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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설날 큰형님 댁에서 일가족.
1945년 8월 15일 해방
아버님 나이 당시 46세
이미 성주군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에 논이 9만평이 (450 마지기) 있었고
성주군에서 제일 큰상점를 운영 하고 있었다.
정미소는 기본적으로 쌀방아 보리방아 가 있고 솜타는 기계 그위에 제분기(밀방아)는
일제 하에서 일본 오사카에 현대식 제분기(밀방아)를 발주하여 6개월여 만에 설치 하여 정미소가 일취 월장해 부속 토지만 해도 1.000평이 넘었다
김천시(금능군) 칠국군 고령군 달성군등 인근 시군에서 제일 먼저 설치 유일한 밀방아라서 일거리 몰려 왔다고 한다
사업이 벅차기도 하고 당시 선산군 구미면에서 농산물 검사원으로 출퇴근( 왜관까지 자전거 왜관서 기차) 하시든 동생이
안스러워 불러다 그큰 정미소 사업을
동생에게 물려주셨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이룩 해야만 제가치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이야 피를 나눈 동생이지만
어머님으로 봐선 남이나 다름 없는 시동생인데 피땀으로 이룬 그큰 재산을 말없이 승락 하신 어머님 또한 존경 스럽다
과수원 2개가 있었다
( 과수원은 토지 계획법에 제외 된다 하여 달성군 하빈면에서 사과나무를 사서 소달구지로 운반해 조성한 과수원이다)
함께 동생 밭도 과수원으로 조성해주셨다 -탱자나무 울타리까지 심어서-
1950년초 토지 계혁법으로
월항면 안포리 논 9만평 (450 마지기) 이 소작인 손으로 다넘어 가고
1950년 6월25일 한국 동란으로
굴지의 사업장과 전재산이 일시에 소실되었고
월항면 안포리에 논 9만평 (450 마지기)에 대한 일부 받은 상환곡은 동란으로 소실되고
연부로 보상 받을 조건은 기본서류 자체가 금융조합 군청 행정기관에 모든 서류가 소실되어
모든 근거가 일시에 사라지고 전란중이라 행정적 후속 조치가 없었다
그때 나는 14세 초등학교 6힉년이었고
아버님 나이 51세에 이지역에서 손꼽히든 재력가가 하루 아침에 가난뱅이로 전락 하고 말았다
겨울에 먼산에 나무 하러 가시면 해질녁 2키로 정도를 칼바람속에 아버님 마중을 나갔다
마중을 나가도 별의미가 없는것이 내가 너무 어려서 도움을 드릴수가 없었다
추운데 왜 나왔느냐고 꾸중을 ? 하셨다
그래도 아버님 손잡고 집으로 오는 길이 나는 그냥 좋았다
도리켜 보니 51세 아버님께 조금은 위로와 용기를 드리지 않았나 싶다
아버님께서 해보지도 않은 농사일을 6년이나 하시면서
고생을 말할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려 매년 남은 토지를 야그야금 팔아 아이들 학자금 자녀 결혼 비용등
생활비로 쓰다 보니 10명이나 되는 대가족에 논 18마지기 밖에 남지 않아 앞날의 회망이 보이질 않는 시점에 이르렀다
과수원이 2개나 있어도 품종이 제래종이라 매년 농약이다 비료다 자금과 노력만 들어 갈뿐 수입은 적어
언제나 적자인 애물 단지였다
매년 토지를 팔아 생활하니 앞날이 불을 보듯 훤하다
나의 청소년기
중학교 1학년때 아버님을 졸라 새끼 토끼 암수를 2마리를 사서 길렀다 한달에 하번식 번식을 했다
토끼새끼를 판 돈과 도마도를 재배하여 종로에서 가게를 하시는 고모님께 넘겨 받은 돈을 더하여 암닭을 샀다
배를 만저 보고 알이 들어 있는 닭을 사다 놓으면 오후에 바로 달걀을 1개를 낳았다
닭걀 2~3개 값이면 병아리 1마리를 살수 있었다
달걀을 팔고 도마도를 팔고 토끼 새끼를 팔고 돈 형편 따라 어미닭 병아리 할것 없이 구입했다
농고 1학년 가을에는 토끼 어미닭 145마리에 달걀 200개의 농장주가 되었다
그해 겨울 돌림병으로 죽은 닭은 버리고, 매일 몇마리식 온식구가 닭고기 잔치를 했다
달걀을 너무 추워 다 얼어서 상품가치가 없어 먹어 치웠다
목돈을 만들어 소나 돼지를 키우려든 꿈은 사라 젔다.
