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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 이완용과 유인석을 중심으로1) -
이 나 미*1)
<국문요약>
이 논문은 구한말에서 일제시기까지의 주요 이념적 대립구도였던 ‘친일개화-
수구보수’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협력자와 저항자에 대해,
각각 ‘친일 보수주의’와 ‘유교 근본주의’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원칙
보다 실리를 중시하며 기존질서의 유지를 강조한다. 또한 불평등을 당연시하며
경쟁을 중시한다. 반면 근본주의는 종교적 성향이 강하므로 경전과 성현의 말
씀을 따르며 성지를 중시한다. 또한 죽음을 불사하면서 원칙을 고수하고자 한
다. 전형적인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이완용과 전국적 항일 지도자였던 유인석
의 사고를 비교하였을 때 그러한 보수주의와 근본주의의 차이는 두드러지게 나
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완용의 가치관은 실리적이며 유인석의 가치관은 규범적이다. 이완용은 뚜
렷한 원칙을 신봉하지 않았고 만일 원칙이 있다면 때에 따라 변신하여 ‘살아남
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유인석은 살고 죽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
리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금수가 되어 살아가느니 인간인 상태로
*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연구위원 / 정치학
1) 이 논문은 2003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해서 연구되었음
(KRF-2003-037-B00002).
담론 201 9(2), 2006
pp. 05 - 35
6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또한 이완용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국제 현실에 순응하여 대세에 따를 것
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동양평화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반면 유인석의
국제질서관은 소중화론으로, 화문화를 조선이 완성하였다고 보았다. 이는 조선
을 제2의 성지로 본 것이므로 사대주의라기보다는 근본주의라고 보는 것이 타
당하다.
따라서 친일개화파가 반민족적이긴 하나 개혁적이며, 의병운동가가 민족주의
적이나 시대착오적인 수구파란 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제어: 친일, 항일, 이완용, 유인석, 보수주의, 근본주의
1. 머리말
이 논문의 문제의식의 출발은 한국의 보수주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
까 하는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보수주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문제라 하겠다. 서구에서의 보수주의는, 급변하는
상황에 대해 변화가 아닌 기존 질서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사상 내지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보수주의는 1790년에 발표된 버크(Edmund
Burke)의 논문 “프랑스 혁명에의 반성”(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즉 서구에서 보수주의는 프랑스 혁명에 반
대하여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휴 세실은 보수주의를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불러일으켜진, 이 혁명이 탄생시킨 경향
에 반대하는 세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비레크, 1981: 13). 보수주의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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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정의는 오늘날에 이르러, ‘혁명적 변화에 반대’
한다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구 보수주의의 경험을 고려할 때, 한국의 보수주의 즉 한
국에서 ‘급진적 변화에 대한 반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시기는 대체로 외세 침략을 앞둔 조선 말기부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시기는 한국 사회에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서구 문물의 수용과 더불어 이것을 받아들여
사회를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서양과 일본을 물리치고 전통을 오히려 더
굳건히 지킬 것인가 하는 논쟁이 첨예하게 대두되었다. 보수의 한 갈래로
서 오늘날에도 많이 사용되는 ‘수구’라는 용어가, 변화에 반대하여 기존 질
서를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의미로 이 시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즉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세력이
수구파라면 일본을 포함하여 외래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외세와 협력해야
한다는 세력이 개화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시점 이후에도 일본에 협력하고자 한
세력은 개혁적인 세력이며 이에 저항하여 격렬한 의병항쟁을 벌였던 유생
들은 수구적인 세력인가. 즉 그동안 학계 일각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이 암
시하는 바와 같이, 친일파2)는 근대화론자이며 의병운동가들은 완고한 수
구파인가. 이 논문은 이러한 분류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을 문제로 제기
하여, 새로운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쓰여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제 협력자들은 여러 범주로 분류할 수 있으나 이완용과 같은
인물은 개혁가들이 아닌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으며 유인석과 같은 의
병운동가는 보수주의자라기보다는 종교로서의 유교를 중시한 유교 근본주
2) 여기서의 ‘친일파’는,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개화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1905년 일제
가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이후, 한일합병을 포함하여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지지하고 정당화한 세력들을 지칭함.
8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의자로 구분하고자 한다.
보수주의는 하버(William R. Harbour)에 의하면3) 첫째는 신(神)과
질서잡힌 우주를 강조한다. 이것이 관습과 전통의 존중으로 나아가게 된
다. 이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인간이 무엇을 설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혁명, 사회주의를 포함하여 모
든 종류의 유토피아니즘을 반대한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통제가 필요하
다는 입장이며 따라서 엘리트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또한 실용주의와 경험
주의를 존중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보수주의는 크게, 버크(Edmund Burke:
1729-1797)식 보수주의와 메이스트르(Josep De Maistgre: 1753-1821)식 보
수주의로 나뉠 수 있는데(비레크, 1981: 14-16) 대체로 보수는 전자, 수구
는 후자로 볼 수 있겠다. 버크는 변화를 어느 정도 용인하여 융통성이 있
는 반면 메이스트르는 반동적이고 군주제와 권위주의를 옹호했다. 무엇보
다도 버크는 변화가 불가피한 현실과 타협했다는 점에 메이스트르와 차이
가 있다.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에도 살아남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수
주의의 힘은 그러한 ‘타협’과 ‘변화를 용인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아무도 메이스트르를 비롯한 완고한 비타협적 보수주의자를 기억하
는 사람은 없다. 이는 항일독립투쟁의 이념 중에서 의병운동의 유교 이념
이 사라진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이러한 보수와 수구는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로도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대교 신봉자들의 이념적 성향과 태도는 보통, ‘정통파(orthodox)’,
‘보수파(conservative)’, ‘자유주의파(liberal)’로 구분되는데, 이를 보더
라도 교리를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근본주의적 성향과, 필요에 따른 변화
를 허용하는 보수주의는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보수주의는 실리를 중시하고
3) 김용민은 하버의 정의를 10개로 정리하였는데 여기서는 좀 더 축약하였다
(김용민, 1999: 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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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는 원칙을 중시한다. 보수주의는 안전을 중시하므로 위험을 감수
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대세에 따른다. 반면 수구는 항상 돌아가야 할
원칙과 유토피아가 있으므로4) 이를 지키기 위해 과격한 투쟁도 불사한다.
