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시대 중종과 조광조의 ‘동상이몽’ 이중주
조선조 연산군의 행동이 점점 포악해지자, 여러 신하들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중종)으로 세웠다. 앞전 임금인 연산군을 폐하고 훈구파의 세력의 뒷받침으로 인해 중종이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자력으로 왕위를 잇지 못한 탓에 훈구파의 압력에 휘둘리게 된다.
임금이 신하들 눈치를 보니 피곤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종은 훈구파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당시 사림파의 거두인 조광조를 측근으로 앉히게 된다. 중종은 사림파와 힘을 합하여 새롭게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성향인 향촌 자치적 성격을 띈 유교적 도덕 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조광조는 왕에게 바른말을 잘했으며, 능력 있고 인품이 올곧은 선비를 추천해 관리로 뽑도록 하는 등 나라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 당시로는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결정적으로 위훈삭탈(제)라 하여 중종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우지도 않은 사람들을 특별 대우 해 줘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등 이러한 주위 상황을 안보고 너무 급진적으로 밀어 붙이는 움직임들이 문제가 된다.
조광조의 움직임이 못마땅했던 훈구파는 궁리 끝에 조광조를 없앨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 중 하나가 나뭇잎 사건이다.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써서 벌레가 글씨 부분을 갉아먹게 한 뒤 왕에게 보여 주게되고 중종을 압력하여 조광조를 반역도모죄로 몰기 시작한다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가 되니 주초위왕이란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조씨는 다름 아닌 조광조를 가리킨다. 때마침 중종도 개혁을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는 조광조가 부담스러웠고 너무나 이상적인 정치성향으로 중종의 마음에서 멀어진 조광조였기에 중종에 의해 권력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귀향길에 올라 거기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사건은 조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4대 사화와 7대 당쟁중, 기묘사화라 일컷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도 정권에서 밀려난다.
중종과 조광조는 서로의 정치적 이상향이 맞아 한배를 탄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 그리된 것이다. 중종은 자신에게 권력을 잡을 기회를 준 훈구파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광조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향을 펼치고 사림파를 정계의 중심에 올려놓기 위해 중종과 조광조는 서로를 수단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적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조광조가 그 힘을 대신하게 되자 중종은 조광조를 ‘쓰는 목적’, 즉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물론 조광조는 성급했고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가장 큰 패착은 최고 권력자의 속성을 망각한 것이다. 조광조는 권력은 절대 나눌 수도 없고,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 그 점을 간과했다.
조선 11대 왕 중종 시대의 정치가이며 성리학자인 조광조. 그는 33세의 나이에 권력을 장악,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중국 하, 은, 주 시대의 덕치, 요순 치세의 태평성세, 그리고 공자와 맹자, 주자의 학풍이 살아 있는 조선을 그렸다.
조광조는 ‘군주는 성리학자이며 ‘철인 哲人’이 되어야 한다’고 ‘군주’를 가르쳤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고르게 잘 사는 나라, 성리학의 예와 인이 활짝 핀 이상향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불과 4년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그는 사약을 받고 죽었고 그를 추종하던 젊은 유생과 관리들은 모두 죽거나 귀양을 떠나야 했다.
조선 건국의 이념을 완성했던 정도전 사후 근 100여 년 만에 등장한 조광조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조광조는 아마도 ‘제2의 정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며 그가 꿈꾸던 조선의 기틀이 변질되었듯이 조광조 역시 보수 훈구파의 반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를 발탁하고 총애하고 힘을 실어주었던 중종 역시 마지막 순간에 조광조를 외면했다. 역사는 조광조가 ‘너무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또한 ‘중종에게조차 완벽한 도덕적 군주’를 강요한 것이 패착이었다.
