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2-6 2 회구懷舊 옛을 생각한다 6 망운사인望雲思人 대인작代人作
구름 바라보고 사람을 생각하다 남의 대신 짓다
제지서운齊之書云 제齊나라의 글에 이르기를
차시제운此詩題云 이 시 제목에서 말한
망운자望雲者 '구름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차적량공지의此狄梁公之意 그것이 적량공狄梁公의 뜻이었는데
이망지자而望之者 낭자야娘子也 바라보는 것은 색시[娘子]였다.”고 하였다.
본운운本韵云 본 詩에서 일렀다.
방초계교립마시芳草溪橋立馬時 방초 우거진 시냇가, 다리에 말[馬]을 세울 때
나감회수백운사那堪回首白雲思 머리 돌려 흰구름 생각하기에 어찌 견디겠는가?
심원수로람광벽深源樹老嵐光碧 깊은 언덕에는 나무 늙어 아지랭이 빛 푸른데,
감악연수만색기紺岳煙收晚色奇 검푸른 뫼 연기 거두니 저녁 빛이 기이하다.
산하인가의록죽山下人家倚綠竹 산 아래의 人家는 푸른 대[綠竹]에 의지했는데,
수변어점양청기水邊漁店颺青旗 물가의 고기 잡는 집엔 푸른 기가 펄럭인다.
춘풍무한강남사春風無限江南思 봄바람에 무한한 江南을 생각하니,
북망유유독영시北望悠悠獨咏詩 북쪽을 바라보며 유유하게 홀로 시만 읊었노라.
►적량공狄梁公 당나라의 정승 적인걸狄仁傑.
►운 운韵 운韻(한자의 음절에서 聲母를 제외한 부분) 운치韻致. 정취情趣
►남광嵐光 산기山氣가 발하여 빛을 냄.
‘남기 람(남)嵐’ 남기嵐氣(산속에 생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 산바람
►양청颺青 푸르스름하다
‘날릴 양颺’ (바람에)날리다, 날다. 일다. 버리다
►유유悠悠 아득하게 먼 模樣. 때가 오랜 模樣. 沈着하고 餘裕가 있는 模樣.
북망백운다소시北望白雲多少時 북쪽으로 백운 바라보길 얼마간이었던가?
개중정서불감사箇中情緒不堪思 그 중의 정서는 생각할 수 없구나.
람수감악천중벽嵐收紺岳千重碧 아지랭이 걷힌 감악紺岳은 겹겹이 푸르렀고
천정징파일색기天淨澄波一色奇 하늘이 맑고 물결 맑으니 一色으로 기이하다.
미주천종증해진美酒千鍾曾解陣 좋은 술 천 잔에 일찍 진陣을 풀었으나
수마백만미강기愁魔百萬未降旗 근심의 마귀 백만이나 항복 旗를 들지 않네.
춘화추월무궁한春花秋月無窮恨 봄에는 꽃, 가을엔 달, 무궁한 恨이
령아최성기수시令我催成幾首詩 나를 재촉하여 몇 수 시를 이루게 하였네.
춘풍우로척인시春風雨露惕人時 봄바람에 비와 이슬 내려 사람 슬프게 하는 때
차한여하개물사此恨如何盖勿思 이 恨을 어떡하나 덮어 두고 생각 말 일.
삭북견성제원고朔北鵑聲啼怨苦 북쪽의 두견이 소리는 원통하고 괴로운 울음소리
한양류색투선기漢陽柳色鬪鮮奇 한양의 버들 빛은 신선함과 기이함을 다투네.
심맹적적명여일深盟的的明如日 깊은 맹세 분명하여 저 해와 같은데
장한요요탕사기長恨搖搖蕩似旗 긴 恨은 흔들흔들 일렁이어 기旗와 같네.
존모재당무양불尊姥在堂無恙不 늙은 노부인 堂에 계셔 병이나 없으신지?