이완용의 경우 본래 위정척사파로서 갑신정변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나 시
대에 따라 친러, 친미, 친일로 변신하면서 당시 가장 강한 세력에 편승하
여 살아남는 묘기를 보여준다. 보수주의의 주요 내용인 실리주의만이 그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변화를 용인하지
않으므로 과격하다. 항일투쟁 중 의병항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유도 그들이
유교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본래 기독교근본주의를 줄여 말한 것으로, 기독교를 자유주의적으로 해석
하는 것을 반대하고 과학과 공존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이
슬람근본주의란 용어도 등장하였다. 외국의 논문들을 보면 근본주의를 주
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만 적용시키고 있으나 유교 역시 근본주의
가 있으며, 이는 일제에 격렬히 저항한 한국의 의병운동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하겠다.5)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일제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를 이완용과
유인석의 사상을 중심으로 비교해보면서 그것이 각각 보수주의, 근본주의
4) 단 그것이 ‘진보’와 다른 것은, 회귀적이고 복고적이라는 점이다.
5) 유교를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지적이 참고 될 수 있다. “중국을 위주로 하고 한국을 포함하는
동양정치사상은 서양정치사상과 매우 특징적인 차이를 보인다고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동양과 서양정치사상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동양정
치사상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편견이며, 서양정치사상의 방법론으로 동양
정치사상을 분석하는 작업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선입견이다. 동서의 교류
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질 미래를 위해서도 동서정치사상사의 이해에서 우선
은 정치현상은, 인간 사이의 공통현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동서양 사상의
공통점을 먼저 지적한 다음, 동서양사상은 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수렴할
방법은 없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동양정치사상 연구의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
될 것이다”(나정원, 2004: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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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제의 조선 합병을 전후하여 일제에 협력하는 자와 저항하
는 자들로 나뉘게 되는데, 그 중 합병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들은 세 부류
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일진회와 같은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군
부와 우익단체들의 조종과 원조에 의해 활동하였다. 두 번째로, 정부를 장
악하고 있었던 이완용, 조중응과 같은 고관들로 이들은 이토와 통감부 당
국에서 직접적으로 원조하고 이용하였다. 세 번째로는 계몽운동에 참여했
던 사람들로 일제 침략에 간접적인 동조세력이 되었다(김도형, 1997:
59-60). 이 중에서도 이완용과 같은 고관들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란 점에서도 대표적인 일제협력자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특히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데 있어서는 조선 내 친일파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합병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자가 바로 이완용이다.6)
일제가 조선을 합병해간 과정의 중요한 순간마다 이완용은 결정적인 역할
을 했다. 을사늑약, 정미7조약 등을 체결하는 데에 있어, 주저하는 대신들
과 고종을 설득해가며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일합병은 일제의 잔인한 의병운동 진압과 황실에
대한 협박 속에서 이루어졌다. 구한말부터 합병 전까지 전국에서 의병들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며 합병에 반대하는 민중의
유혈투쟁이 이어졌다. 이처럼 일제 침략에 대한 조선의 또다른 대응은 ‘격
렬한 저항’으로, 대표적인 것이 의병운동이다. 항일운동은 크게 계몽운동
6) 이완용에 대한 연구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매우 저조한 편이다. 1999년도에
들어서야 단행본이 한권 출간되었고 석사논문 두 편, 연구논문 두 세편, 서
평 두 편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그의 친일논리에 대한 논문이 한 편
있다. 그런데 최근 그에 관한 재평가론 내지 옹호론이 최근 등장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논평은 언론이외에 학계의 대응이 거의 부재한 상황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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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의병운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계몽운동은 일부분 개량주의적인 측면이
있었으며 친일로 돌아선 인물도 많았다. 따라서 의병운동은 가장 대표적인
항일운동의 하나이며, 이 논문은 그중에서도 선봉에 섰던 유인석과 그의
사상을 중점적으로 보고자 한다.7) 유인석은 분산되어 있던 의병세력을 하
나로 통합하여 13도 의군을 탄생시켰고, 의군 도총재로 추대되었다는 점
에서 전국적 항일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13도 의군의 형성과정에서 그는
국내외 의병을 통합했을 뿐 아니라 국내의 신민회를 주도한 안창호 등을
참가시키고 이상설을 외교 책임자로 임명했다는 점에서 종래의 의병투쟁
과 입장을 달리했던 애국계몽계열과 공동전선을 기획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윤병석, 1988: 75). 합병 이후 13도 의군의 국내진공이 좌절되고
연해주 지역의 성명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역시 계몽운동가와 함께 참여했
다. 그는 전민족적 지도자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성명회 총대로도 추대되었
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체포요구에 의해 활동이 종료되었다(윤대식,
2002: 80-82).
이 논문은 그의 논리가 전근대적 한계를 가진 이유에 대해, 그를 포함
하여 수구파들이 유교를 신봉한 종교가들이었음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
고자 한다. 이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천주교도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등, 종교는 그 본질상 전근대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논리
의 한계는 종교가 갖는 본질적 한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또한 유인석의 항일논리는 대단히 현실적인 면도 갖고 있었다. 대체로
의병운동은 민족주의, 애국심 등의 동기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고, 계몽
7) 유인석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되어 왔으나 저서나 논문이 그리 많
은 편은 아니다.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에 들어서야
전기물이 하나 발간되었을 정도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강원도 지역의 학계
를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유인석의 사상을 다룬 기존 논
문들은 대체로 그의 의병활동과 유교사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사
상을 다룰 경우 대체로 그의 위정척사 논리가 갖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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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가들에 의해 이들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라고 평가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인석의 의병활동 과정과 그의 논리를 보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
으며 대단히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 역시 일제 협력자 이완
용과의 비교를 의미 있게 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친일파에
대해서는 곧잘 그들의 현실적 선택을 이유로 정당화되곤 하며 의병운동가
에 대해서는 그들의 비현실성을 들어 비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현실성에 의해 친일, 반일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종합해보면
이 두 사람의 비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그 둘은 전형적인 친일·반일 인사였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대표
적·적극적·실천적인 친일·항일 인사로서, 이완용은 다른 여러 반대 여론에
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직접 한일합병을 추진한 인물이며, 유인석은 의병지
도자와 계몽운동지도자가 모두 참여한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에서 각
각 총재, 회장, 수총재에 추대된 바 있는 반일운동계 전체의 대표적 지도
자라 할 수 있다.