청운의 꿈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대학에 갈걱정을 하게 되었다
우리집 형편에 얼렵겠다 생각이 되어
대구 지방지에 4단 짜리 시사 만화를 실어 하숙비 정도라도 벌어야 겠다고 중학교 3학년때 부터 준비하고 있든중
대구에서 낮에는 자형 쌀가게에서 배달을 하고 밤에 야간 고등 학교에 다니는 이종 사촌형 한분이 왔다
그형에게 부탁해 생전 처음 대구시내를 갔다
그때는 하루에 아침 8시에 버스 한대가 대구에 갔다가
저녁 8시에 대구를 출발 성주에 오는 것이 교통 수단의 전부였든 시절이다
이종형의 안내로 영남일보사 대구일보사 대구매일신문사 3개 지방지 사무실을 방문하고
처음은 몰라서 편국장 을 통해 문화부장을 만나 보았다
내가 너무 앞서 갔나 보다 중앙지에는 고바우(김성환) 뚜꺼비(안의섭)등 몇군데 연제가 되고 있었는데
대구에는 아직 없었다
내작품을 보시고 회사 경제적 여건이 않되어 아직 계제를 못하고 있는데
학생이 나이도 어리고 하니 회사 여건이 좋아 질때까지 기다리며 열심히 공부 하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박학 다식을 목표로 악서 양서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많은 책을 읽었다
그시절에는 읽을 거리가 없어 시장에서 멸치를 팔때 싸준 헌 신문지를 펴서 달달 외울 정도 읽고 또 읽었다
순간 순간의 아이디어를 위해 순발력있는 두뇌회전이 필요 하다고 보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위로 형님 세분이 있고 아래로 동생이 세사람 나는 사각지대인 한중간이었다
집안형편이 뻔하게 보이는데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종로 시장통로에 6.25전 크게 사업하든 장소에 새상가를 지어 큰형님이 두번쩨 살림을 났는데
형님은 교직에 있으시고 형수님이 가게를 내었는데 실페였다
형님이 두번식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일이 있어 아버님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모면 했다
종로에 나가서 예전처럼 다시 장사를 하자고 4년동안이나 부모님께 말씀드렸으나
언제나 대답은 당신깨서는 없는 가정에 태어나서 부자소리 까지 들어 봤으니
더이상 장사는 하지 않겠다 하시면서
이제는 너희들 세상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하신다
재기의 몸부림.↔대전환↔
날라 오는 화살을 앉아서 맞는 것이 뻔 한데 한번 피해 봐야 할것 아닙니까
밑쩌 봐야 본전 이라며 부모님을 졸라 댔다
농사일 않하시고 성주부자소리 듣든 어른이 산에 땔감 나무도 하러 다니시고
고댄농사일을 하시는 동안 세월이 6년이 지났다
10명 대가족에 남은 논이 18마지기 뿐이였다
내바로위 중형과 나의 고등학교 월사금을 제때에 내지 못할때도 있었다
휴대용 작은 성냥 한갑을 사면 어머님이 부엌에 불씨를 묻어놓고
그작은 성냥으로 호롱불을 키는데 사용하면서 5일을 버터야 했다
내가 고등하교 3학년이 되고 짧은 봄방학중에 3학년 등교도 못해보고 만성 맹장염이 걸렸다
당시 15만환만 있으면 수술을 할수 있다는데
그형편 못되어 6개월 정도 흰죽으로 연명하며 집에 요양을 취할수 밖에 없었다
6개월 동안에 한의원 약은 딱 한번 먹어 봤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아버님도 더어쩔수 없으셨는지 나의 말을 받아 들려
큰형님 식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농가로 이사를 오고
반대로 우리식구들은 종로 시장길 상가로 서로 집을 바꾸는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사이 논이 11마지기로 줄었다 7마지기를 남겨 놓고 4마지기를 팔아서 장사 밑천으로 점방 1칸으로 시작 했다
무슨 물건이든 차때기로 사입 하시든 아버님께서 대구에서 물건을 사서 양손에 들고 버스를 타고 오시는
그런 초라한 장사를 시작 하시게 된것이다.