중종 시대 4년 동안 불같은 열정과 냉철한 이성 그리고 한 치의 어긋남 없는 몸가짐과 경전같은 이론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조광조. 그는 비록 당대에는 개혁의 꿈을 버려야 했지만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 계보를 이황, 이이, 기대승에게 전승시켰고 명종, 선조 이후 조선의 실권을 사림파가 장악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럼 무엇이 조광조의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향한 조선 개혁의 원대한 꿈을 무너뜨린 것일까. 또한 조광조는 어째서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중종의 신임을 하루아침에 상실한 것일까. 그것은 조광조의 숙성되지 않은 급진성, 여백없는 원칙주의, 군권과 재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미완의 세력 탓도 있지만 ‘중종과의 동상이몽’을 빨리 깨닫지 못한,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미숙함에서 찾을 수 있다.
중종은 1506년 연산군의 파국적인 정치에 염증을 느낀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때 중종의 나이 19세였다. 반정의 핵심세력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거의 강압에 의해 왕위에 올리고 정권을 장악한다. 그들의 첫 번째 숙청대상은 공교롭게도 중종의 장인이었다. 중종의 장인 좌의정 신수근은 박원종 등의 반정군 가담 요청을 거부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7일 만에 반정공신들은 중종의 왕비인 단경왕후 신 씨의 폐위를 주장한다. 명목은 연산군의 측근이었던 신수근의 딸이 왕비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정공신들에겐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단경왕후가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담아두고 훗날 반격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였고, 두 번째는 왕위에 오른 중종의 기세를 애초부터 꺾어놓으려는 속셈이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중종은 자신의 왕비를 지킬 수 없었다. 단경왕후는 억울하게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중종은 반정공신들 특히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무서워했다. 실록을 보면 “이들이 퇴청을 위해 자리에 일어난 뒤에나 중종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은 젊은이의 편이다. 그 무섭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중종에게도 군주로서의 기본적인 힘과 권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종은 훈구파를 대신할 세력을 찾고 있었다. 그동안 정국공신들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던 왕에서 ‘신하 위에 군림하는 힘 있는 군주’가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구파와의 치열한 권력 투쟁을 감당해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로 중중은 조광조를 선택했다. 조광조의 박상과 김정의 단경왕후 복위와 관련 ‘대간의 본래 임무’에 입각한 원칙론을 훈구파도 반대할 수 없어 결국 대간들은 전부 교체하는 논쟁에서의 승리가 있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논리정연하고 강직한 성품, 원칙론을 내세워 정국과 여론을 끌고 가는 힘이 중종의 마음에 든 것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발탁한 가장 큰 목적은 강력한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면서 그를 통해 군주의 통치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그가 천거한 수많은 사림학자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하지만 조광조가 훈구파를 숙청하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중종에게는 또 다른 기득권 세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결국 중종은 훈구파나 사림파 그 어느 쪽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도학정치를 펴고 싶었다. 그가 세력과 붕당을 형성하고 훈구파처럼 권력과 부를 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광조와 중종은, 개혁정치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달랐다. 즉 두 사람은 ‘동상이몽’을 꾼 것이다.
훗날 퇴계 이황은 조광조에 대해 “뜻은 높으나 정세 전반의 파악 없이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한 점과 정치적 타협이 없었던 점이 아쉽다”라고 평가했고 율곡 이이 역시 “조광조는 자질과 능력이 뛰어났지만 학문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일선에 뛰어든 것이 아쉽다”라고 조광조의 개혁 실패를 평가했다.
조광조는 분명 모든 백성이 고르게 잘 사는 사회, 성리학적 이념이 충만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많다. 타협과 조정을 배제한 급진과 미숙함이 원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군주와 동거’ ‘적과의 동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원칙주의가 조광조의 꿈을 앗아간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중종은 1519년 12월 조광조를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 보냈다 사약을 내린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애정이 싸늘하게 식은 것을 안 강경 훈구파는 조광조의 죽음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을 깨달은 조광조는 ‘절명시 絶命詩’ 한 수를 남기고 개혁에 대한 굳은 의지와 잘 사는 조선 건설의 꿈을 내려놓는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 주리라.”
그의 나이 38세이다. 조광조는 인종 때 복관되었고 선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