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박씨 三十三世 瀾 삼십삼세 란
70세손 개산팔경 박 희 용
麗朝遼東督捕使 墓所配位失傳 云崔承老之壻 從祀于武安景德壇西
謹按新羅世系明載於明衛擧章譜而 且麗初世系參錄於擧章譜而 世遠人亡其傳或泯而 况累經兵火傳者幾稀 故上下五百餘年間 修其新舊譜而只書十王世系疑闕二十四世故也 每以是恨之間嘗謹閱傳來珍藏則一有擧章譜是乃
始祖王卽位五十一年甲寅秋九月 與開國功臣二十八人設擧章殿萬福宴古事而王之六世孫諱正是大君重修聯系而高麗惠宗聞賜后孫肅受而月沙李先生家藏考訂者也 上下數千載世系諱啣爵位生卒配墓昭然可考乃 月沙先生以道學文章籍一國而至於名聞中華 况其傳獵乘史歷典天官宜其片言隻字之俱有可據而 尤於吾朴無徵之文 得此珍貺其私心興感尤當何如哉 又有先生所序文而遺漏云是爲可恨 又按高麗惠宗太祖之子敬順王伯父億廉之外孫也 其於新羅朴金世系別有所感而修傳后孫云 年譜及外裔考訂於月城金氏譜牒及月城諸家譜牒則昭然如是 重修所傳以竢後之博採
려조요동독포사 묘소배위실전 운최승로지서 종사우무안경덕단서
근안신라세계명재어명위거장보이 차려초세계참록어거장보이 세원인망기전혹민이 황루경병화전자기희 고상하오백여년간 수기신구보이지서십왕세계의궐이십사세야 매이시한지간상근열전래진장즉일유거장보시내
시조왕즉위오십일년갑인추구월 여개국공신이십팔인설거장전만복연고사이 왕지육세손휘정시대군중수연계이고려혜종문사후손숙수이월사이선생가장고정자야 상하수천재세계휘함작위생졸배묘소연가고내 월사선생이도학문장적일국이지어명문중화 황기전엽승사역전천관의기편언척자지구유가거이 우어오박무징지문 득차진황기사심흥감우당하여재 우유선생소서문이유루운시위가한 우안고려혜종태조지자경순왕백부억렴지외손야 기어신라박김세계별유소감이수전후손운 연보급외예고정어월성김씨보첩급월성제가보첩즉소연여시 중수소전이사후지박채
고려조에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를 지내셨다. 배위와 묘소가 실전이다. 일설에는 최승로의 사위라 한다. 제사는 무안 경덕단(景德壇) 밀성대군 신위 서(西)편에 모신다.
삼가 살펴보니, 신라 세계는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에 명백히 실려있다. 또 고려 초의 세계도 거장보에는 함께 들어있으나 세대가 멀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전하여지는 것이 혹 빠지기도 했다. 더구나 병화가 자주 있어서 전하는 것이 거의 없음이 상하 500여 년간 신보와 구보를(新·舊譜) 고쳤으나 단지 10왕의 세계(王系)뿐이고, 24 세대(世代)는 미심쩍어 빠지고 비게 된 연유이다.
이리하여 매번 한스럽던 차에 일찌기 삼가 살펴보니 변하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되어 온 것이 하나 있으니 곧 거장보(擧章譜)이다. 이 책은 시조왕 즉위 51년 갑인(기원전 7년) 가을 9월 개국공신 28인과 함께 거장전 만복연을 열었던 옛일을 왕의 6세손인 휘 정시(正是)대군이 손질하여 고친 것으로서, 고려 혜종이 이를 듣고 책을 하사한 것을 후손이 삼가 받았고,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선생이 자기 집안에 간직해오던 책이라고 고정하였다.
상하 수천 년 세계를 이어오면서 휘함(諱啣), 작위(爵位), 생졸(生卒), 배위(配位), 묘소(墓所)를 매우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었던 것은, 도학과 문장이 한 나라의 으뜸이고 명성이 중국에까지 이른 월사(月沙) 선생 덕분이다. 하물며 선생은 사승(史乘:역사책), 역전(歷典), 천관(天官:천문)과 같이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어 한두 마디의 짧은 말과 글에도 모두 근거를 갖추고 있다. 더욱이 우리 박씨는 조상의 내력을 증거할 만한 글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런 문서를 얻으니, 이러한 보배를 하늘이 주는 데에야 그 사심(私心)과 흥감(興感)이야 어찌 다하지 않으랴. 또 선생의 서문(序文)에서 누락된 것이 있다고 이르니, 조상의 흔적을 다 찾지 못해 한스럽다.