리화야우득신시梨花夜雨得新詩 배꽃에 밤비 내려 新詩를 얻었네.
동산추월정원시東山秋月正圓時 동녘 산에 가을 달이 바로 둥근 때에
조진다정량지사照盡多情兩地思 두 곳의 다정한 마음 한껏 비춰 주네
반야한장성일울半夜寒螿聲壹鬱 밤중의 찬바람에 벌레 소리 답답한데
중정고수영리기中庭枯樹影離奇 중정中庭의 마른 나무 그림자가 기이하네.
이봉도순강수진已逢刀楯降愁陣 이미 칼과 방패 만나 근심의 陣이 항복하니
가득당로게주기可得當壚揭酒旗 봉당에 나와 앉아서 술 깃발을 날릴 수 있으리.
지활천장음신조地闊天長音信阻 땅 넓고 하늘 길어 말과 소식 막혔는데
오동엽상자제시梧桐葉上自題詩 오동 잎새 위에다 내 스스로 시를 쓰네.
►감악紺岳 경기도 파주시, 양주시, 연천군 사이에 있는 산.
►진陣 근심을 쫓으려고 술로 군대를 조직하여 진陣을 쳤다는 말이다.
►적적的的
►요요搖搖
●적인걸狄仁傑(630-700)
1) 관료 집안 출신
적인걸은 병주並州 태원太原(산시山西성 타이위안) 사람으로 자는 회영懷英이다.
그의 조부 적효서狄孝緖는 정관貞觀 연간에 상서좌승尙書左丞을
부친 적지손狄知遜은 기주夔州(쓰촨성 펑졔奉節현) 장사長史를 지냈다.
2) 지혜로운 대리승
의풍儀風 원년(676년) 초 적인걸은 대리승大理丞이 되었다.
대리승이란 지금의 대법원 대법관과 비슷한 관직으로서
중요한 안건을 심리하여 판결을 내리는 관리이다.
적인걸이 임명 후에 살펴보니 복잡한 안건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는 1년 안에 1만7천여 건의 안건을 처리했는데 매 안건마다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여 단 한 번의 불만도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당 고종이 소릉의 오동나무를 벤 관리자 두 명을 사형시키려 하자
적인걸이 한 문제가 형벌을 없애고 선정을 베풀었던 일을 거론하며
그들을 변호하여 두 명을 살리고도 당 고종의 위엄을 해치지 않았다.
이에 당 고종은 적인걸을 시어사로 승격시켰다.
수공垂拱 2년(686년) 적인걸은 영주宁州(간쑤甘肅성 닝宁현)자사가 되어
이민족 문제를 처리했는데 영주 백성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감찰어사가 적인걸을 조정에 추천해서 동관시랑冬官侍郎이 되었다.
또한 수공 4년(688년)에는 강남순무사江南巡抚使가 되어 여러 문제를 처리했으며
이에 복주复州(후베이湖北성 면양沔陽)자사,
낙주洛州(허난河南성 뤄양시 지역)사마 등의 직책을 맡으며 승진했다.
3)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어 재상에 오르다
무측천(624?-705 재위 690-705)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잔혹하게 제거했지만
재능이 출중한 인재들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파격적으로 임용했다.
그래서 주변에 재능이 비범한 대신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재상 적인걸狄仁杰이다.
천수天授 2년(691년) 측천무후는 적인걸에게
“여남汝南(허난河南성 루난현)에 있을 때 그대의 정치적 성과가 출중했는데
외지에 있을 때 그대를 모함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줄까?”하고 물었다.
이에 적인걸은
“폐하가 생각하시기에 제가 틀린 것이 있다면 고치면 될 것입니다.
폐하가 생각하시기에 제가 틀린 것이 없다면 그것은 저의 행운입니다.
저는 저를 중상한 사람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가 친구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크게 탄복하였다.
무후의 신임을 얻고 적인걸은 결국 ‘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재상이 되었다.
692년에 적인걸은 혹리酷吏(악하고 잔혹한 관리)
내준신來俊臣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고 말았다.