지금 생각 해보면 나이 46세에 부자소릴 들으시든 어른이 나이 57세에 밑바닥 부터 새출발 하시면서
얼마나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 하셨을까 싶다
나는 여름방학도 끝난 8월 27일 고등학교 3학년을 첫 등교를 했다
그때까지도 몸이 완쾌되지 않아 조심해서 활동할 정도였다
6개월동안 흰죽만 먹어 하얀 색갈만 봐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 였다
그래도 나때문에 아버님이 저고생을 하신다 싶어 집에 오면 아버님을 도와 점방일 배달일
가리지 않고 다 했다
대학 진학은 오리무중
지방지 신문에 시사만화 올릴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버지 사업의 일원으로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어 빠저 나올수가 없게 된것이다.
그때는 도로가 비포장 자갈길이라서 28인치 자전로 배달하는데 정말 고생이 많았다
학업과 점방일을 병행해 왔는데
없친데 덮친격으로 6개월 이상 장기 결석을 했다고 졸업장을 주지 않는 다고 전해왔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3~4개월 정도 무단 결석 하는것은 보통 이었다
나는 6개월 결석을해 결석 일수 제일 많았다
나는 공의의 진단서를 첨부 하여 정식 결석계를 내고 결석 했는데도
대구시내에서 전근 와서 시골 사정을 잘모르시는
새로온 교장이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한사람을 본보기로 처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문제 학생도 아니고 성적은 중상이고 학급일지를 쓰는 책임자이고 덤불링 선수에 미술부가 없는 농업학교 이지만
운동회 포스타 환경 미화를 위해 나는 미술 부장을 맞고 있었다
고1때 부터 담임을 하여 내사정을 잘 아시는 선생님이 갑자기 김천으로 전근 가시어 나를 대변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석한 6개월 공백기 공부를 어려운 가운데 수학 말고 나머지 과목은 거의 다 딸아 잡아 놓았는데..........
일년이 지나
우여곡절끝에 졸업장을 받아 놓고도 가정 형편상 어쩔수 없었다
개교 한지 얼마 않되는 서울 모대학에 다니는 선배 한분이 학교 판프렛을 보내와 등록금을 마련해 오면 2학년에 바로 편입학 시켜주고 자기와 같이 학교 축사 일을 돌보면서 먹고자고 하면서 학비를 해결 하면 된다고 한다
부모님께 사실을 말씀드리니 내년에 보자 하신다.
이래저래 여건이 허락 하질 않는다
세월이 흘러
그러는 동안 두쩨 형님이 분가를 해서 점포를 내었다
세쩨형이 제대해서 결혼 하고 부모님 형님 내외 나 5명이 매달려 점방을 봐야 할정도로 사업이 확장 되었다
세쩨형이 제대하여 왔으니 다음 내가 군에 입대 할차래가 되었다
공군에 입대
내가 24살에 늦은 입대를 하는데 만성 맹장염 때문에 언제나 시한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라
육군에 가는 것이 늘~걱정 이었는데 선배 한사람이 공군에 가면 비행장 안에 의료 시설이 잘되어 있어 만성맹장에 문제가 생겨도 걱정 할필요가 없다고 해서
공군에 지원 입대 하게 되었다
내가 5년간 봉사 하고 군에 입대 할당시 우리집의 논이 67 마지기로 불어나고 집과 대지도 6 필지가 되어
가세가 크게 재건 되어 있었다.
대전 항공병학교 3개월 교육중에 4.19를 맞고 김해기술학교에서 3개월, 동촌비행장, 부산 수영비행장을 거처 경남 남해 금어산 .경북구미금오산 에서 5.16. 경남사천 비행장에서 대구 동촌 비행장으로 동촌 비해장에서 같은 특기생 20명중 특기 시험에서 1등을 해서 하사로 특진 동기생 병장 보다 4배나 많은 봉급을 받았다
만3년 하루만에 제대를 하게 되었다
경북 구미 금오산에 근무할때는 10일 근무 하고 10일 휴가 1년 근무 하는 동안 6개월을 집에 와서 점방일을 봤다
대구 동촌 비행장에서 제대할 즈음
2명 선발하는 문관시험에 따논 당상인데 마다 하고 집안일 걱정에 집으로 돌아와 가업을 도왔다
그때 내나이 27살 이였다
온가족이 열심히 한결과
집안은 안정이 되고 나를 돌아보니
나의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께 대구시내 전기 통신학원에 가겠다 말씀드리니
네형과 의논해 보자고 하시고는 더이상 말이 없으시다.
