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2. 14.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임명되자 호남 예술인 106명이 반대 성명을 냈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인 그가 국현 관장까지 겸임하면 비엔날레 성공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특정인 내정설'도 불거졌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이념이나 경향도 벗어나겠다"고 했다. 훗날 사석에서 만나자 "(다른 걸 떠나서) 러시아의 인상파 소장품들이 국제시장에 쏟아져 나왔을 때 사두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 정통부 '장관'을 지낸 배순훈이 2008년 '실장'급인 국현 관장에 응모하자 큰 화제가 됐다. 아내가 서양화가이고, 아들도 설치미술가다. 본인은 서울대 공대를 나와 MIT 학위를 받은 뒤 카이스트 교수를 거쳐 대우전자 사장을 지냈다. 과학도이자 CEO였던 그가 미술관장으로 낙점되자 "문화부 장관과 함께 광고에 출연했던 인연 아니겠느냐"는 뒷담화가 있었으나 기대가 더 컸다.
▶ 한 찻집에서 배순훈은 기무사 터를 국현 서울관으로 만들고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열정을 말했다. 그러나 임기를 넉 달 앞두고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의원과 설전을 벌이더니 갑자기 사퇴했다. 작년에 세상 뜬 김윤수 전 민예총 이사장이 배순훈의 전임자다. '민중미술의 대표 이론가'였던 김 관장도 MB 정부 들어 임기를 열 달 남기고 교체됐다. 뒤에 그는 해임 무효 소송을 내 이겼다.
▶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름부터 그렇듯 미국의 모마(MoMA)를 지향하는 한국 대표 미술관이다. 그런데 관장 임명하는 것을 보면 전(前) 근대도 이런 전 근대가 없다. 국현 관장에 응모했다 배제된 이용우씨가 그제 가슴 맺힌 말을 쏟아냈다. "정치적 암수에 당했다" "불공정으로 얼룩졌다" "10여 명 응모자를 농락했다"고 했다. 이씨는 중국에서 미술관장을 지냈고, 이번 공모에서 '우수' 등급을 받아 유일하게 역량 평가를 통과했다. 그런데 문체부가 낙제점을 받았던 민중미술 평론가 윤범모씨에게 재평가 기회까지 줘가며 임명을 강행하자 이씨는 참지 않았다. 이씨는 "(정부의) 방식이 졸렬하다"고 했다.
▶ 운동권 미술도 현대미술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주류가 될 수는 없다. 현대미술을 제대로 본 적도 없을 사람들이 권력의 힘으로 미술관장까지 좌지우지한다. 세계의 미술은 현기증이 날 정도의 속도로 변화하고 폭을 넓혀가고 있다. 미술과 공학이 결합돼 관람객을 우주로 초대하는 놀라운 작품도 보았다. 그런 시대에 한국에선 40년 전 운동권 미술이 '탈외세'를 외치며 득세하고 있다.
김광일 논설위원 kikim@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