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우상 깨기 - 일본군에 대한 투항 시도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가끔 재야의 고수들을 만난다. 아래 영상을 제작한 유순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김일성 연구의 고수로서, <김일성 1912~1945> 상·중·하를 썼다.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와 그 일가의 정권 세습을 합리화한 주요 근거로 선전해 온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 김일성의 ‘독보적이고 영웅적인’ 항일 무장 투쟁이다. 김일성은 안창호의 민족 교육과 실력 양성에 의한 독립 운동 노선이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들을 평가절하하고, 자신과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다른 독립 운동가들까지 폄하하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 운동사의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놓고 그렇게 책과 영화 등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세뇌해 왔다.
그러나 유순호에 의하면, 그 김일성이 일본군에게 투항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아래 영상 1~3화). 이 사실은 김일성의 ‘독보적이고 영웅적인’ 항일 무장 투쟁이라는 왜곡된 서사를 바로잡아 주고 나아가 김일성 우상화와 정권 세습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렇게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불과 2, 3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항일 연군에서는 굉장하게 큰 인물들이 모두 (일본군에게: 인용자) 붙잡히거나 또는 스스로 귀순하게 되었던 사건이 계속 발생하게 되는데, 이들에 대한 귀순 작전을 가장 선두에서 지휘했던 인물들 가운데, 김창영이라는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김창영이 1939년 6월에 북한에서 이른바 가장 비열하고 어디에 내놓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박득범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이었던 1938년 겨울에, 직접 오늘의 중국 길림성 정우현(당시 몽강현) 경내에, 북한의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의 역사에서는 아주 유명한 남패자라는 굉장하게 크고도 깊은 밀림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일성 부대의 밀영 근처까지 직접 찾아와서 김일성을 귀순시키기 위한 작전을 직접 진두지휘하였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북한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박득범 사건' 즉 가짜 귀순놀이에 대하여, 얼마나 용납할 수 없는 엄중한 문제로 취급하고 있습니까? 그 '한 지대장의 이야기' 이 영화에서도 우리가 이미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바로 김일성 본인이 일본군의 귀순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몰래 거래하다가 발각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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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물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할머니 이보익이 일제당국의 핍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만주로 끌려나왔다고 주장하지만, 처음에 만주로 나왔을 때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평양헌병대나 또는 만주의 그 김창영의 임강 공작반에서 위협하거나 강박적으로 대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은근하게 김일성의 할머니를 잘 타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김창영이 장차 조선도 만주국처럼 평화롭게 독립국가로 될 수 있다는 둥, 그렇게 되면 바로 김일성 같이 조선의 국민들한테 널리 알려진 영웅이 와서 나라를 지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식으로 한바탕 올리췄고, 이와 같은 사정을 김일성에게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을 만나야 하니, 그 김일성으로 하여금 산 밖으로 내려와서 직접 만나 함께 의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식으로 이 할머니를 설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박차석은 그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이보익과 함께 만경대에서 살고 있었던 이보익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맏아들이었고, 그 밑으로 동생 둘이 있었는데, 바로 밑에 동생이 김형록입니다. 이 김형록 부부가 그때 부모를 모시고 함께 살고있었는데, 그때 김형록의 아내, 그러니까 이보익의 둘째 며느리죠. 한창 임신 중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김형록은 부근 어느 벽돌을 굽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팔을 다쳤으나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있었는데, 박차석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돈을 모조리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보익은 일단 일본군이 자기 손주를 만나려고 하는데 별로 악의가 없어 보이고, 둘째로는 이 박차석이 말끝마다 조모님 조모님하면서 무척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모양입니다. 거기다 이보익 본인도 무척이나 손주가 보고 싶었겠지요.
김형권이 만주에서 죽고 강반석이 어린 아들 셋이나, 그러니까 맏이가 김일성이고 둘째가 김철주이며, 셋째가 김영주입니다.
거기다가 그때 김일성은 또 길림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때라 생활이 무척 힘들었을 때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보익은 며느리와 손주들이 걱정되어 셋째 아들 형권을 데리고 바로 안도의 소사하촌에 나와서 한동안 함께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가끔 방학에 손주와 한두 번 보고는 그 이후로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하였지요.
그리하여 이보익은 그때 박차석을 따라 만주로 나왔는데, 김창영 공작반에서는 처음에는 이보익을 그 팔도구의 압강루 여관에 며칠 동안 모시다가 후에는 팔도구에서 가까운 가재수촌으로 옮겨 살림집도 한 채 마련해두고, 물론 그 공작반의 반원들이 집 주변에서 항상 감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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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먼저 김일성과 만나러 들어왔던 박차석은 뭐 북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처럼 죄를 짓고 들어온 사람처럼 만나자마자 무릎을 끓고 앉아 참회하면서 자기가 전향하고, 또 왜놈들이 강박으로 파견하니 어쩔 수 없이 왔다는 둥, 이실직고 다 털어놓은 결과 김일성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박차석은 굉장하게 환대를 받았으며, 김일성은 화롯불에 불고기까지 구워가면서 술까지 함께 마셨습니다.
