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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기독교'
동서 문명의 교차로인 레반트 지역의 서쪽 끄터머리에 위치한 레바논.
이곳은 역사적으로 평화로울 때는 지중해 항구를 가진 무역 루트이지만 동방의 제국과 서방의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딛고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고대의 무역상 페니키아의 활동 무대이었으며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을 거쳐 이슬람 제국이 차지한 땅이다.
로마제국 이후 오랫동안 기독교 문화권이었다가 7세기 이후 줄곧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아온 결과 레바논은 여러 기독교 종파와 이슬람 종파들이 갈등하면서 공존하는 지역이 된다. 레바논인, 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팔레스타인인 등 인종도 다양하고 마론파 기독교, 멜키파 기독교, 그리스 정교회, 수니파 이슬람, 시아파 이슬람, 드루즈파, 유대교 등 여러 종교가 섞여있다.
이런 배경 탓에 레바논 지역을 아우르는 공통된 하나의 정체성이 없다. 그렇다고 전체를 지배하는 세력도 없다. 이처럼 레바논 지역은 단일 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러나 1920년 프랑스가 이 지역을 위임통치하면서 레바논이라는 국가가 불안정하게 형성되기 시작한다.
레바논을 포함한 대시리아 지역은 오랫동안 비잔틴 제국의 영토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종교는 기독교이다. 레바논에는 크게 세 가지 종파의 기독교 인구가 있다. 시리아의 수도사 마론을 따르는 마론파(Maronite Church),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충성하는 멜키파(Melkite Church),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이다.
다수를 차지하는 마론파는 현지 인종인 셈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달가워하지 않던 중 이슬람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몰아내자 이를 크게 반긴다. 다른 종교를 같이 인정해주는 이슬람 제국에서 같이 지내다가 서서히 늘어나는 무슬림들에게 밀려 험준한 고원지대인 마운트 레바논으로 이주한다.
십자군이 진주할 때 협조를 많이 하고 교황도 이들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18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 산하로 편입되어 보호를 받는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이전부터 예수회 선교사도 파견하며 레바논 마론파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비록 아랍인 이슬람에 둘러싸여 있으나 스스로 지중해 기독교 문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마론파는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편이다.
'레바논의 이슬람'
무슬림의 분포를 보면 주류세력인 수니파가 이 지역의 상류층을 이루고 프랑스 통치 기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마론파와 함께 레바논의 경제를 장악한다.
반면 인구가 훨씬 많으면서도 빈민층을 이루는 시아파 무슬림은 레바논에 큰 애착도 없고 독립운동에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에 대한 충성심이 더 크다.
레바논에서 가장 독특한 이슬람 종파는 드루즈파다.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일단의 무리가 레바논 남부 슈프 산맥에 정착한 것이 드루즈파다. 이들은 스스로를 격리시키며 정통적인 이슬람과는 조금 다른 신앙 생활을 한다. 이교도 취급을 받기도 한다.
'프랑스의 위임통치'
프랑스는 중동지역에 프랑스식 기독교 국가를 세우기 위해 대시리아(레반트, 앗시리아) 영토에서 마론파가 많은 레바논 해안지역을 따로 분리해낸다.
이슬람으로부터 종교적으로 안전해진 마론파는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의 영토 확장을 부추긴다. 1920년이다. 그런데 추가로 확장한 지역은 무슬림이 다수이다 보니 레바논 전체의 마론파와 무슬림 인구 비중이 엇비슷해지면서 그동안 유지하던 마론파의 우위가 흔들린다.
프랑스는 근대적 교육시설을 세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프랑스 문화를 교육한다. 레바논 학생은 프랑스어를 배우지만 새로운 레바논 국민으로서의 교육은 받지 못한다. 프랑스 역시 과거 오스만 제국처럼 여러 종교들을 인정하고 자치권을 주다보니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는다. 어쩌면 프랑스가 바라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은 중동에서 가장 서구화된 지역으로 발전해간다. 전체적인 경제수준이 향상되다 보니 무슬림들의 반프랑스 여론도 잦아들면서 중동 지배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평화가 오래 가지 못한다. 1925년 드로즈파가 자치권을 요구하는 무장시위를 시작으로 무슬림들의 기독교 위임통치에 대한 저항이 한층 드세진다.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프랑스는 입헌공화정 수립을 제시한다. 공화국은 국민들이 선출하는 의회를 구성하여야 하고 선거구와 의석 규모를 선정하여야 한다. 특히 레바논처럼 여러 종교들이 모여 사는 경우에는 선거구를 책정할 때 종파별 인구 현황을 충분히 반영하여야 한다.