둘째, 두 사람 다 신·구학문을 고루 접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이완용
의 경우 어릴 적 유학을 공부하다가 육영공원에서 서양학문을 공부했고
미국에서도 신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유인석 역시 이항로의 지도를
받은 전통적인 유학자이나 중국, 러시아에서의 망명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
였다. 그의 저서 『우주문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서양의 사정에 대해서
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완용이 서구 및 일본의 근대적 사상에
만 몰두하였다거나 유인석이 위정척사 논리밖에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오
히려 이완용은 유교와 불교에 심취해 있던 전통주의자였으며 유인석은 과
학·기술에 국한하기는 하였으나 서구 학문도 일부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셋째, 두 사람의 출신과 성장과정, 성격도 일부 흡사하다. 우선 두 사람
다 보잘것없는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대가집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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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 이완용이 양자로 들어간 집안이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는 한편 유
인석의 집안은 권력의 미움을 사서 지방에 은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친일·항일을 가르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또한 두 사람 다 조용
하고 침착한 성품을 지녔다. 유인석은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인자한 성격
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완용은 치밀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기회를 잘 살펴서 높은 관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의 친일 행각에 대해 이러한 그의 기회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
인 성격이 거론되며, 유인석의 경우에도 의병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한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개인의 출신과 성격 차이로 친
일과 반일이라는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친일과 반일로 나뉘게 되는 요인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그 두 사람이 처한 환경과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논문에서
는 그러한 입장 차이가 가져온 그 둘의 사고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즉 그 둘은 세계관, 인생관, 대외인식에서 매우 두드러진 차이를 보
이는데 본 연구는 그러한 사상의 차이를 면밀히 고찰하는데 목적을 두고
자 한다. 이들의 사상을 통해 ‘친일-근대화’ 대 ‘의병투쟁-수구’의 등식을
재검토하고, 대표적인 친일, 항일 인물인 이 두 인물의 사상이 각각 보수
주의, 근본주의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2. 이완용의 제국주의 협력 논리: 보수주의
이완용의 친일논리 즉 제국주의 협력 논리는 무엇인가. 그의 논리는 ‘동
양평화론’, ‘진화론적 국제정치관’, ‘문명론’ 등으로 분석된 바 있다(박치문,
1994). 그러한 논리들이 갖는 공통점에 주목을 하고, 다른 적극적 협력자
였던 송병준, 이용구의 논리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고민하였을 때 이완
14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용의 제국주의 협력 논리는 보수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서구에서도
보수주의는 제국주의 옹호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독일의 경우 나찌 협
력에 대한 옹호는 보수주의 논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구승회, 1993:
25-45). 우리 사회의 경우, 마찬가지로 친일에 대한 재평가는 주로 보수
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한말 당시 보수주의자라 함은 유교 신봉, 왕권 강
화, 반서구 사상을 가진 위정척사파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완용
역시 유교와 불교를 신봉했고 고종에 충성했으며 제사를 늘 빼놓지 않고
지내고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고 효에 힘쓴 사람이었다. 선조는 노론계열로
서 그는 6세 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마치고 7세 때 효경, 8세 때 소학을
마쳤다고 한다. 영특한 재능 덕에 명문가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
었는데8) 양부는 처가가 민비와 친척지간이었고 대원군과는 친구지간이었
으며 이완용의 서형인 이윤용은 대원군의 사위가 된 사람이다. 25세 때
임오군란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된 증광별시에서 병과에 합격, 이후
계속적으로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러한 그가 초기에 수구파의 입장이었으
리라는 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갑신정변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도 나타난다. 갑신정변의 잔당인 신기선을 국문하라고 민종식, 이준용 등
과 함께 글을 수차례 올렸다. 이 당시 그는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임
대식, 1993: 144-145). 그는 일본과의 합병을 추진할 때에도 황실 안전
을 요구했고 이후에도 황실에 충성했다. 물론 일본 천황에도 충성을 바쳤
다.
또한 그를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할 경우 다른 적극적 친일파인 송병준,
8) 그는 이 당시 당대의 대가들을 모시고 유교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정익선
선생 하에서 대학, 논어를 학습하고 당대의 명필 이용희 선생하에서 서법을
익혔다. 이완용은 당대의 명필가였으며 만년에는 천자문 1권을 출판하였다.
학문에 있어 대가란 평을 들었으며 역사에도 관심이 있어서 『조선사』 편
찬을 시도한 일도 있었다(김명수, 1927: 39-40, 476-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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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 등과의 차이가 부각된다. 송병준은 일진회를 조직하고 조선을 합방
하라는 탄원서를 보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파였으나 이들은 반체제주의자
이고 급진주의자라는 면에서 이완용과 차이가 난다. 송병준과 이완용은 한
때 연립내각을 구성하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일진회와 이완용은 갈등관
계에 있었다. 일진회 평의원 유재한은 이완용이 정치 개선에 힘쓰지 않고
자신의 친인척을 관직에 등용시켜 ‘가족정부’ 형성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
난하며 이완용의 사직을 건의하였다. 이완용은 양반관료 중심의 정치체제
를 지향한 양반파라고 한다면 일진회는 양반질서 해체를 지향한 평민파라
고 할 수 있다. 이완용은 양반출신으로 관료적 정치가이며 점진주의를 지
향하고 시세순응주의이며 안전지향적이나 송병준은 천민출신으로 대중 집
단적 정치가이고 급진주의적이며 극단적 친일주의를 주장하고 모험적이라
할 수 있다(한명근, 2002: 68-70; 이나미, 2004: 230-232).
(1) 실리 추구
실리주의는 보수주의의 대표적인 내용 중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보수주
의는 인간 이성과 유토피아니즘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며 점진적 개혁의
길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고의 바탕이 되는 것이 실리주의이다(이나
미, 2002/2003: 56).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재산을 자랑으로 여기며 재산
으로부터 거액의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이 비판을 당할 때는 재산을 옹호
해주는 보수주의자의 논의에 도움을 구하게 된다. 보수적이라는 말에 종종
주어지는 악명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비레크, 1981: 19).
이완용의 제국주의 협력 논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실리주의이다.9) 이러한 그의 실리주의는 그가 보수적이면서 위정척사파와
갈리게 되는 지점이며, 친일과 반일을 가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완용은
9) 이완용의 실리주의에 관한 내용이다 (이나미, 2004: 232-235).