이 박차석이야말로 김일성에게는 나이로 보나 또는 박차석이 김일성의 삼촌이었던 김형권과 함께 징역을 살았던 그 경력으로 보나 형님 아니면 삼촌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사이였는데다, 바로 지금 김일성이 그토록이나 보고 싶어하고 있었던 할머니를 모시고 지금 몽강 지방에까지 나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얼마나 박차석에게서 알고 싶은 소식들이 많았겠습니까.
더구나 박차석이 그동안 김창영에게서 교육받은 대로 조선도 만주국처럼 얼마든지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내용을 장황하게 전달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실제로도 일본과 만주국이 치외법권 양도조약도 체결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하게 그럴듯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대외에 계속 내어보내고 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벌써 얼마나 많은 양정우의 부하들이 이미 귀순했고, 그들은 모두 처형당하거나 또는 처벌받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이 모두 만주국의 양민으로 정착하고 또 정착금도 받고, 모두 잘 살고 있다는 소식들이 계속 산속으로 전해들어오고 있던 때이기도 하였으니 솔직히 김일성이 혹할 만도 했지요.
그러나 김일성은 여전히 만주국에 대하여 다는 믿지 않고, 계속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담판과정에서 김일성이 직접 김창영 쪽에 제출했던 담판조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단 김창영 쪽에서는 박차석을 통하여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귀순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만약 귀순하게 되면 김일성 등 주요 간부들에게는 거액의 상금은 물론이고 외국으로 유학도 보내고 일반 병사들에게는 모두 정착금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정착하거나 또는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는 만주군 또는 경찰계통에서 취직할 수 있게 한다는 조건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김일성은 뭐라고 대답을 보내왔느냐면, 자기는 부하들과 절대 헤어지지 않고 부하들도 모두 함께 만주국 내 간도성이나 통화성 경내에서 어느 한 지역을 정하여 자기와 자기의 부하들이 모두 한 곳에서 함께 귀농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그 지역의 행정과 치안 경비에 대해서도 만주국 정부에서 상관하지 말고 자기들이 다 책임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도 또 걱정되어 자기들은 만주국은 못 믿지만 자기들이 귀순하게끔 인도해준 김창영은 믿을 것이므로, 자기들이 정착하게 될 지역의 최고 행정장권에 김창영을 임명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창영의 회고자료에 보면, 김일성이 뭐라고 요구했냐면, 만주국 정부에서 만약 김창영을 간도성이나 또는 통화성의 성장으로 임명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김창영이 성장으로 있는 그 성에서 한 지역을 선택하여 정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자기들도 더는 만주국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는데, 이런 조건들을 직접 편지로 작성한 후 그 편지를 바로 박차석에게 맡겨 직접 김창영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그때 박차석을 보내면서, 자기가 할머니에게 전달해달라고 할머니에게 보내는 쪽지와 함께 산삼도 한 뿌리 맡겼다고 하는데, 그 쪽지는 분명하게 김일성의 할머니 이보익에게 전해졌으며, 이 쪽지 내용은 광복이 난 이듬해였던 1946년 5월에, 정확한 날자는 5월 29일 자의 <정로>라는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정로>가 바로 오늘날 북한의 노동당의 기관지인 <노동신문>의 전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중국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때 박차석에게 맡겼던 산삼은 사실상, 김일성이 자기의 할머니에게 보낸 것이 아니고 만주국에 귀순할 수 있게끔 연줄을 놓아준 김창영에게 보낸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정로>에 실렸던 김일성이 자기 할머니에게 보냈던 쪽지 내용은 이러합니다.
“할머니의 극진한 심정은 잘 알았습니다. 남아 한 번 국사에 몸을 바친 이상 그 몸은 완전히 나라의 것이요 민족의 것인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반가이 할머니 앞으로 돌아갈 날이 있사오니 안심하시고 계십시오.”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자자합니다.
북한에서는 후에 이 <정로>를 모조리 회수했으며, 이 쪽지 내용을 북한의 인민들이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여기 이 쪽지내용 속에 어디에 한마디라도 만주국과 일제에 대하여 꾸짖는 말 한마디가 들어 있습니까? 오히려 "머지않아 반가이 할머니 앞으로 돌아갈 날이 있다"는 내용이야말로 곧 이제 귀순하고 산에서 내려올 것이며, 조선도 만주국처럼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립하게 될 것이며, 그때 자기는 이 독립된 조선의 어떤 유공자가 되어 할머니 앞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의 의미가 다분합니다.
그래서 이보익도 후에 그 만선일보의 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진행할 때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느냐면, 내 손주도 이제 오래지 않으면 곧 우리 가족과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양정우란 놈의 방해로 귀순하는 일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식으로 양정우를 욕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증언 또는 증거자료들을 종합해보면 김일성이 당시 귀순하기 위하여 실제로 김창영과 진정을 가지고 담판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Aovv2_P6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