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어느 날 꿈을 꾼다. 험준한 봉우리가 있는 깊은 골짜기에서 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를 따라 가보니 사방에서 복사꽃 향기가 나는 마을에 다다른다. 그곳은 이상적인 낙원, 무릉도원이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풍경을 잊지 못해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한국 산수화의 명작 <몽유도원도>는 그렇게 탄생됐다.
영월을 지나 평창터널을 빠져나오면 험한 강원도 지형과 조금은 다른 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뾰족하게 솟은 산은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산에는 우람한 고목들이 기세 좋게 하늘로 뻗어있다. 마을 앞에는 고랭지 배추밭이 마치 녹색 파도처럼 일렁인다. 골짜기마다 훼손되지 않은 동강의 물줄기가 감싸고 있는 이 마을은 바로 평창군 미탄면이다.
어느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마을의 풍광은 복사꽃 향기가 가득한 <몽유도원도>와도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미탄면은 고려시대에는 '맛 미' 자를 쓴 미탄 (味呑)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에는 군량미 저장 창고가 있어 쌀을 뜻하는 미창(米倉)이 됐다.
그리고 1910년대에 '아름다운 여울'이라는 뜻의 미탄(美灘)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다.
북쪽으로는 1,256m의 청옥산줄기가, 동쪽으로는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높고 꼬불거린다는 '비행기재'와 성마령이, 서쪽으로는 멧둔재 길이 남쪽으로는 수갈령을 연결하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거대한 산줄기가 미탄면을 둘레로 얼키고 설켜 있는 셈이다.
그래서 미탄면 어느 곳에 서있어도 청청한 수목참천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과연 ‘아름다운 여울’이라는 마을 이름이 허명(虛名)이 아니다.
청옥산 육백마지기에서 별을 마주하다
구름과 차담(茶啖)을 나누는 곳
청옥산은 미탄면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요즘 같은 '언텍트 여행'시대에 청옥산은 최근 '차박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청옥산 전망대 육백마지기
그래서일까, 아침 일찍 서둘렀는데도 청옥산 정상 전망대인 육백마지기로 향하는 차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미탄면을 생태여행지로 보존하는 사업을 추진 중인 김정하 위원장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육백마지기에도 이제 방문인원을 제한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미탄면의 청정 자연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마을 이름만큼이나 아름답다.
육백마지기 오르는길
전망대까지는 아스팔트 도로로 이어져있지만 산길이다 보니 아찔할 정도로 경사가 높다.
하지만 왼편으로는 첩첩한 산들이 연봉을 이루고 오른쪽으로는 곧게 뻗은 전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쉴새 없이 풍경을 바꾸고 있어 무서울 새도 없이 전망대에 다다른다.
어느새 구름은 내 발밑에 펼쳐져있고, 야생화가 지천에 널려있다.
한 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는 절경이다.
전망대에 도착하자 구름 속을 뚫고 풍력기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풍력발전기는 평균 초속 4m이상의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그만큼 청옥산에는 바람 또한 넘쳐난다. 쌀쌀해진 기온 탓에 가방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불과 20여분 사이에 계절이 성큼 바뀐 것이다.
그래서 육백마지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랭지 채소농사가 시작됐다.
대관령 채소밭보다 400m나 더 높아 여름에도 서늘하고 모기떼도 찾아볼 수 없다.
옛날 화전민들은 거친 청옥산을 개간하며 살았다. 육백 마지기는 볍씨 육백 말을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평지라 산나물을 채취하기에 좋았다. 하지만 육백 마지기에는 그보다 여행자들을 들뜨게 하는 낭만이 있다.
'육백'은 금성(샛별)의 옛 이름이다.
'마지기'는 '맞이하다'가 구개음화 된 것으로 즉, 금성을 맞이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금성은 그리스 신화에서는 '비너스'로 불리고, 석가모니는 빛나는 금성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초저녁에 태양과 함께 기울고, 새벽에 태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별이다.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꽃을 볼 수 있는 별꽃마루 육백마지기는 그래서 한번 온 여행자들은 기어이 다시 오고야 만다.
구름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바람과 친구가 되며, 쏟아지는 별을 베고 잠드는 육백마지기의 하루는 아름다운 여울, 미탄의 선물이다.
청정 무공해 마을
동강의 속살을 느끼다
70년대 풍 여관과 작은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내를 조금 벗어나면 어름치 마을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문희 마을이지만 천연기념물 259호인 어름치가 나올 정도로 깨끗하다 해서 더 유명해진 이름이다.
특히 어름치는 스스로 돌탑을 만들어 그 안에 산란을 하는 신기한 어종인데, 5월에는 산란탑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최근에는 캠핑장과 숙박시설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동강의 속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2백리 동강 길 중 물빛이 아름답고 강바닥이 훤히 보일정도로 깨끗함을 자랑하는 청정무공해 지역이다.
