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영국 공군 중폭격기 722대와 미국 육군 항공대 중폭격기 527대가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에 대해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사흘 밤낮 동안 소이탄을 비롯한 75만 발의 폭탄이 투하됐고 이로 인해 20∼25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악의 공습이었다. 영국 언론인 겸 역사학자 필립 나이틀리는 당시 드레스덴 공습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폭탄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인공 폭풍은 갈수록 사나워졌다. 섭씨 1000도가 넘는 폭심 속으로 사람은 물론 모든 것들이 시속 160킬로미터의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화염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사람들은 수천 명씩 불에 타고 질식해서 죽어갔다. 다음 날 미국 전투기들이 드레스덴에 나타나 살기 위해 엘베강둑을 따라 뛰어가는 생존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독일의 피렌체'로 불리는 문화 도시, 이렇다 할 군수공장도 없고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 드레스덴, 게다가 독일의 패망이 사실상 기정사실화된 전쟁 말기에 이토록 잔인한 공습을 퍼부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스탈린에 대한 처칠과 루스벨트의 무력시위였다.
드레스덴 공습이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였다는 것은 애초에 이 작전이 얄타 회담 개최일인 2월 4일로 예정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단지 기상 악화로 인해 2월 13일로 연기됐을 뿐이다. 미영은 얄타 회담 개시 날짜에 맞춰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탈린의 양보를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독일 공습을 주도했던 아서 해리스는 자서전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에서 드레스덴 공습은 "나보다 훨씬 고위층에서" 결정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전략폭격대 사령관인 해리스보다 훨씬 고위층이라면 처칠이다.
역사가 알렉산더 매키는 "처칠은 드레스덴의 밤하늘에 소련에 대한 경고장을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나치를 작살냄으로써 소련 공산주의자들을 겁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영국 공군의 기록도 이러한 의도를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드레스덴 공습은 독일을 타격하는 것 외에 소련군이 드레스덴에 도착했을 때 우리 공군의 위력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었다"
1945년 2월 초, 소련군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도 안되는 프랑크푸르트 안데 오데르까지 진출했다. 서쪽에서 진군해오던 미영 연합군은 라인강도 건너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발이 묶여 있었다. 미영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을 향한 경쟁에서 소련에 한참 뒤처진 미국과 영국은 전후 처리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미영의 대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협상을 통해 전후 독일 문제를 미국, 영국, 소련이 공동으로 처리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얄타회담이 열렸다. 다른 하나는 미영의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탈린이 일방적 독주를 하지 못하도록 경고장을 보내는 것이었다.
드레스덴 폭격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드레스덴 공습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미영의 경고장이었다. 이를 위해 30만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야 했다. 독일의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드레스덴으로 몰려온 수많은 피난민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미군 병사로 참전했다 독일군에 잡혀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감금돼 있던 커트 보네거트(1922∼2007)는 후에 이 공습을 소재로 <제5도살장>이라는 작품을 썼다. 한마디로 인간 도살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마이클 셰리는 "공격할 만한 군수공장도 거의 없는 드레스덴에 대한 미영의 과도한 공습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전선
드레스덴 폭격
1938년 드레스덴 모습
폭격 후 드레스덴 모습
재건된 드레드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