16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왕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제사 지내는데 열심이었으나 그것은 관행
과 습관에 따른 것일 뿐 뚜렷한 원칙을 신봉해서 그랬다고 보기 어렵다.
만일 그에게 일관된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때에 따라 변신하여 ‘살아남아
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평하면서 친미, 친러, 친일로
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을 숭상하고 산림학에 종사했으나 갑오경장이 운의
외(運意外)로 도(道)를 존(尊)하고 유(儒)를 숭상하는 것은 시대에 뒤지
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됨에 따라 서양과의 교제가 매우 팽창했기 때
문에 지난날의 구업을 교수(膠守)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서양
학문으로 전환하기 위해 하루 아침에 도복을 벗고 머리를 깎고 구주(歐
洲)에 건넜다. 그것은 시(時)에 연(緣)하고 의(宜)를 제(制)하는 인사
(人事)이며 또한 나의 경험한 바이다.
최초 25세 무렵에는 종래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
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그때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
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일미 년에 이르러서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인해 노당(露黨)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일로 전쟁이 끝날 때
에 이에 전환하여 일파(日派)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
함(宜)을 따르는(制)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
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
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를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김명수, 1927:
802-804).
그는 일본과 적극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는 이유로서 그것이 ‘이익’이 됨
을 강조하였다. 지리적인 이유로 또한 일본이 한국을 개발시키려는 방침이
일관적이기 때문에 일본과 제휴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이다(한명근,
2002: 52). 또한 일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성일보는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의 상정”으로 왜 죽음을 불사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려는가 반문하
고 있다.
담론201 9(2) 이 나 미 17
제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깨달아라. 제군, 미친 이가 아니라면 깨
어나라.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제군은 왜 죽음을 스스
로 택해서 호생(好生)의 덕혜에 복종하지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어리
석음을 저지르는가(경성일보, 1919. 10. 22; 강동진, 1980: 44).
반면 위정척사파와 의병운동가들의 입장을 보자. 이들은 ‘조선이 제국주
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
합하여야 한다’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의 주장(박충석, 1982: 212)에 대
해 반대하였다. 최익현은 “차라리 중화의 것을 지키고 사람노릇을 하다가
망할지언정 이적의 짓을 하고 금수의 짓을 하면서 살 수 없는 것”이라 하
였다(장현근, 2003: 49). 유인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 필
요하지만 조선이 조선일 수 있는 까닭만은 결코 버려서는 안”된다고 하였
으며(김남이, 2003: 313),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을 살피지 않고 생(生)과
의(義)를 선택함에 있어 생을 버리고 의를 택해야 한다고 하였다(유인석.
2006: 23).
즉 이완용에게 있어서는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고 유인석의 경우
는 짐승처럼 사는 것보다 의를 지키며 인간답게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
다. 따라서 유인석의 경우 ‘존속(conserve)’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죽음을 불사하며 원칙을 지키는 유교근본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남기 위해 실리를 택했다 함은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완용의 경우는 “잘살기 위해서” 실리주의를 택했다고 하
는 것이다. 이완용은 활동 전(全) 기간에 걸쳐 금전과 밀착되어 있었고, 심
지어는 옥새를 위조하여 공금을 횡령한 사실조차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학부공금 4천불을 횡령하여 영수증까지 위조한 바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학부협찬 윤치호를 위협하는가 하면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학부대신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을사조약 체결
18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이후 이완용 가문은 중요한 관직 독점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가족정부”라
풍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 체결의 큰 공로로 인해 총리직에 올랐
고 그 후 수차에 걸쳐 내각변경설이 있었지만 그는 끝내 총리직을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는 일본인 관료들에 대한 뇌물공세와 반대파 회원에
대해 금전으로 유혹하기도 했던 것이다(김행선. 1984: 7-8).
(2) 경쟁 강조
경쟁의 논리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지지된다.10) 오늘날 보수주의자들
은 사유재산과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념을 옹호하면서 사
기업가의 창의력과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하버, 1994:
161). 또한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불평등은 인간이 자유롭도록
허용하는 자연적인 결과하고 본다(김용민, 1999: 29; Vierieck, 1981: 19).
다음은 이완용이 경성학당 운동회에서 학생들에게 한 연설을 기사화 한
것인데 이는 경쟁과 관련하여 시사를 주는 언급이다.
학도들을 권면하여 가라대 세상에 사람이 살려면 승벽이 있어야 그 사
람이 언제든지 남보다 나가는 때가 있는지라. 오늘 달음박질 내기하는
것이 경계가 세계에서 사는 경계와 같은지라. 누구든지 힘을 다하여 달
음질을 하여 기어이 붉은 기 먼저 얻으려 하는 사람은 세상에 남에게
지지 아니 하려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 이 승벽을 가지고 백사를 행하
면 언제든지 이기는 때가 있으리라 하며(독립신문, 1897. 4. 15)
세계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같
이 독립이 되어야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같이 망하
든지 좌우간에 사람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
라노라(독립신문, 1896. 11. 23).
10) 기든스는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수주의를 들고 있다(기든스,
1998: 43).
담론201 9(2) 이 나 미 19
위와 같은 언급을 보면 윤덕한의 지적대로 이완용은 실로 “세계화 논리
의 증조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다(윤덕한, 1999: 56). 앞서, 이완용은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논리를 펼쳤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이 역시 경쟁적
질서를 표방하는 세계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앞서가는 세계
화 논리가 과거에는 바로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논리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나미 2004: 235-236).11)
실제로 많은 일제협력자들이 생존경쟁에서의 승리야말로 중요한 것이라
고 강조함으로써 규범이나 원칙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도록 하였다. 친일파
인 이광수 역시 “적을 피하고 먹이를 잡는 법” 즉 피적포이술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데도 조선의 교육은 이용후생적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서양이
우리보다 우수한 것은 이러한 피적포이술을 잘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강조
하였다(이광수, 1924: 78-90). 그러나 그의 논리는 경쟁에서 이겨야 함을
강조했다기 보다는 당시 완전한 독립을 꿈꾸고 투쟁하는 조선인들에게 그
런 허황된 꿈을 꿀 것이 아니라 산업, 과학 등 실질적인 분야에서의 경쟁
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함으로써 조선인을 탈정치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3) 질서와 평화 중시
보수주의는 인간한계의 인식과 더불어 세상과 우주를 하나의 질서잡힌
틀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세계의 대세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과 경쟁적 세계관이 결합되어 탄
생한 것이 ‘동양평화론’이라 할 수 있다. 이완용은 동양의 평화는 일본의
11) 반면 유인석은 경쟁을 중시하는 것에 대해, “경쟁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한
다면 당우삼대의 훌륭한 정치를 하던 시대는 문명이 아니고, 춘추전국의 전
쟁하던 시대가 문명이라는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경쟁은 문명과 지극히 상
반되는 말이라고 하였다(유인석, 2006: 34).
