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었던 한 인간의 비통한 좌절… 그게 ‘진짜 오셀로’
예술의전당 30주년 기념 연극 ‘오셀로’ 주연 박호산
이태훈 기자
입력 2023.04.18.
예술의전당 30주년 기념 연극 '오셀로'(연출 박정희)에서 오셀로를 맡은 배우 박호산은
“가장 셰익스피어스다운 말맛으로 가장 셰익스피어스러운 오셀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배우는 남의 연기가 좋다고 따라 하면 바로 낡아요. 했던 작품을 또 하더라도
늘 새롭게 디자인하는 게 배우의 일입니다.” /예술의전당
서울 예술의전당 30주년 기념 연극 ‘오셀로’ 개막은 내달 12일. 아직 한 달쯤 남았는데, 티켓 예매 순위는 줄곧 1~3위를 오르내린다. 17세기 초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 이 고전이 21세기 서울에서 어떤 새로운 무대를 보여줄지 관객들 기대가 크다. 그리고 그 기대의 상당 부분은 주인공 오셀로를 연기할 배우가 박호산(51)이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 ‘슬기로운 감빵생활’, 최근엔 ‘모범택시2′ 등 드라마에서 선 굵은 연기로 얼굴을 알렸지만, 그에게 연극은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 그가 연기할 중세 베네치아의 무어인 용병 장군 오셀로는 간악한 이아고에게 속아 아내 데스데모나를 질투하다 끝내 살해한다. “포스터엔 ‘추악한 욕망에 스러지는 고결한 영혼’이라고 쓰여 있지만 누군가는 계략에 놀아난 미련한 남자라 여길 거예요. 저는 오셀로가 더 지적이고 강인할수록 대척점에 있는 이아고도 강력해질 테고, 오셀로가 겪는 추락의 낙폭도 더 커질 거라 생각해요.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셰익스피어가 원했던 진짜 오셀로를 셰익스피어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박호산은 “예술의전당 30주년 기념작 주연이라니 무조건 하겠다고는 했는데, 사실 셰익스피어 극은 부담이 크다. 전 세계 수만명이 ‘오셀로’를 연기했을 테고 ‘이아고’ 해 본 사람도 지금 출연진에만 네명”이라고 했다. “원작 희곡은 그냥 읽기만 해도 3시간 반 이상이 걸릴 만큼 방대해요. 한 달째 창작진이 모두 매달려 문어를 구어로, 고어를 현대어로 셰익스피어다운 말맛을 살려 압축하고 있어요.”
벌써 인쇄본만 세 번째, 파일로는 여섯 번째 수정 대본이 나왔다. 박호산은 “대본에 뭘 잘 안 적는 편인데 이번엔 하도 많이 지우고 덧쓰다 보니 대본이 아주 새까맣다”며 웃었다. “오셀로의 장인 역할인 이호재(81) 선생이 ‘아니, 연습한 지 한 달인데 아직도 대본 읽고 있으면 어떡하니?’ 하실 정도라니까요.”
예술의전당 30주년 기념 연극 '오셀로'(연출 박정희)에서 오셀로를 맡은 배우 박호산은
“가장 셰익스피어스다운 말맛으로 가장 셰익스피어스러운 오셀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배우는 남의 연기가 좋다고 따라 하면 바로 낡아요. 했던 작품을 또 하더라도
늘 새롭게 디자인하는 게 배우의 일입니다.” /예술의전당
박호산에게 “고전을 관통하는 것은 늘 ‘인간’의 문제”다. 생사를 오가는 전투, 치열한 복수의 길을 걸어온 오셀로에게 아내 데스데모나는 동물적 욕망을 넘어선 정서적 첫사랑. 그 때문에 영웅이었던 한 인간이 낯선 감정인 질투에 함몰되고 결국 파멸한다는 것이 박호산의 오셀로 해석이다. “긴 허세는 줄이고 템포로 무게감을 만들고 싶어요. 무대 위 오셀로의 애끓는 심정, 비통한 고독과 좌절을 관객이 공감하게 할 겁니다.”
박호산은 “배우는 꽉 찬 객석에서 바람으로 불어오는 무대 위 공기를 조종하는 지휘자”라고도 했다.
“그 바람은 왼쪽 혹은 오른쪽, 맞바람 혹은 뒷바람일 때도 있죠. 그걸 만지는 게 배우의 힘이고,
극 전체를 알고 있어야 해낼 수 있어요.”
그는 “모든 게 분업화된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 연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 배우로서 힘을 유지하기 위해 1년에 최소 한 번은 연극을 한다”고 했다.
‘오셀로’는 박호산에게 “나이 오십을 통과할 때 선물처럼 찾아온 작품”이다.
스물에 배우로서 '직업'이 열렸고
서른엔 ‘외로움’이 찾아왔죠.
마흔엔 저 자신의 오만과 건방,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주며 살아온 세월에 대한 ‘반성’이 찾아왔어요.
모든 게 억울하고 세상 나 혼자 같아 괴로운데, 꿈에 한 노인네가 나타나 ‘호산이 너 이놈아!’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왜 날 호산이라 부르지? 저 사람이 할아버지인가?” 그때부터 본명 ‘박정환’을 버리고, 6·25 때 납북돼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이름 ‘박호산’으로 개명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박호산과 유태웅이 ‘오셀로’에 더블 캐스팅됐다. 지적이고 냉철한 연출로 널리 알려진 여성 연출가 박정희가 작품을 이끈다.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는 소리꾼으로 더 유명한 만능 예술가 이자람이 연기한다.
5월 12일부터 6월 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편집국 문화부 기자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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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1
바우네
2023.04.18 06:49:31
“맞바람 혹은 뒷바람일 때도 있죠”(?)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표준어를 쓰고자 하신다면, '뒤바람'과 같이 쓰실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