가업의 톱니 바퀴에 내자리가 굳어저 나올수 없었다
결혼과 분가
28살에 결혼하고 32살 되든해에 분가 독립 하게 되었다
셋쩨형님이 분가 하고 다음 내차래 인데 아내의 분가하고픈 뜻이 너무 강해서 어쩔수없이
순서를 깨고 우리가 먼저 분가를 하는 과정이 순탄치 못했고 미움을 받아 재산도 제대로 얻어 나오지 못했다
사과 상자 1개에 결혼 선물로 받은 알미늄 냄비 1개 . 부모님이 주신 백철 솥 1개 놋그릇 1불. 사기그릇 1불. 3살짜리 아들 놋그릇 1개 그게 전부 였다.
그사과 상자를 눕혀 놓고 10년 넘게 찬장으로 사용 했다
아침을 먹으려니 아들 숫가락이 없다
아내가 눈물을 글성 이며 큰집에 가서 슷가락 하나를 얻어 와서 첫 아침을 먹를수 있었다.
부모님은 연로 하시고 세쩨형 내외분이 살림을 주관 하고 있었는데 형수님이 섭섭 하게 한샘이다..
부모님 계획데로 라면
이제부터 사들이는 부동산을 전부 내 이름으로 등기 하게 되어 있었는데 순서를 어기고 분가를 함으로 해서 모든것을 상실 하게 되었다.
개업하고 5년 제대하고 분가 독립 할때 까지 5년 10년 간 가업에 종사 하고
분가 하고도 처음은 내집에서 자고먹고 일을 큰집에서 하면서 보수 없이 몇년 ---
건축 유리로 구멍가게를 열었으나 수요가 없어 개업과 동시에 휴업 상태라 할일도 없고 큰집에 큰일 있을 때마다 가서 도와 드렸다
밥때가 되어도 아무도 밥먹고 가라는 말이 없다
나도 말없이 손만 싰고 내 집에 와서 식사를 했다.
부모님 형님 내외 모두가 내가 질서를 어긴 것이 몹시 섭섭 하셨나 보다.
35세가 되도록 일거리가 없어 허송세월하는 동안 장모님이 가끔식 주시는 간장, 양념, 참기름이 큰보탬이 되었다
보리밥에 밀밥에 간장,된장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
명절에 처가에 가서 몇일 얻어먹고 오면
집에 연탄 무더기가 줄지 않고 곡식 자루에 곡식이 줄지 않고 있는것 얼마나 신통한지 ! !
코앞에 사시는 부모님은 부자이지만 한번도 얻으러 가본적 없고
형과 형수님도 아무것도 나누어 준적 없었다
큰집 밭에는 넘처 나는 채소를 얻어 먹자는 아내 와 반대 하는 나는 많이도 다투었다
의타심이 생길까 하여 전혀 손벌리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3년이 지나니 손익 분기점이 왔다
둘쩨가 태어나고 셋쩨가 태어나고 백일에 돐이 지나도 아버님 어머님 형님 형수님 그 누구도 나의 집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고아 아닌 고아처럼 살아 온 샘이다.
어머님이 먼저 돌아 가시고 아버님은 혼자가 되셨다
아버님은 손아래 동생 내외와 같이 생활 하셨는데
정신도 몸도 다건강 하셨는데 생각지도 않은 병이 와서 많이 쇄약해 지셨다
그때 나는 형편이 많이 좋아저서 6남 1녀중 제일 먼저 자가용을 마련 하게 되었고
자가용으로 아버님 통원 치료도 하고 가끔은 드라이브도 해드렸다
아버님이 병이 오기전에
상속말이 나오든 때라 나는 아버님을 여러번 찾아 뵈었다
형제간의 잘살고 못사는 차이가 적어 형편이 비슷해야 우애도 있고 정도 난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둘쩨형은 조카들도 많고 수입이 변변치 못하니 더봐주고 여동생 하나 있는것 출가외인 이라고 재산도 않주셨으니 좀줘야 하고. 손아래 동생. 막내동생도 더봐주실것을 아버님께 건의를 드리기 위하여 여러번 찾아 뵈었다
아버님이 타계하시는 시점에 만족 하지는 않드라도 어느정도 생활 정도를 반투어야 할것 같아 간곡히 말씀드렸다.
