견고하고 빛나는 지혜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의 가르침
2. 금강경을 전통적으로 서른 두 단락으로 나누고, 전체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넉자로써 그 뜻을 표현했다는 것이 상당히 뛰어난 해석이다.
3. 어떤 경전이 언제 어떤 이유로 써졌든지 간에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들은 그대로를 성문화했으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따르노라 하는 의미로서 여시아문이라고 했다.
불자들이 경전을 대하는 자세
교리발달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금강경은 대승경전이기 때문에 부처님 열반하신 500년 후에 부처님의 정신을 부연설명하고, 좀 더 세상과 시대에 맞게 알리기 위해 새롭게 결집하여 편찬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지팔양경이라든지 효경과 같은 것은 한국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이지만 그런 경전까지도 다 석가모니 세존이 설하시고 아난존자가 그것을 듣고 그대로 성문화해서 이 세상에 전했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경전을 대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너무 학문적으로 경전을 천착한 이들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친설이다, 친설이 아니다 등등 신앙심이나 종교적인 수행의 마음은 전혀 배제해 버리고 글만 가지고 학문적으로 따지지만, 그런 자세는 옳지 못합니다.
설사 21세기에 와서 어떤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분이 새롭게 경전을 편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의 근본정신이 어긋나지 않고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면 그 역시 세존이 설한 것이고 아난이 듣고 결집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 그때야말로 우리에게는 큰 복이 있고 깨우침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신앙인으로서 불교를 제대로 믿고 수행에 임하고자 하는 마음자세로서 경전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꼭 유의하셔야할 내용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 이렇게 한 번 읊조릴 때 마음속으로 ‘세존께서 설하시고 그것을 아난존자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준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과 ‘아 이건 누가 지은 것이다 소설쓰듯이 쓴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대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효과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은 경전을 대할 때는 언제나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아난존자가 우리에게 전해줬고 그것을 나는 이와같이 들었노라 하는 자세로 읽을 때 마음에 깨달음이 올 것이고 신심이 우러나고 법희선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금강경 법회인유분을 다시 한 번 조용히 읽겠습니다.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여시아문하사오니 일시에 불이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사)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하시니라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으로 구하시니라)
爾時에 世尊이 食時에 著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사
(이시에 세존이 식시에 착의지발하시고 입사위대성하사)
乞食하실새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걸식하실새 어기성중에 차제걸이하시고 환지본처하사)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니라
(반사흘 하시고 수의발하시며 세족이하시고 부좌이좌하시니라)
출처 : 염화실
[출처] 금강경 강좌 제2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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