1932년 레바논 최초의 인구조사가 실시된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인구조사를 마론파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여 마론파 인구가 다른 종교보다 약간 많은 총인구 대비 50%로 집계한다. 이 인구조사 결과를 기준하여 의회 의석 수를 기독교 6 무슬림 5로 맞춘다. 이 비율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이어져 레바논에서 기독교도의 우위를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계속 작용한다.
'국민협약(the National Pact)의 체결'
1930년대 아랍 지역 전역에 아랍 민족주의 바람이 휘몰아친다.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과 함께 레바논도 무슬림들이 레바논 독립운동을 펼친다. 마침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임시정부는 레바논의 독립을 약속한다.
1944년 레바논은 독립을 선언한다. 일년 전인 1943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각 종파 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준비하는 정치 설계도인 국민협약에 합의한다. 주요 내용은 마론파는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지 않을 것, 수니파는 시리아와의 통합을 포기할 것, 대통령은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가 맡을 것, 국회 의석은 기독교 6 이슬람 5의 비율로 할 것 등이다.
얼핏 보면 갈등을 최소화하는 좋은 합의처럼 보이지만 11년 전의 인구조사를 기준하였기 때문에 향후 여건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국민의 뜻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각 종파의 원로들이 대를 이어 장악하는 그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판을 친다. 정치는 부패하고 국가는 무능해진다.
'분열과 갈등'
1946년 프랑스군이 레바논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망명정부는 독립을 약속했지만 종전 후 들어선 프라스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레바논의 독립 선언 이후에도 위임통치를 계속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레바논 분위기는 이미 달라졌다. 마론파도 반대하고 국제사회의 비난도 쏟아져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한다.
1970년대까지 레바논은 황금기를 누린다. 다른 아랍지역과 달리 레바논은 가장 서구화된 중동국가이다. 교육시설이 잘 되어있고 문자해독률이 88%에 이를 정도로 교육수준이 압도적이다. '동방의 파리'라고 불리는 베이루트에는 서구식 호텔과 레스토랑, 바가 즐비하고 관광객들이 가득 타고 오는 호화여객선이 정박하여 밤거리는 외국인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레바논 국민 모두가 누리는 것은 아니다. 마론파와 일부 수니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무슬림들은 극빈자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한다. 이들의 불만은 커지고 갈등의 균열은 점점 벌어진다.
레바논은 중동의 정치 격변으로부터 한발자욱 비켜나 있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1958년 큰 위기가 찾아온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합병시키고 '하나의 아랍'을 외치는 나세르는 왜 레바논은 아랍인이 이등 국민인가? 라며 레바논의 국민합의를 비난한다. 레바논의 무슬림들이 들썩인다. 나세르는 국민협약의 개정을 요구하며 레바논 정부에 저항하는 무슬림 단체에게 무기를 제공한다. 다급해진 레바논 정부는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미국은 해병대를 급파하여 사태를 진정시킨다. 이 과정에서 4천여 명이 사망한다.
1970년 또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무슬림 난민들이 대량으로 레바논으로 들어온다. 경제와 치안이 불안해지고 무슬림 인구가 많아지면서 기존의 인구 구성이 깨진다. 국민협약을 개정하라는 요구와 함께 권력과 부를 차지하는 마론파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마론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한다. 마론파의 무장 조직인 팔랑헤(Phalange, 군대)당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간의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허약한 레바논 정부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1975년 둘 간의 무력충돌이 내전으로 번진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무력개입하고 약 12만 명의 사망자를 낳으며 약 15년간 지속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각 종파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본거지에서 키운 무장조직으로 내전에 뛰어든다. 시아파의 이슬람주의 행동조직인 '헤즈볼라(الله حزب, Hezbollah)'가 대표적이다.
사실상 무정부상태다. 동방의 파리라던 베이루트도 황폐해진다. 다양한 정체성의 여러 집단들이 조화롭게 지내는 듯하던 레바논의 허상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민족국가로서 레바논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국가를 구성하는 주류 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 중동국가들도 비슷한 갈등은 있지만 각자의 주류세력이 있어 국가를 유지해나간다. 반면에 불완전한 타협으로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을 취해오던 레바논은 한번 갈등이 분출되자 그를 조정할 능력이 없다.
프랑스가 인위적으로 짜 맞춘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은 오늘날 중동의 가장 실패한 민족국가의 표본이 되었다.
참고: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다음은 이란의 이슬람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