20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한국에 대한 선의의 지도와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1909
년 연설회에서 일본인들에게 “제군은 선진국의 선각자이고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함이 인도상의 책무라면, 우리 국민을 선히 지도 권유하여 그 지식
을 증진시키고 산업을 발전시켜 양국민의 친의를 돈독히 하여 영구히 동
양평화의 기초를 공고히 하게 할 것을 절망한다”고 하였다(한명근, 2002:
53).
그에 의하면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되는 것은 자연적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고 세계적인 대세로서 그렇게 해야지만 동양이 서양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길러 동양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조선과 일본이 상고 이래 동종동족, 동종동근인 것은 역사에 있
어서의 사실(史實)인 바 일한 병합은 당시에 있어 역사적 자연의 운명과
세계적인 대세와도 순리하고, 동양평화를 확보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유
일한 길이라고 확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조선은 국제경쟁이 과격한
때에 있어서도 일본과 함께 일국을 완전히 유지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제군이 아는 바이다. 오늘과 같은 전세계가 개조하는 시대에 즈음하여
우리들은 일만여천방리에 지나지 않는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
백만의 인구를 갖고서 독립을 고창(高唱)한다는 것은 실로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제군이 세계의 대세를 통해(通解)하지 않고
오직 감정적으로 일시에 틈발(闖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군들이여
그것은 우리들이 기피할 수 없는 사실인 바 따라서 나는 생각건대 그
경고문 중 무슨 이유로 생(生)중에 사(死)를 구하느냐고 말하고 싶다. 동
양평화의 대이상을 해결하지 않은 채 어부지리를 획득코자 하는 무리들
을 계고(戒告)하는 바이다. 내지와 조선과의 사이에는 하늘 뜻에 기인하
는 공동 존립과 공동 이해가 있어 단연코 위 두 가지의 분립을 허용할
수 없는 바이며, 우리 조선인들이 일한 병합의 의의와 그 정신이 유효하
게 실현되는 방면을 향해 노력한다는 것은 우리 장래의 행복을 도계(圖
計)하는 최선의 양책(良策)임을 마음 속 깊이 믿지 않으면 안된다(김명수.
1927: 284-287).
위의 글은 3.1운동에 대한 이완용의 3차 경고문으로, 민심을 자극하는
담론201 9(2) 이 나 미 21
내용이 있다하여 오히려 총독부 측에서 신문에 내지 못하게 말릴 정도였
다.12)
그는 동양의 평화가 깨진 것은 한국이 외교권을 잘못 행사하여 러시아
를 포함한 백인종이 동양에 진출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한명근, 2002:
51). 이러한 논리는 일제와 친일파의 전형적인 논리로서, 그렇기 때문에 한
국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더 나아가 외교권을 일본에게 주
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을사늑약 및 한일합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
던 것이다.
동양평화론이 갖는 한계는, 그 이름이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구조적 폭력론’이라고 하는 점이다. 박탈당한 자들이 다른 수단이 없어 가
시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여 의사를 관철시키는 것과 달리 구조적
폭력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제도, 교육, 이데올로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행
사된다.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공격한 것과,
이토와 이완용이 제도나 절차를 통해, 동양평화론이란 이데올로기를 통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몰아낸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강대국이 인권과 세계평화란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
수호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이 역시 때로는 평화란 담론이 보수주의 입장
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이나미, 2004: 236-238).
3. 유인석의 제국주의 저항 논리: 근본주의
유인석의 경우 마찬가지로 일본과 협력해서 서구 제국주의를 물리치자
12) 1차 경고문은 『매일신보』 4월 5일자 1면 1단에 실렸다. 2차 경고문은, 1
차 경고문이 오히려 민심을 자극하자 총독부에 의해 4월 9일자 사회면 5단
에 실리게 되며, 3차 경고문은 5월 30일자로 게재되었다(박치문, 1994: 39).
22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는 주장을 한 바 있으므로 단순한 반일운동가로만 볼 수는 없다(윤대식,
2002: 89-90).13) 그러나 그가 이런 주장을 하였다고 해서 그 역시 친
일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이
런 그의 주장은, 그가 완고하기만 한 비현실적인 수구파가 아니라 일본과
의 협력이 서구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
할 정도로 유연하고 현실적인 인물이었다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그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이 단결해야 한다고 하는 사고는 매우 일반적인 것
이었다. 따라서 유인석의 항일운동은 반일에 국한된 좁은 의미의 투쟁이
아닌 반제국주의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이완용의 경우를
놓고 볼 때도 알 수 있듯이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이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협력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유인석의 반일논리는, 이완
용의 주장이 제국주의 협력논리였던 것에 대응될 수 있는, 제국주의 저항
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특징은 근본주의라고 하는 것이
다. 흔히 유인석을 포함한 위정척사파들을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하는데 앞
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강한 종교적 신념, 실천과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보
수주의자와 다르며 그러므로 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종교적 신념과 실천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종교적 신
념에 따른 세계의 재편성을 꾀하는 정치적 이상까지 포함한 경우를 의미
한다.14) 특히 외세의 공격에 직면한 약소국의 경우 민족주의적인 근본주의
13) 유인석은, “만약 동서양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되면 조선은 일본이 망해도 큰
일이고 망하지 않아도 큰일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유인석의 동양삼국연
대의 구상은 국권회복을 위한 방법론으로서 무장투쟁만으로 일본에 대응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유도해서 조건의 국
권회복을 기대한 것이다.
14) 근본주의는 그 이념은 종교적이나 단지 종교운동만은 의미하는 것이 아니
다. 근본주의는 세계를 바꾸려는 운동이며 간혹 폭력을 수반한다. 종교는
인종, 민족 갈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되며 그것은 심지어 같은 종교 내
부에서도 발생한다(Bruce, 2000: 8).