또 살펴보니 고려 혜종은 태조(太祖)의 아들이요, 경순왕의 백부인 억렴(億廉)의 외손이다. 박(朴) 김(金) 세계(世系)에 각별한 마음이 있어 손질하여 후손에게 전한다 일렀다. 연보(年譜)는 외예(外裔 혜종)가 월성김씨보(月城金氏譜) 및 월성제가보(月城諸家譜)에서 고증(攷証)하였으니 매우 분명하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손질하여 전하니, 후손들이 널리 캐고 가려내고 다듬어서 더 좋은 보첩이 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보유] 遼東督捕使壇碑陰記
公諱瀾姓朴氏密城大君諱彦忱之後三韓壁控都大將軍諱郁之胤子也仕高麗官至遼東督捕使按麗史成宗顯宗之世屢興大師經畧遼地公所以督捕於遼者或在其時歟世代遙遠史乘失傳無從而徵述衣履之藏亦未詳其地後裔千億而尙闕歲一祭儀者寔有欠於追遠之道謹因密城大君祭壇之成以大將軍公奉配於東公則配於西一壇三祖異卓同祭情禮兩安神人無憾壇之制方而平東西三十尺南北十五尺坐乾而面巽是役也總其綱而主管者後孫弘文館侍讀海徹也贊其謀而先後之者左錄諸人左錄諸人見於本碑故今不煩記也 后孫幼學炳穆謹撰 孫承訓郎顯陵參奉海麟謹書
공휘란성박씨밀성대군휘언침지후삼한벽공도대장군휘욱지윤자야사고려관지요동독포사안려사성종현종지세루흥대사경략요지공소이독포어요자혹재기시여세대요원사승실전무종이징술의리지장역미상기지후예천억이상궐세일제의자식유흠어추원지도근인밀성대군제단지성이대장군공봉배어동공즉배어서일단삼조이탁동제정례이안신인무감단지제방이평동서삼십척남북십오척좌건이면손시역야총기망이주관자후손홍문관시독해철야찬기모이선후지자좌록제인좌록제인견어본비고금불번기야 후손유학병목근찬 손승훈랑현릉참봉해린근서
요동독포사단비음기
공의 휘는 란(瀾)이오 성은 박씨니 밀성대군 휘 언침의 후요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郁)의 큰아들이다. 고려에 벼슬하여 관작이 요동독포사에 이르렀다.
고려사를 고찰하건데, 성종과 현종의 세대에 여러 차례 큰 군사를 일으켜 요동지방을 경략한 바 있는바, 공이 요동독포사 됨이 혹 그때이던가 하나, 세대 멀고 실전되어 족히 징술할 바 없고, 묘소 자리도 또한 전해오지 못하여 자손이 아무리 많아도 지금껏 해마다 제사 한 번 지내는 의식도 못 했으니 이는 추원의 도리에 흠이 되었다.
이제 삼가 밀성대군의 제단이 낙성됨에 삼한대장군 공을 받들어 동에 모시고, 독포사 공을 서에 모시어, 한 단에 세 분을 탁자만 달리하여 같이 제를 지내니 후손들의 정과 예의와 함께 조상들도 편안하여 신과 후손들이 유감이 없다.
단의 제도는 모나고 평하여 동서가 30척이요 남북이 15척으로 건좌 손향이다. 이 역사에 총책임한 이는 후손 홍문관 시독 해철이다.
후손 유학 병목 근찬 후손 승훈랑 현릉 참봉 해린 삼가 쓰다.
[팔경첨언]
당사자인 33世 朴란(瀾)에 대한 기사는 한 줄이고, 여타 글은 모두 신라 시대의 10王을 제외한 24世 조상들의 흔적을 전혀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월사 이정귀 선생의 집안에 가장되어 오는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를 발견하여 조상들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는 기사이다.
월사 선생이 1564년에서 1635년 사이를 산 분이니, 『밀양박씨세보』 草本이 1600년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된다. 월사 선생은 당대의 문장가로 장유와 친교가 깊었다. 장유는 규정공 후 충정공 박숭원의 외손자이다. 그러니 월사와 친교하며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를 읽었을 것이다. 필자의 14대조이신 충정공 박숭원의 종형인 낙촌공 박충원의 증손자가 광해조 때 영의정 박승종이다. 1600년대 초에 낙촌공파와 충정공파가 번성하면서 밀양박씨 각 문중 전체에 걸쳐 족보 편찬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1741년 신유보와 1744년 갑자보가 발간되었다.
신라 시대 24世 조상들의 흔적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신라 말 고려 초기에 활동한 조상들의 모습 등 더 자세한 내용은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와 『고려사』 등의 문헌을 살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위의 기사를 보면, 『밀양박씨세보』를 위시한 8대군파의 족보들은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가 발견된 후에 각 대군 문중 대표들이 모여 일괄적으로 上系인 신라시대의 世代와 紀事를 정리한 것 같다. 그래서 시조왕부터 경명왕까지의 序文과 각 世代의 紀事가 동일하다. 또한 밀성대군의 후손 각파 대표들이 모여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의 족보 世代와 紀事를 정리한 것 같다. 고려말 조선초부터는 각 파별로 제대로 된 가첩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밀양박씨세보』는 줄기와 가지의 체계가 비교적 명료하다.
