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역사의 산증인 김구 선생 손녀 김효자 金孝子
김구 선생은 환국 후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서 탈장 수술을 받는다. 김구 선생이 성모병원을 찾게 된 건 며느리인 안미생(안수산나)의 간곡한 권유 때문. 안미생은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의 조카딸. 안중근 동생 안정근(치릴로, 1885~1949)의 차녀인 그는 김구 선생의 장남 김인(1917∼1945)과 결혼했다. 김구와 안중근 집안이 사돈이 된 것이다. 도마 안중근 가문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기에, 안미생도 평소 존경하던 박 원장을 시아버지 김구에게 소개한 것이다.
김구 선생과 박 원장의 인연은 퇴원 후에도 이어진다. 박 원장은 경교장(김구의 사저)을 찾아가 김구 선생을 진찰하고, 그를 천주교에 입교시키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둘의 각별한 연결고리는 김구의 손녀 김효자(金孝子)다. 김구 선생은 1947년 당시 미국에 머물던 며느리 안미생을 대신해 어린 손녀를 돌본다. 박 원장은 그런 김구와 어린 손녀를 보고, 자신이 김효자를 데려다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박 원장이 자신의 집에 또래 아이들도 있다고 전하자 김구 선생은 이를 허락했다. 박 원장은 김효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머니 안미생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친딸처럼 돌봤다.
안미생은 남편 김인의 죽음에 비통해 했고 페니실린을 구해주지 않은 시아버지 김구에 대한 원망이 컸음이라.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나라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고 남편 사이에서 얻은 김효자 역시 이 땅에 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박 원장은 김구 선생이 서거할 때에도 곁에 머물렀다. 박 원장은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총격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교장으로 달려가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응급조치를 했다. 또 박 원장은 직접 김구 선생이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박 원장은 천주교식으로 염습(殮襲)하며 김구 선생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줬다.
백범 김구 선생이 손녀딸 김효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손녀의 모습에서 아들 김인을 보았음이라.
조금만 독하게 마음 먹으면 아들도 살릴 수 있었는데 아들의 죽음이 백범 자신의 엄격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며느리 안미생에게도 할 말이 없다. 안중근은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또를 척살하고 소천했다. 안중근 가족과 사돈을 맞게 되었는데 며느리자 안중근의 조카딸에게도 면목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