담론201 9(2) 이 나 미 23
가 보다 강화되는 측면이 있으며 구한말 조선의 위정척사파 역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급진적(radical)이라고 설명될
수 있으므로15) 급진주의와 공통적이다. 그 이유는, 종교는 현재 세상의 지
배자보다 더 높은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는 잠
재력을 갖기 때문이다(Bruce, 2000: 1). 이들의 보수주의는 ‘보수’가 아니라
과거를 다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전통에의 위협에 대한 저항의 목적
은 초기 신앙공동체의 열광과 맹세를 다시 구현하려는 것이다(Bruce, 2000:
14). 따라서 안정과 질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보수주의와는 크게 다르
다고 할 수 있다. 유인석의 아래의 글은 그러한 근본주의의 성격을 잘 보
여준다.
공사에서도 온전히 살려는 바람은 없고, 화복에 있어서도 죽을 사 자의
신표만을 한결같이 지킬 것입니다. 말의 피를 마시며 동맹을 하니 성패·
이둔에 대해서는 제가 살펴보는 바가 아닙니다. 생과 의를 선택함에 있
어서는 생을 버리고 의를 택함으로써 경중대소가 이에 분명하게 갈라집
니다. 대중의 마음이 다 따르니 어찌 백령의 도움이 없겠으며, 국운이 다
시 열리니 사해가 영원히 깨끗함을 볼 것입니다... 각자가 다 거적을 깔
고 방패를 베개삼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기필코 망해 가는 나라
와 천하의 도의를 다시 세우고 천일이 다시 밝아짐을 본다면, 어찌 다만
한 나라에만 공이 되겠습니까?(유인석, 2006: 23)
이기고 지는 것과 이득과 손실은 내 알바가 아니요 의리의 길을 갈 뿐
이라...지금 저 왜의 잔학함으로 인해 백성들은 절치부심하여 읍읍마다
봉기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차라리 일본을 죽이고 진사(盡死)하기를 원
한다("칠실분담"; 김남이, 2003: 312에서 재인용).
(1) 종교로서의 유교
15) Bruce는 근본주의를 설명하면서 급진적 종교분파를 예로 들었다(Bruce,
2000: 14).
24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유교는 그동안 정치철학으로서만 강조되었지 종교로 다루어지는 데는
소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과 행위를 비합리적이고 시대적 한계
를 갖는 것으로 규정하곤 했다. 그러나 ‘합리성,’ ‘변화’는 종교의 특징이
아니다. 이들을 종교인으로 이해할 경우 이들의 비합리성, 구시대적인 것
을 이해할 수 있다.16) 조선시대 말 수구파는 구질서를 지키고자 하였지만
이는 주로 그들의 종교를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의병항
쟁 중에도 종교적 예식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인석은 을미의병을 해산
당한 뒤 중국을 다니면서 향약을 실시하고 공자-주자-송시열-이항로-김평
묵-유중교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1900년에 잠시 귀국하여서도
강습례, 향음례를 보급하기에 힘썼다(김남이, 2003: 295).
이들은 서양의 기독교 뿐 아니라 여타의 동양 종교를 금했다는 점에서
도 종교적 특징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17) 즉 불교와 도교도 배척했다. 경
전의 해석을 놓고 분쟁과 갈등이 있다는 것 역시 종교적 특징이다. 종교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마다 많은 순교자가 있다. 이
는 세속적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무도 이를 세속
적 시각으로 재단하여 비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교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 유교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의 종교이다. 우선 유교 역시 신이 있
으며, 그렇게 때문에 마태오 리치는 천주교를 소개하면서 천주교의 하느님
이 동양의 천(天)과 동일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유교에는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성현이 있다. 공자는 성현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신으로 간주
된다.
16) 오늘날까지 많은 종교가 여성을 차별하고 있으며 비현실적인 측면이 많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를 당연시 하고 있으며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지 않
는다.
17) 유인석의 척사론은 성리학적 세계와 가치를 부식시키는 모든 사조와 세력
침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교조주의로 평가되기도 한다(강재언, 1983: 209).
담론201 9(2) 이 나 미 25
공자님은 하늘이시니 하늘을 어찌 어길 수 있으리. 백성을 낳고 기르신
만세의 대종사이시도다. 천하를 안정시키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내
아나니. 공자님 가르침을 길 삼아 오로지 그 한 길로 돌아가야 하리(“공
자교”; 장현근, 2003: 36에서 재인용).
또한 이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반하는 정책에 주로 항거하였다. 예
를 들면 단발령, 변복령에 대한 반발 등이 그것이다.18)
을미 11월에 김홍집 등 여러 도적이 강제로 삭발을 시행하였다. 인석이
급히 사우들을 모아 변고에 대처하는 세 원칙에 대해 논의하였으니, 하
나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깨끗이 쓸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를
떠나 옛 것을 지켜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바른
뜻을 이루는 것 등이었다...삼사가 비록 다르지만 유학의 도를 위한 것일
따름이며 우리 몸을 고결하게 하려 함일 뿐이다(유인석, 2006: 77-78).
흔히 사대주의라고 비판되는 소중화론에 대해서 유교를 종교로 볼 때
이해가 된다. 유인석에게 화의 가치는 국가나 민족의 수준을 넘어선 절대
적인 상위가치이기 때문이다(윤대식, 2002: 76). 그에게 있어 성현의 도와
화의 맥이 끊어지는 것은 나라의 망함과 어버이의 죽음보다도 더 애통하
고 절박한 것이었다.
인석이 처음 스스로 자결하지 않고 이에 사우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상
복을 벗고 거사하였으니, 참으로 성현의 도와 화하의 맥이 금일 우리나
라에서 끊어지게 되어 그 애통·절박함이 나라의 망함에 견줄 바가 아니
었고, 비록 어버이의 상이라 해도 견줄 만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라가 망
하고 어버이 상이 통박함도 마땅히 몹시 망극하고 옛날부터 면할 수 없
는 것으로 사람 모두에게 있는 일이지만, 오직 이 성현의 도와 화하의
맥이 끊어지는 것은 진실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
다(유인석, 2006: 115).
18) 세포이 반란 역시 종교적 신념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하면서 시작되었다.
26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또한 변화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 이완용은 변화해야 살아남는다고 했
으나 유인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조선이 조
선일 수 있는 까닭만은 결코 버려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조선은 “삼사천
년의 단군·기자의 강토이며, 오백여 년의 성신문치(聖神文治)의 나라이며,
희(羲), 농(農), 당(唐), 우(虞) 이래 화맥이 기거하던 곳, 이름하여 소중화
예의의 나라”였다(김남이, 2003: 313-314). “우리나라만이 특별히 우뚝 서
서 화를 회복하여 굳세게 변치 않아 수백년의 오랜 세월 동안 문명을 드
리우는데 이를 수 있었으니, 천하 만고에 화를 이룬 것이 유독 우리나라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유인석, 2006: 50).
