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마운틴에서 산장 주인도, 손님도 대를 이어가는 곳(안준영 기자 2014.06)을 읽었다.
아무래도 속리산에 한번 다녀와야 쓰겄다.
기사 중에 나를 달아 오르게 한 건 이렇다.
속리산 법주사 시외버스터미널에서부터 레이크힐스호텔까지 약 1km거리에는 산채비빔밥, 도토리묵 등 향토음식을 하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식당 앞에 나와 호객 행위를 하는 식당 아주머니들을 피해서 빨리 걸을 수도 있지만,그런 것에도 아랑곳 않고 느긋이 거리를 구경하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기분에 빠진다.셀로판 글씨로 '양장점'이라 쓰인 가게 진열창 너머로는 20년은 좋이 넘었을 것 같은, 빛바랜 옷이 늙은 마네킹에 걸려 있다.
또,많은 식당들 사이에 낀 기념품점 좌판에는,
이제는 어디론가 팔리길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그 자리를 몇 천 년 지키고 있다가
마침내는 부처가 될 것 같은,먼지 쌓인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또,많은 식당들 사이에 낀 기념품점 좌판에는 먼지 쌓인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라는 구절....마음이 짠해진다.
이 부분은 기자가 느낀 감상인데, 실제로는 매장에서 기념품들은 천덕꾸러기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언제건 팔리기만 하면 없애버리고 싶은.
그 기념품들을 구해주어야겠다.
그들이 있을 곳은, 그들의 친구가 먼저 와 있는 이곳 등산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도란도란 밤새워 영화롭던 그때 그시절에 대해 이야기나눌 곳은 여기이다.
'''''''''''''''''''''''''''''''''''''''''''''
그리고 당시 속리산 쪽의 내밀한 기억들에 관한 기사내용도 나를 유혹한다.
다만 그때 그 시절은 점 더 복원하고, 관련 사진을 한두장 정도 첨부했더라면 좋았을 법 했다.
비로산장을 찾아가는 길에는 법주사를 지나가게 된다.
속리산이 국립공원이 되기 전에는 법주사 일주문 일대에'하꼬방'들이 즐비했었다.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없어졌지만, 지금 걷고 있는 이 길가에도 다 집이 있었어요. '하꼬방'이라고 불렀어요. 신혼여행객이 많아서 평일에도 방이 없을 정도였어요."
경향신문 1971년 9월 23일자 〈등산관광〉 기사에는 "신혼부부의 허니문 코스로는1박2일 또는 2박 3일의 온양온천, 속리산 등 적격. 커플이 교통비, 호텔비, 숙박비 등 2만원 정도면 족하다."는 속리산 관광을 안내하는 내용이 실렸다.
비로산장에는1980년대에 들어서 전기 공사를 했는데,
그 전까지는3년 동안 물레방아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사용했다.
팔도식당은 외관만 수리하고, 골조는 옛날 그대로다.
식당 주인이 '고야집'이라고 설명해주었는데,
아마도 일본어로 '산막'이라는 뜻인 '코야(小屋)'에서 온 말인 듯하다.
"아우너미에 있던 판잣집들을 다 내몰고 지금 자리로 옮겨왔어요.
심지 뽑기 해서 자리 배정받고 온 거죠.지금 조각공원 자리에도 여관이 많았어요."
지금은 법주사 매표소 안쪽으로 식당과 민박을 겸하는 집이 두 집밖에 없지만,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법주사 일주문 근처로 하꼬방이 많았다고 한다.
김은숙씨는 어렸을 때지만 지금도 눈에 선한 기억이라며,
이 길을 따라 집에 가던 길에 하꼬방에서 아이를 낳게 된 신혼부부를 봤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아버지는 산장을 하시기 전에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속리산에 반해서 왔어요. 처음부터 산장을 하신 건 아니고, 마을에서 사진 앨범을 파는 기념품 가게를 했어요. 여관들에 물건을 외상으로 대주다가 3년 만에 가게를 정리하고, 산속 깊이 들어왔어요. 법주사 스님들에게 허락을 받아 산장을 지을 수 있었죠."
김태환 할아버지가 숯 만들던 움막을 개보수하여 행락객을 맞은 비로산장은 1965년에 문을 열었다. 비로산장은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70년 이전에 있었던 덕에 내몰리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국립공원 지역 내에 있기 위해서는 건물을 증축해야 했다. 조릿대로 지은 초가에서 제대로 된 벽돌집을 짓기 위해서 세심정에 모래를 여덟 트럭이나 갖다 댔다. 당시에도 비포장이지만 세심정까지는 차가 들어올 수 있었다. 문제는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세심정에서부터 비로산장까지 모래를 날라야 했던 것. 별 다른 묘수 없이 인부들과 함께 등짐 져서 모래를 날랐다고 한다. 비로산장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건 1974년이다. 본채 하나와 별채 둘인데,그 중 방 세 칸짜리 별채는 고시생들이 공부방으로도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