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先山)은 야산에 있지만 초입에 경사가 심한 편이다. 산소에 이르는 산길은 울창한 수림으로 대낮에도 혼자 걸으면 으스스하다. 선친께서 정정하실 때 혼자 이 경사진 곳에 올라 평평한 산등성이 걷기를 좋아하셨다. 사후에 당신께서 영원히 누울 곳으로 마음에 두고 즐겨 거닐었다. 이른 봄 진달래꽃 필 무렵과 가을걷이가 시작되기 전 단풍이 물들 때면 자주 다녀오시곤 했는데 선산 인근에 사는 일족들을 만나고 제실을 둘러보고 오는 것이 노후의 즐거움이었다.
유명 풍수를 대동하고 묏자리를 잡아 놓았으니 잡목을 베어내고 주변을 정돈하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형님과 나는 무성하게 자란 아까시나무를 비롯한 잡목을 베어내고 묘지를 조성했다. 아버지가 가끔 둘러보시고는 양지바르고 경관 좋은 묏자리라 흐뭇해하셨다.
부모님은 부부의 정이 깊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과음으로 평소에 자주 티격태격했지만, 약주를 끊고 뇌졸중으로 4년간 투병하셨다가 하늘나라로 가시자 건강하셨던 어머니도 석 달 후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두 봉분 둘레에 사철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정성을 다해 유택을 조성했다. 생전에 편히 모시지 못한 불충을 갚고자 사후에라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했다.
한 해가 지나니, 잔디로 덮은 묘지 주변 생태계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두 해가 되자, 억새와 아까시나무가 1년에 거의 1m 높이로 자랐다. 개밀, 망초, 괭이사초가 무성할 때도 있고 띠풀이 완전히 뒤덮을 때도 있었다. 이후에도 거의 2년 주기로 생태계가 변했다. 매년 한식날에는 봉분에 그늘을 짓는 나뭇가지를 베고 주변의 잡목을 정리했다.
언제부터 전해지는 풍습인지는 모르겠다. 해마다 조상의 무덤을 덮은 목초를 베고 봉분과 그 주변을 다듬으며 한 지역 생태계의 천이(遷移)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 식물생태학 공부에 도움이 된다. 매년 벌초를 하도록 한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읽을 수 있다.
나는 예초기 사용에 능숙한 편이다. 오랫동안 집 마당에 잔디를 가꿔 일 년에 네 번은, 예초(刈草)를 해 왔다. 예리한 칼날이 회전하는 예초기는 초보자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동력 기계다. 벌초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한 손에 힘을 약간 줄이면 예초기의 톱날이 땅을 파고들어 돌과 흙을 튀게 한다. 튀어나온 돌에 실명의 위험이 있어 보안경을 써야 한다. 동생들과 아들, 조카들이 벌초하겠다고 해도 예초기를 선뜻 맡기기가 두려워 베어낸 풀을 묘지 옆으로 치우는 일만 시킨다.
요즈음은 2년 주기로 국토를 항공 촬영한다. 지역과 지번을 알면 그곳 지형 곳곳의 형태를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지역 농협에 벌초를 대행하고 수수료를 수납하기에 벌초에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자손들도 내 힘이 미칠 때까지만 벌초에 참여하고 나중에는 대행으로 송금만 하면 된단다. 면면히 흘러오는 관습도 문화도 세월 따라 편리하게 변하는 듯하다. 손자 세대에 이르면 하나뿐인 손가가 증조 부모의 분묘를 제대로 관리할지 의문이지만 믿어보기로 한다.
격동기에 태어난 우리 세대 부모들은 배운 지식이 없고 자연과 공동체로 살다가 떠나갔다. 경험을 바탕으로 농사를 짓고 자식을 키웠다. 나라 없는 설움과 못 배운 한(恨)을 무한한 희생심으로 승화하여 자식들의 지적(知的) 눈을 뜨게 하셨다. 권속을 건사하느라 부모님 생전에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한으로 남았다. 내 노후의 삶이 부모님 노후보다 편하다 보니 부모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더하다. 유택이라도 잘 다듬고 가꾸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믿는다.
며칠 전, 벌초를 다녀왔다. 이전과 달리 예초기 다루기가 힘겨웠다. 어쩌다 내 인생에 저녁노을이 왔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동생들과 아들, 조카들이 곁에 있는데 서러운 눈물이 나와 민망했다. 다행히 예초기의 굉음에 내 곡성이 묻히고 눈물은 땀이 흡수해 주었다. 충혈된 눈은 색안경이 가려주었다. 말끔히 정리된 묘지를 자꾸만 뒤돌아보면서 선산을 내려왔다. 내 손으로 몇 년이나 더 벌초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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