(2) 무오류의 경전과 두개의 세계
대체로 근본주의는 이념의 원천 즉 경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
오류이며 완전한 것으로 인정된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특징은 성경의 모든
세부적인 구절이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슬람 역시 코란은 모든 문자가 신의 영원한 말이라고 본다(Bruce,
2000: 13). 중세에 성경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근대 이후 성경은
연구의 대상이 되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졌다. 근본주의는 이러한
도전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다(Bruce, 2000: 13). 경전 구절은
일상생활 중에, 토론 중에 인용되며 특정 믿음과 실천을 정당화하는 데 사
용된다(Antoun, 2001: 39).
유교의 경우 마찬가지로 인정되는 경전이 있다. 위정척사파 학자들은 정
통 유학의 계승자임을 자부했다. 장현근에 의하면, 그들은 유가의 전적들
을 종교적 성전으로 받아들였으며 모두 사실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상적
정치질서의 전형으로 유가 경전에 등장하는 요-순-우-탕-문-무의 시대가
역사상 분명한 사실로 존재하였고, 그것은 최고의 문명국가였으며 실제로
담론201 9(2) 이 나 미 27
중화문명이 우주만방에 펼쳐졌었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후대
중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 또한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들은 그러한 중화문
명국가건설을 열심히 추진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따라서 역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누리는 나라라고 긍정한다. 이미 문·무가 실현했던 최고의 문명국
가건설이 최익현과 유인석이 가려는 이상이었고, 정도인 유학을 존숭했던
후대 중국문명도 볼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중국의 안정과 유교질서
의 회복을 온 몸으로 기대하였다(장현근, 2003: 38).
이상사회가 존재한다고 믿는 근본주의는 세계를 두개의 영역으로 본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경우, 하나는 이슬람의 영역이고 그 나머지는 ‘전쟁의
영역’이다(Bruce, 2000: 45). 유교가 서구를 금수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시 자신과 다른 영역에 대해 그렇게 보았다.19) Munson에 의하
면 근본주의자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편을 선택한 사
람들로 본다(Munson, 1984: 20-21). 그리고 이러한 투쟁을 정치적인 것 뿐
아니라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Antoun, 2001: 21). 유교의 화이관 역시 서
구와 일본을 ‘인간이 아닌 것,’ ‘열등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이 조약을 체결한지 여러 해 만에 오늘날의 큰 재
앙을 초래하여 마침내 우리의 소중화를 멸망시키고 소양과 소왜를 만들
었고, 천지간에 인간으로 복귀하지 못하였으며 만고 이래로 화하로 복귀
하지 못하니 이에 그 애통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유인석, 2006: 51).
사람들은 저들이 조화를 부린다 하여 기뻐하는데 천지의 조화에는 성리
와 형기가 있는 것이다. 형이상·하로 볼 때 저들이 추구하는 것은 형기
의 하일 뿐으로서 그와 같은 것은 조화의 꽃을 활짝 피우는 것이니, 참
으로 망극한 짓이다... 옛 성현의 도리는 성리를 위주로 한다. 근본을 두
19) “동물주의의 물결이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다. 타락한 현대 무용, 관능적
인 현대 연극, 육체를 찬양하는 현대 양식, 성을 암시하는 현대 문학, 아기
대신 개 양육, 끔찍한 이혼의 해악, 이 모두는, 세상에 널리 퍼진 진화론의
타락한 동물주의 철학 때문에 나타나게 되었다”(Strato, 1924).
28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텁게 하기 위해서는 멀고 오랜 것을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중화를 이루
어 천지가 바로 서고 만물이 길러진다(유인석, 1984: 74).
(3) 제2의 성지로서의 ‘소중화’
근본주의가 민족주의로 되는 것은 자신의 나라를 제2의 성지로 생각하
는 데서 오는 것이다. 미국에 온 기독교도인들은 자신들을 이집트를 탈출
한 이스라엘인들로 생각했다. 몰몬교의 Joseph Smith는 요한계시록에 나
와 있는 ‘새 예루살렘’이 미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생
각했다. 이는 조선이 소중화라고 자처한 것과 흡사하다 하겠다. 미국 청교
도인들은 미국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했다. 즉 미국을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하나님의 국민에게 약속된 땅으로 생각했다. Pat Robertson은 미국이 하나
님의 계율을 따르는 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나라로 지속될 것이
라고 주장했다(Ruthven, 2004: 128-129).
이러한 점을 볼 때 ‘소중화’는 비판자들이 생각하듯 사대주의만이 아님
을 알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수구파의 소중화 의식은 미국이 이스라엘
을 성지로 생각하는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이 단지 지형이 좋고 성
현이 많이 탄생하여 성인의 도를 잇고 있는 물리적 ‘장소’로서의 의미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20) 그리고 그 도가 중국에서는 이미 그 수명을
다하고 조선에 이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의
20) “대지에 중국이 있으니 중국은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풍기(風氣)가 일찍 열
리고 사람과 나라가 먼저 생기어서 지극히 오래 되었다. 외국은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풍기가 늦게 열린다. 그래서 나라가 뒤에 이루어지며 오래지
않아 차질이 생긴다... 중국은 나라가 한가운데 있어서 그 행하는 바가 상달
(上達)인데, 상달이란 도리에 통달하는 것이다. 외국은 치우쳐 변두리에 있
는 나라로서 그 행하는 바가 하달(下達)인데, 하달이란 형기(形氣)를 이루는
것이다... 중국은 천지가 처음 열릴 때부터 문명을 이룸이 오래되었다”(유인
석, 1984: 4).
담론201 9(2) 이 나 미 29
이스라엘이 갖는 의미보다 덜 사대적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소중화론
은 중국 중화주의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은 이 세상에서 지형이 가장 크고 풍수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리
고 요·순과 하·은·주 삼대가 그곳에서 제왕노릇을 해서, 예악과 문물이
일어났고, 공자·맹자·정자·주자 같은 성현이 그곳에 사셨기 때문에 도덕
과 학문이 드러났습니다. 커다란 천지보다 위대하고, 밝은 해와 달보다
도 환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사도가 드디어 중국 땅에서 끊어졌습니다.