저는 않줘도 괜찮습니다.
하면서 말씀드렸다
내것을 챙기면서 누굴 더주세요 주지 마세요 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막내 동생과.부산 여동생은 현금으로 상당히 배려 하셨다고 들었다
손아래 동생도 상당히 배려 하셨다고 들었다
특히 손아래 동생은 버스정유소 옆이라 집안 사람들 내왕이 많을 것을 감안 손님 대접 잘하라고 별도로 현금을 더주셨다고 하셨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이일로 나는 내 아내와 많이 다투었다
당신은 주워온 자식인가
왜 부모님 재산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이집안을 다시 이르키는데 일등 공신이라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재산을 받지 못하느냐고 한다
아내 말이 맞는 말이다
그러니 할말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먹고 살만 하지 않았느냐
그말이 통할리 없는줄 나도 안다.
그러나 할말이 없으니...........
사실 큰형님은 신축한 새집으로 두번식이나 살림을 나셨다
빗잔치도 여러번 해주셨고
장남인 큰형님은 이미 많은 것을 받고 쓰셨지만 장남으로 집안 대소사를 잘하시라고 제일 많은 재산을 또 물려 주셨다
복이 많은 분이시다.
학산동에 과수원 2.400평을 제게 주시려는 것을 두쩨 형님께 주세요 하니까
두쩨 형님을 대려 오라 하시고
그럼 너히 둘이서 나누어 갖어라 하시는것을
둘쩨 형님 앞에서 아버님께 말씀 드려 둘쩨 형님께 전부를 양보 했다
세쩨 형님은 집안이 한창 이러날때 사들이는 모든 부동산을 세쩨형님 이름으로 등기 했기 때문에 재산이 많다.
상대적으로 여동생 막내동생이 빈약헀다
아버님 말씀이 모든 형제가 대학을 못해도 막내는 대학까지 시켰고
중앙 감사원 4급공무원을 하고 있고 또먹고 살만치 해줬으니 더 줄 필요가 없다고 핬셨다
그래도 아버님 생전에 직접 더주세요 라고 말씀 들인것이다.
내가 제대로 상속 받지 못하면서 노력한 결과에 대하여 조금도 후회 하지 않고 지금도 잘한 일이라 생각 한다
다만 내가 무슨 대우를 받고 인사를 듣자고 한일은 아니지만
오늘날 잘먹고 잘살수 있는 것이 누구로 인해서 이루어 젔는 지도 모르고 나의 말을 무시 하고 제잘난듯 떠들어 대는 꼴이 못네 섭섭할 뿐이다.
그나마 아버님께서 내위로 세분 형님들을 제처두고 나에게 집안의 중요한 대소사를 의논해 주셨든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내가 우리 집안의 진로를 바꾸지 않고 아버님 하시는 데로 매년 토지를 팔아 생활비로 매꾸는 적자 농사만 해왔다면
논 11마지기가 와 재산이 아버님이 돌아 가실즈음 까지 30년 동안에 얼마나 남았겠는가
6남 1녀가 상속 받는 다면 한사람에게 무엇을 얼마를 줄수 있었을 것인가
농사에서 장사로 진로를 바꿈으로 해서 오늘날 성주 박씨 문중이 존재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진로의 그키를 잡었든 것이다.
재테크의 비결
당시 아버님 부동산 재테크 방식은 값싸고 평수가 큰것으로 하셨다..
