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처음으로 '디카'라는 물건을 장만했다. 내 역마살을 익히 알고 있는 친구들이 여름 휴가 어디로 가냐고 물으면 난 말로 설명하고 친구는 종이에 받아 적었었다. 가령 인월 톨게이트와 차부 사이 길모퉁이에서 파는 옥수수가 진짜 맛있으니 지나치지마라. 보성 읍내 실비 식당에 가면 그중에 뭐가 맛있었고 어디는 꽝이고..제발 말로만 말고 사진까지 올려다오. 얼마 하지도 않는다. 형편 안되면 추렴해서 디카 한대 선물하마.
결국 친구들이 모델을 정하고, 컴퓨터에 프로그램 깔아주며 공갈, 회유, 읍소에 못이겨 장만하게 된 디카였다. 캐논 익서스2, 성능 가격 그런거 모른다. 청바지 뒷주머니, 남방 윗주머니, 순전히 아무 곳에나 들어가는, 손목에 걸고 다니면 딱인 크기 때문에 선택했다.
택배로 디카를 받고 들고 처음 간 곳이 순흥, 작동법을 몰라 찍은 16장의 사진중 남은 것이 꼴랑 두장, 부석사 무량수전과 성혈사 나한전 창살이다. 역도선수같은 근육질의 사과나무 고목들이 제멋대로 힘자랑을 하고, 저절로 손이 가는 빨간 사과가 길가에 주렁주렁 달린, 달구지가 다니면 때 좋을듯한 오솔길. 부석사 여행의 마침표는 언제나 성혈사였다. 그 호젓함에, 목수의 지극함에 반해서...
너도바람: 순흥의 가을! 성혈사, 부석사. 에고 모르것소. 담부터 잘 할테니 누구 사진 크기 좀 줄여주오.
친구1: 고쳤는디, 크기가 맘에 차시옵는지. 으~~~ 부석사 가고싶어 몸살 날것같다
친구2: 가을 햇살이 정말 따사롭게 느껴진다. 두 사진 모두 햇살을 찍은 거 같다.
친구3: 궁금. 성혈사 문은 마름모꼴 창살 위에 꽃이랑, 잎이랑, 새랑 깎아서 붙인건가? 그렇담 어찌 그리 오래 붙어있을까?
너도바람: 증말 물리 티 난다.난 창살이 참 아름답구나, 개구리도 있네 그런 생각만 했는데. 깍아 붙인건가 통째로 조각한건가 그거이 왜 궁금한 걸까. 호기심이 없으면 인류문명의 발전이 없나
친구1: 정말 사람들은 서로 다른가보다. 난 무량수전이 누구 글씨인지, 배흘림기둥이 어느 건지, 통째로 깎았는지 깎아서 붙였는지 고런 건 하나도 안 들어온다. 첨 느낀게 가을햇살, 다음이 그런 햇살을 보면서 사는 고즈녁한 삶, 그리고 그 가운데서만 느낄 수 있는 되돌아보는 나. 언제나 결국 나, 관심의 대상인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다.
친구3: 잘못했슈. 전 문짝 두개 보고 저 많은 걸 생각하는 선배의 눈이 부러워요.
친구2: 난 딱 보는 순간 기둥에 등대고 털퍼덕 앉아 따신 햇살 받으며 한잔 했으면 하는 생각 밖에 안나던디요....
연꽃, 연밥, 꽃봉우리, 연잎 위의 동자승과 개구리, 게, 가재, 물고기, 소라, 두루미, 용, 물고기를 입에 문 물총새가 아닌 나무의 부분을 떼어냈으리라. 한송이 연꽃이 피어날 때마다 나무를 만지던 목수의 손길이 내게 전해진다. 나뭇결 속에 본래부터 존재하던 바다 속, 땅 위, 허공의 뭇 생명체의 생명력을 되살려 낸 것은 목수의 지극한 마음이었으리라. 나무를 다듬는 목수의 손길로 성냄, 어리석음, 욕심을 떼어내면 본래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숨은 그림 찾기 : 물고기를 물고 있는 물총새, 연못에서 어슬렁 거리 두루미, 연잎 위에서 노 젓는 동자, 개구리, 가재, 게, 용, 용의 발톱, 자라, 소라, 물고기, 연꽃 봉우리, 만개한 연꽃, 연밥, 나비, 모란 위의 물총새 그 밖의 것들....
첫댓글 ㅎㅎ~
너도바람님 덕분으로 예 앉아서 눈 호강 했구먼유..
눈으로 보는디 손으로 만지고 있는것도 같구...ㅎ
덕분에 귀경 잘 했어유^^*
아..꾸살리님도 전통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은가봐요~*
그 고고학적이고 미적인 안목에 두 손을 모읍니다..ㅎ
@신상용 저도 덕분에 다시 구경하는것 같아 즐거운 작업입니다.
참 마이도 싸돌아댕겼구나 스스로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디카 처음으로 구입한 시기가 저하고 비슷하네요..ㅎ
그때가 2003년 가을, 두 번째로 인도 여행을 떠나던
시기였었는데..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어째든 선우님의 디카 덕분으로 저의 미적인 안목이 높아짐에 감사드립니다..ㅎ
절에 수 없이 다녔어도 유심히 볼 수 없었던
전통적인 아름다움.. 선우님의 눈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 같아요..^^
그대로 사라져 버렸을 시간들이 기록 덕분에 살아남아 이렇게 또 쓰임새가 있네요. 고마운 일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