이것은 어찌 된 변고입니까? 우리나라는 성인이신 기자가 남겨주신 나
라로서 대대로 성군이 일어나셨고 많은 현인들이 흥하시어, 화하의 제왕
과 성현들이 도로 삼았던 바를 얻어서 홀로 지켰으니, 이 하늘 아래에서
아! 또한 기이한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재앙으로 사도가 또
한 우리나라에서 끊어지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어찌 변고가 끝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유인석, 2006: 154)
즉 중국이 오랑캐 만주족에게 더럽혀진 지 2백여 년이 흘렀고, “우리나
라만이 홀로 중화의 옛 전장(典章)을 보존하여, 의관과 예·악이 거의 삼대
의 풍속이 있”다는 강한 자의식에서 성장한 것이다(장현근, 2003: 40).21)
유인석은 명의 멸망 이후 중화의 맥을 송시열이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였
다. 즉 “우암은 북방의 침입으로 명이 망하던 날에 대의를 바로 잡았다”고
하여, 송시열의 학맥을 도통(道統)의 계승자로 규정하는 소중화관에 기초
한 것이다(윤대식, 2002: 76).
4. 맺음말
21) “중국인이 자신들의 우월의식을 보다 넓은 세계로 뻗치려는 적극적 사유가
대중화주의라면, 중화의 그물망 안에 있으면서 자신이야말로 중화의 본질의
식을 갖추고 있다는 소극적 사유가 소중화주의이다. 대중화주의에 함몰되어
알아서 기어들어 갔다면 사대주의이지만, 자신의 독자성을 표방한 것이라면
소중화주의는 사대주의와 무관하다”(장현근, 2003: 40).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은, 친일개화-수구보수라는 기존 구도를 비판하고,
일본제국주의에 협력자와 저항자에 대해 친일보수주의-유교근본주의로 보
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전형적인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 이완용과 전국적
항일 지도자였던 유인석의 사고를 다음과 비교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자 하였다.
우선, 이완용의 가치관은 실리주의적이며 유인석의 가치관은 규범 지향
적이다. 이완용은 뚜렷한 원칙을 신봉하지 않았고 만일 원칙이 있다면 때
에 따라 변신하여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평
하면서 친미, 친러, 친일로 간 것에 대해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으며 이렇게 변화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반면 유인석은 조선이 제국주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합하여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내용에 반대
하였으며, 살고 죽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리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고 주장하고 있다. 금수가 되어 살아가느니 인간인 상태로 죽는 것이 낫다
는 것이다.
또한, 이완용과 유인석은 국제질서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달랐다. 우선 이
완용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국제 현실에 순응하여 대세에 따를 것을 주
장하면서 그것이 동양평화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을사늑약에 대해
서도, 한국의 외교 때문에 더 이상 동양평화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 이번
요구를 제기한 것이라고 하면서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한일합병은 당시에 있어 역사적 자연의
운명과 세계적인 대세와도 순리하고, 동양평화를 확보하는 것은 조선민족
의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유인석의 국제질서관은 소중화론이다. 그 논리에 따르면 화문화를 조선
이 완성하였으며 중국은 청의 지배와 더불어 단절되었다. 이렇게 볼 때 유
담론201 9(2) 이 나 미 31
인석의 위정척사는 중국이란 나라를 숭배한 것이 아니라 화 즉 지선지극
한 가치를 숭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리적으로 환경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던 중국이 요·순 등의 제왕과 성현에 힘입어 좋은 문화를
계승하여 훌륭한 중화문화의 맥을 이어 온 것”이며 “조선도 단군과 기자에
의해 일찌기 화문화의 기틀을 열었고 성왕과 선정이 이를 계승하다가 중
국은 청에 의해 멸망하고 우리만 남았다는 것”(유한철, 1992: 35-6)이
다. 이러한 그의 사고는 근본주의라고 하는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을 제2의 성지로 본 것이므로 반드시 사대주의라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완용과 유인석의 경우 친일과 반일로 나뉘
게 되는 이유는 그 둘의 사고가 각각 근대적, 전근대적 또는 현실적, 비현
실적인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계관, 인생관, 대외인식에서 있어 각각
보수주의자와 근본주의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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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의 논리
- Abstract -
The Logic of Collaboration and Resistance
Toward Japanese Imperialism
- focusing on Lee Wan-young and Yoo In-suk -
Lee, Nami*22)
This article is to review previous studies on ideologies of
pro-Japanese reformists and reactionary conservatives in Korean history.
They could be renamed more correctly as those of pro-Japanese
conservatives and Confucian fundamentalists, who were collaborators of
and resistants against Japan respectively. Conservatives attach importance
to the practical rather than the normative. They think inequality and keen
competitions in the world are natural. On the contrary, fundamentalists
are normative and religious. They respect saints and sacred places and
books, for which they are not afraid of dying.
When we compare thoughts of typical pro-Japanese person Lee
Wan-yong and national anti-Japanese leader Yoo In-suk, such differences
between conservatives and fundamentalists are distinguished. Lee was
practical and Yoo was normative. Lee did not believe in any moral or
religious principle but believed that if somebody want to survive he
* The Hankyoreh Foundation for Reunification and Culture / Political Science
담론201 9(2) 이 나 미 35
should continuously change himself as time passes. On the contrary, Yoo
attached importance not to one's survival or death, but to keeping faith
with one's belief. He insisted that it was better to die as a person than to
live as an animal.
In addition, Lee argued that if we wanted to keep peace in the
Eastern world we should adapted ourselves to international reality, that is,
the law of the jungle and survival of the fittest. It is clearly conservatives'
idea. However, Yoo thought traditionally that the center of the
international order had been China and Korea was 'little China.' His
thought could be criticized as flunkeyism but he thought China came to
lose its role as a center and Korea became the center. In addition, because
his idea was religious, it can be interpreted as fundamentalism, not
conservatism.
Key Word : Japanese Imperialism, Pro-Japan, Anti-Japan,
Lee Wan-yong, Yoo In-suk, Conservatism,
Fundamentalism
저자 이나미는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관심분야는 한국근현대 정치사상이다. 최근주요논
문으로는 “정치주체의 변동과 국민 형성.”『한국정치연구』(2005), “한국의 보수단체의 이념적 분화.”『시민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