적인걸은 역모를 꾀했다고 자인했는데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살아남아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내준신은 공모한 다른 대신들의 이름을 대라고 강요했다.
격노한 적인걸은 머리를 기둥에 처박으며 자살하겠다고 내준신을 위협했다.
이에 내준신은 더 이상 적인걸을 심문하지 못했다.
나중에 적인걸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남몰래 고소장을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아들은 급히 그 고소장을 무측천에게 올렸다.
고소장을 본 무측천은 즉시 적인걸을 불러 무엇 때문에 역모를 꾀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적인걸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신은 절대로 역모를 꾀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역모를 승인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죽어 귀신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폐하를 뵙고 신원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무측천은 그러면 ‘사죄표謝罪表’는 왜 썼느냐고 물었다.
적인걸은 내준신의 모함일 뿐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무측천은 그제야 내준신이 적인걸을 해치려고 모함했음을 알게 되었다.
후에 적인걸은 다시 재상으로 복직되었다.
당시 무측천은 이씨 자손(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을지
아니면 본가집인 무씨 자손(자신의 조카)을 태자로 삼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무측천의 본가집 조카인 무승사武承嗣, 무삼사武三思 등은
태자가 되기 위해 암암리에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신들로 하여금 무씨 자손을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무측천에게 여러 번 간하게 했다.
자고로 황제가 성이 다른 사람을 태자로 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지금의 신성황제 무측천이 무씨이니
마땅히 무씨를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적인걸은 무측천이 용단을 내리지 못하자
이씨 성을 가진 아들을 태자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고모와 조카가 더 가까운지 어머니와 아들이 더 가까운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 아들을 태자로 삼으시면 그 후손들은 천추만대 내려가면서
길이길이 폐하를 太廟에 모시고 제사를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친정 조카를 태자로 삼으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태묘에 고모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법은 자고로 없지 않습니까?”
태묘란 황실에서 역대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곳이다.
적인걸의 이 말에 무측천은 친정 조카를 태자로 삼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자기 아들을 태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4) ‘국로’라고 불리다
적인걸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현명한 인재들을 많이 추천했는데
경휘, 두회정, 요숭 등 모두 관직이 公卿에 이르렀고 어떤 이는 재상까지 되었다.
그는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임용하여 각자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했는데 투항해 넘어온 소수민족 장수들도 가리지 않았다.
당나라군을 여러 번 대패시키고 장수들을 적지 않게 죽였던
거란의 장수 이해고李楷固와 낙무정駱務整이 나중에 당나라로 투항해왔을 때
대신들은 그들을 죽여야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무측천은 적인걸의 의견에 따라
그들을 죽이지 않고 변경을 지키게 함으로써 당나라 북쪽 변경이 평화로웠다.
구시久视 원년(700년) 적인걸이 만년에 이르자
무측천은 그의 이름 대신 존경의 의미를 담은 ‘國老’라고 칭했다.
적인걸이 재차 퇴임하기를 원했을 때 이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대신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게 하고 저녁에 궁중에서 근무를 서는 것을 면제해 주었다.
하지만 이해 9월 적인걸은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무측천은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사흘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고 그를 梁國公으로 추봉했다.
5) 관련 일화
적인걸은 평소 글 읽기를 무척 즐겼다.
어느 날 현의 관리가 안건을 조사하러 마을에 왔는데
주변 사람들이 앞다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느라
어수선한 가운데 적인걸만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관리가 적인걸을 나무라자 그는 자기는 지금 책 속에 있는 성현들과 말하고 있으므로
평범한 속인들과는 말할 겨를이 없다고 오히려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적인걸이 어려서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6) 관련 유적
적인걸의 묘가 낙양洛陽(허난河南성 뤄양시) 白马寺내의 동측 편에 위치해 있으며
묘비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대당명상적공인걸지묘大唐名相狄公仁杰之墓 대당명재상 적인걸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