족보 연구에 좋은 소식이 들린다. 성남문화원 부원장인 밀양(밀성)박씨 충헌공파 대제학파 사직공 17세손 박형원 소장이 2019년 4월 26일 국립중앙도서관에 1701년 <신사보> 부터 1902년 <임인보> 까지 족보들과 『신라선원세보원』, 『북보 : 1984년에 조선시대 小北派 28개 성씨 69개 문중을 소개』, 『명위거장보』, 『박씨밀성세가 : 고려 혜종대왕이 전해준 <박씨신라선원세계>를 월사 이정구 선생이 고증』 등 총 125권을 기증하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명위거장보』와 『박씨밀성세가』는 우리 박씨 족보 연구에 매우 귀한 서책이다.
[참고자료 3]에서 보듯이 『명위거장보(明衛擧章譜)』가 1600년대 말에나 지금에나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란(瀾) 할아버지의 기사가 가공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러므로 『명위거장보』와 『박씨밀성세가』의 내용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밀양박씨세보』에 써진 신라 역대 世系가 상당한 진실성을 갖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世系는 문명이 더 발달했기 때문에 더욱 진실할 것이다.
충헌공파 대제학파 사직공 후손 박형원 종친의 문중이 잘 간수한 『명위거장보』와 『박씨밀성세가』가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앞으로 대를 이어 밀양박씨 족보를 연구하는 후손들은 잘 읽고 족보 편집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필자 역시 살아있는 동안에 다른 대군파들의 족보와 다른 박씨들의 족보를 열람하여 『밀양박씨세보』를 꾸준히 보유 및 교정할 것이다.
[참고자료 1] 최승로(崔承老, 927년 ~ 989년 6월 17일(음력 5월 12일))는 고려 문하시중 직책을 지낸 고려 초의 유학자, 문관, 시인,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신라 6두품 출신 최은함(崔殷含)이다. 성종(成宗)에게 시무 28조를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바친 시무 28조는 대부분 수용되어 고려의 정치제도와 지방통치 등 국정 운영의 중요한 기조가 되었다.
[참고자료 2] 이정귀 李廷龜 1564년(명종 19) ~1635년(인조 13)
호 월사(月沙), 호 보만당(保晩堂), 본관은 연안(延安).
병조판서 · 예조판서와 우의정 · 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시문집으로는 『월사집(月沙集)』이 전한다.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 · 이식(李植) · 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됐다. 장유도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칭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했다.
[참고자료 3] 거장전[擧章殿] 만복연[萬福宴]
◈ 거장보 역문[擧章譜譯文]
시조왕 51년 9월에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육부촌장[六部村長]과 개국공신[開國功臣] 28인과 함께 거장전[擧章殿]에서 만복연[萬福宴]을 열은 사실[事實]을 기록하여 전하게 하고 거장보[擧章譜]라 이름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좌명공신 [新羅開國 佐命功臣] 촌장 6인
1. 알천야산촌[謁川楊山村] 이알평[李謁平] 경주 이씨[慶州李氏]
2.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 경주 최씨[慶州崔氏]
3.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손구례[孫俱禮] 경주 손씨[慶州孫氏]
4.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정 지백호[鄭 智伯虎] 경주 정씨[慶州鄭氏]
5.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배지타[裵知타] 경주 배씨[慶州裵氏]
6.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설호진[薛虎珍] 경주 설씨[慶州薛氏]
▶개국공신[開國功臣] 28인
1. 태평대위(太平大位) 백선장(白善長), 도정사(都正事) 조공흠(趙公欽) 평중랑 (平中郞]) 고영시(高寧是) 등 3인은 변한(弁韓)을 항복하게 한 공이 있다.
2. 평장사(平長事) 지충강(池忠江), 대사도(大司徒) 조익관(趙益寬), 대사 도(大司徒) 추자평(秋子平), 대사도(大司徒) 김관령(金寬齡), 도정훈(都正 勳) 임의신(任儀信), 우장군(右將君) 이두창李頭昌), 우장군(右將君) 조대정 (趙大正), 전력부총(展力副摠) 양지백(梁之白) 등 8인은 옥저(沃沮)로 하여 금 말을 헌상케 한 공이 있다.
3. 대사도(大司徒) 강이태(康二太), 국자대의(國子大宜) 임동방(林동芳), 상장군(上將軍) 정선엽(丁善燁) 등 3인은 일본병(日本兵)이 왕의 덕을 듣고 돌아가게 한 공이 있다.
4. 교위대시(校尉大寺) 정지석(鄭之碩), 전력도정(展力都政) 이형익(李衡 翊), 전력장군(展力將軍) 신초시(申初是), 정남장군(征南將軍) 양선태 (梁善泰), 어복야(御僕射) 홍식(洪息), 어복대사(御僕大司) 한영구(韓寧 龜) 등 6인은 고주몽(高朱蒙)을 화친(和親)하게 한 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