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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진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레위기 23,1.4-11.15-16.27.34ㄴ-37
마태오 13,54-58
저희 성당 앞에는 1.5톤 트럭을 가게삼아 여러 가지 과일을 파시는 분이 계십니다.
소규모로 하시는 일이다 보니 그 과일들의 상품 정도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맛있지도 않은 과일을 맛있다며 판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을 상인으로서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일이면 어김없이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는 개신교 신자로서 그 교회에서 집사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상인으로서는 별로였지만 교인으로서는 본받을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맛없는 과일을 몇 번 맛있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과일이야 이것이 맛있으면 저것은 맛없을 수도 있고,
자신이 먹어 본 것은 맛있지만 남이 먹은 것은 맛없는 것일 수도 있기에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주일을 지킨다는 점이었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로서 그런지 맛없는 과일을 파는 것 같은데도
여지껏 장사를 계속 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우리 성당 앞의 그 개신교 신자 장사꾼처럼 똑 같은 방식으로
과일 장사를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는 주일에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거룩한 모임을 하라는 계명을 알기라도 하는지 아주 굳굳하게(!) 주일에 장사를 계속 하십니다.
그러다 가끔 주일 미사에 빠지시기도 합니다.
이런 천주교 신자의 주일 지내는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분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현실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하루라도 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신들이 가진 생각, 신념, 믿음 때문에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자렛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1독서는 계절에 따른 야훼 하느님의 축제일과 거룩한 모임을 하는 날에는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함을 알려줍니다.
이 두 이야기를 오늘 현실에서 보게 되는 두 과일 장사에게 적용한다면
전자인 개신교 신자 과일 장사는 그 믿음과 행동이 후자인 천주교 신자 과일 장사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개신교 신자의 경우엔 제1독서의 말씀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의식주의 해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루카 복음 12장 31절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걱정하며 휴식도 없이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산교구 장용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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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주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레위기 23,1.4-11.15-16.27.34ㄴ-37
마태오 13,54-58
숨겨진 시간 속의 영적 여행
사람들은 가끔 잠적 내지 잠수를 한다.
이유가 뭘까?
영원한 시간의 신비를 알고자 함이고, 영혼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설산이나 밀림, 우주를 여행한 사람은
그 안에 자신과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 느낌이 바로 영적 여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분의 숨겨진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의 영역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다.
친척형제들은 야고보·요셉·시몬·유다이다.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저 사람이 지혜를 어떻게 얻었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랄 때 예수는 저런 위인이 아니었는데.’ 하며 부정하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보아 예수님은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성장과정에서 신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이 더 예수님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람에겐 다 때가 있다.
예수님도 홀연 자신의 때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서른이 되어 나자렛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나자렛에 들렀는데 그때는 이미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과거의 행적만 보고 단언을 하는 것일까?
내 이야기를 해보자.
초중학교 시절 나를 알던 사람들은 “뭐? 그가 신부가 됐다고?”,
“야! 서천 소가 웃겠다.”라고 할 것이다.
초중학교 시절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내 영적 삶의 과정을 헤아린다면 과거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 또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뭐 대수인가?
예수님은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갔다.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들에겐 조금의 흔적만 남기고 떠나신다.
그렇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지금보다 한 단계 그분께 더 나아가는 것이 무엇이며,
영적인 삶에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식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예수회, 이인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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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철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레위기 23,1.4-11.15-16.27.34ㄴ-37
마태오 13,54-58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존중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그만 택시 기사와 말다툼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당 부근에 늘 차가 막히는데, 기사가 다른 길로 돌아가길래
“다른 길로 가려면 한마디 해주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꽤나 공손하게 지적했다고 했는데,
그 택시 기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면서 막힌 걸 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그때 내려달라지 않고 왜 이제 이야기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다른 상황에서 더 싸울 수도 없고, ‘손님이 그 정도 말도 못하느냐,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라’ 하고 내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그저 당연한 내 권리를 상기시킨 것뿐인데, 고약한 기사를 만났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로만 칼라까지 하고 있었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택시 기사와 말다툼이나 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습니다다.
이런 저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니, 늘 인정받고 대접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자들과 회의를 할 때, 저와 의견이 다를 때는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신부인 제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 때는 쉽게 화가 나곤 합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좀 더 너그러웠다면 택시 기사에게 어쭙잖은 훈계를 하는 대신,
“이렇게 막힐 땐 참 짜증나시죠?” 하고 먼저 그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제주교구 임문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