짧은 기간에 어떻게 큰 재산을 모았을까 재테크의 비결이 있었다
첫쩨는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고
두쩨는 논에서 일년간 수익이 논값에 3~5%였다
일년간 상점에서 나온 이익금을 더하여 80% 자금만 되면 3마지기
다음해는 5~6 마지기
그다믐해는 8~9 마지기
가능 했든 이유가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논의 마지기가 많아 질수록 더많은 부가 빨리 축적 되었다
그모든 자금의 예측을 계산 해서 아버님께 자료를 말씀 드리는 것이 내가 하는 일중의 하나였다
그때 내나이 20대 초반이였다
집을 살것인지 전답을 살것인지 대지를 갈것인지는 나는 건의만 했을뿐 최종 결정은 아버님이 하셨다
부가 쌓이기 시작하고 소문이 나기 시작 하니 급하게 팔고자 하는 물건이 인근에서 아버님께로 몰려와서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고 그가운데에서 선택적으로 유리한 부동산을 살수 있었다
나는 논 1.100평을 외상으로 팔아 계약금으로 널판지에다 개업을 했다 (논의 위치가 아주 좋지 않아 팔수가 없었다)
내가 분가 독립하여 종자돈이 생기고 부터 나의 재테크도 역시 아버님과 유사한 방법이었다
돈만 생기면 무조건 부동산을 취득 했다
장사만 해서 짧은 기간에 어떻게 많은 돈을 모을수 있었겠나
나는 대지 60평의 집으로 분가를 했는데
뒷날 도로 편입으로 대지가 많이 들어가 내가 재건축 할때12평 점포와 9.5평의 대지 합계 21.5평을 더 사 넣었는데도 지금도 60평 밖에 않된다 결과적으로 38.5평에 분가 한샘이 되었다 (현실과 실평이 맞지 않아 공사기간 뿐 아니고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지적도 불합치에다, 옛날에는 보상도 제대로 못받고 도로로 편입 되었다
불효
아버님께 불효한것은 당신이 부자이시니 용돈은 아예 드릴 생각 조차 못했다
내돈과 자식이 주는 용돈이 주는 기쁨은 하늘과 땅차이 란것을 몰랐고 주위에서 누군가가 귀띰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노인이 되서야 깨달았다.
우리 아버님
한마디로 기억력은 컴퓨타에다 천제 셨다
되(升)글로 배워 말(斗)글로 쓰는 사람도 있고 말글로 배워 되글로도 못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사람의 융통성과 됨됨이를 늘~강조 하셨다
아버님은 가난한 집안에 두쩨로 태어 나시어.
서당에 소학교도 다니지 못하셨다
어린 소년시절 부터 갖은 고생 다하시며
피나는 노력으로 자수성가 하시어 온집안의 기둥 역활을 하셨다
지차로서 큰집 살림도 살고 동생들 모두 교육 시켜 결혼 분가 독립시켜 생활 기반 까지 마련해 주셨다
네집 다섯집 살림을 도맡아 하신 샘이다
큰집 동생들 처남들 까지.....
가난하여 소학교도 서당에도 못다니셨으면서
한문은 당시 대학생 보다 더많이 아셨고
일어는 일본사람 진배 없이 말하고 쓰셨다
76년전 일제 치하에서 연초 소매인 성주군 대표로 일본 시찰 여행도 다녀 오셨다
경성 조선 박람회도 다녀오셨고
하래 하 하는식의 언문 소설을 읽으시든 분이 해방이 되자 바로 우리가 학교에서 쓰는 한글 표준 문법을 그대로 쓰셨다
옛날 농경 사회에서 부자는 주위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버님은 예외였다 아버님은 이지역 어느 곳에서도 칭송 받는 어른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셨다.
나는 분가 하여 먹고 살기 위해 성주군내 곳곳을 돌아 다니면서 일을 했다
가는 곳마다 아버님 칭송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더러는 나를 알아 보시고 아무게 자제가 아닌가 하시면서 후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더러 있어
어려움속에서도 많은 용기를 얻었다
5.16 이후에는 가정의례 준측및 관혼상제 간소화 정책에 따라 성주군 자문위원으로 활동 하셨고
솔선 하여 한동안 양력 설을 세기도 하셨다
양력 음력 이중과세로 인한 여러모로 낭비가 많아 정부가 단일 과세를 장려 하든 때였다
결혼 청첩장을 너도나도 남발 하든 시절에
형제들 결혼 청첩장을 대폭 줄여 꼭해야 할자리와 친인척에게만 돌리셨다.
위로 형님들이 아버님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했으니
자식 자랑하는 동네 사람들 속에서는 당신이 기가 죽을수 밖에 없었으리라 생각 했다
효도 하는 길은 나만 이라도 잘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이라 생각 했었다
피나는 노력과 검소한 생활로 이를 악물고 살았다
어렵고 힘들때 마다 아버님이 걸어 오신 젊은 시절의 고난을 생각 하며 용기를 얻었고
아버님 처럼 살려고 노력 했다,
한평생 살아 오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삶의 지혜는 80~90%를 아버님으로 부터 산교육으로 듣고 배운 지식이다
내평생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아버님 이시다.
용돈 드리지 못한것이 두고두고 죄송스럽고 후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