문희마을
겨울철에는 기온이 많이 내려가도 물이 얼지 않고 솟아 오르는 용천수와 동강일대에 서식하는 호사비오리나 청둥오리 등 각종 철새들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룬다.
문희마을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가 두 개 있다.
먼저 백운산 칠족령 탐방로(1.6km)로 전망대에 오르면 파노라마로 둘러싸인 절벽과 그 사이를 굽이치는 동강의 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한 곳은 5억년 전 생성된 백룡동굴이다.
1976년 한 동네청년이 발견하기 전까지 거의 묻혀있었기에 태고적 신비가 고이 간직된 곳이다.
1979년 천연기념물 260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1,200m의 거대한 백룡동굴은 기이한 형태의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을 볼 수 있다. 조명도 없이 어떤 곳은 포복자세로 기어서 봐야 해서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백룡동굴을 국내 유일의 탐험동굴이라 부른다.
백령동굴 가는길에 보이는 돌탑
평창아라리의 본고장
아쉬운 마음으로 미탄을 떠나려는데 평창아라리 전수관에서 구성진 아라리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리 고개는 열두 고개인데
나 넘어갈 고개는 한 고개밖에 없구나
아라리 고개는 왠 고개가 많은지
고개를 넘다보니 다 늙어졌네!
미탄면은 평창 아라리의 본 고장이다. 처연하고 서글픈 가사와 달리 흥겹고 박진감 넘치는 박자가 평창 아라리의 특징이다. 슬픔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우리 조상들의 초연함이 돋보이는 노래가락이 또 다시 나를 붙잡는구나!
<언제 누구와 와도 좋을 미탄면 여행코스>
▪ 옛길을 걷는 낭만 코스, 멧둔재
1991년 멧둔재 터널이 생기기 전까지는 평창읍에서 미탄면까지 멧둔재(680m)라는 고개를 넘어야 했다.
40여분이 걸리던 거리를 10분이면 갈 수 있게 된 셈이다.
멧둔재는 오래 전 우마차를 몰고 읍내로 가던 길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가 만들어졌고, 70~80년대에는 정선까지 버스도 다니게 됐다.
터널이 뚫린 이후 방치되었던 이 길이 최근 '명품 옛길'로 다시 태어난다. 수십 년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드물다보니 소나무와 잡목림 등 수목이 울창해 생태가 잘 복원되어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창리 영춘가든 뒤편 길을 출발하면 8km의 멧둔재 길이 노론리까지 이어진다.
비포장 길을 한시간 쯤 가다보면 산중마을 도마치 마을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몇 가구가 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주민이 없는 무인마을이 됐다. 마을을 지나 고갯마루에 도착하면 삼방산 등산로 안내표시가 나온다. 삼방산은 오지에 위치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아 고즈넉한 산행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멧둔재 옛길은 천천히 걸어간다 해도 3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울창한 수목림 사이에서 옛스러운 길이 주는 몽환적이고 평온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도보 여행 코스다.
멧둔재옛길의 출발점
▪ 수변공원을 중심으로 마을 자체가 산책길
미탄면은 어느 위치에서도 멋드러진 풍경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른 새벽산 중턱에 걸려있는 옅은 구름 조각을 보고 있으면 자연이 주는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수목이 울창한 산중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는 미탄면을 그래서 '생태 농촌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마을 중심가에서 차로 5분여를 가면 연꽃공원이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일골 걸음을 걸었고 걸을 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하여 신성시한다.
또한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 나지만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기에 꽃 중의 군자 '화중군자'로 불린다.
자연스레 경외감이 들게 되는 연꽃밭은 특히 백색, 홍색의 화려한 꽃이 피는 7~8월이 절정이다.
미탄면은 동네 자체가 자연 산책 코스다.
10여분이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동네에는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여관부터 방앗간, 구멍가게들로 잠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다. 보리밥집에서 저렴하지만 든든하게 한 끼를 채우고 시내에 딱 하나 있는 카페로 향한다. 마카모예라는 독특한 이름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까지 마신다면 시골마을의 오밀조밀한 정을 단번에 느껴볼 것이다.
청정 산책코스
▪ 동강 송어의 진미를 맛보다
평창을 대표하는 음식은 뭐니뭐니 해도 송어다.
송어는 연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동해안에 많이 분포한다. 1802년에 출판된 어류학 전문지 <난호어목지>에는 연어와 비슷하나 더 살이 찌고 맛있으며 살의 빛깔이 붉고 선명하여 소나무 마디와 같아 이름을 송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나라의 송어는 산란기에 무지개색을 띄어 무지개송어라고 부르며 깨끗한 수질에서 자라 청정 물고기로 유명하다. 특히 칼슘과 철분이 풍부해 골다공증, 동맥경화 등 각종 성인병을 예방한다.
동강의 속살을 그대로 간직한 미탄면에서는 동강 송어의 진미를 만날 수 있다. 시내 곳곳에 송어식당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름치 마을 등에서는 직접 맨손으로 송어를 잡아보고 구워먹을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되어 있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마을을 통과하는 동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