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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
함석헌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태복음, 3:1~4)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이사야, 40:3~5)
현대인의 특색은 소위 문제를 많이 가지는데 있다. 무슨 문제가 그리 많은지, 국가 대신으로부터 항촌필부(巷村匹夫)에 이르기까지 그 문제의 해결에만 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해결하노라고 하여도 또 오고 또 오고하는 문제다. ‘생활’이란 미처 생각해볼 겨를도 없고 그저 그 문제를 해결하려 머리를 쓰고 맘을 쓰고 애를 쓰고 손발을 쓰는 동안에 인생이 지나가고 시대가 지나가고 만다. 그러면 그러한 우리 현대인의 소원이 무엇일까. 그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노라고 좁다란 이 가슴을 항상 뭇 영의 싸움터로 내맡기고 한숨만을 쉬고 있는 이 우리 개인들의 제일 긴한 소원은 무엇이며, 6,7월 그믐밤에 쏟아 붓는 폭풍우 밑에 내여놓인 벌판처럼 자기 자신을 동란 속에 드러내놓고 있는 이 사회 이 세상의 정말로 바랄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있으면 족히 우리 가슴 속에서 그 아픔, 슬픔, 의심, 두려움을 주는 모든 문제를 제해버릴 수가 있고, 이 세상을 어둠과 더러움과 불안과 파괴에서 건질 수 있을까. 그런 어떤 무엇이 있기는 한가. 여기 대한 세상의 모든 지자의 노력이 무용한 것인 것은 현대의 세상 그 자체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산 교훈을 쉬지 않고 부르짖어 오는 것은 성서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사야, 40:5)
이것은 2천 7백 년 전에 이사야가 고민하는 이스라엘의 맘을 향하여 외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늘날도 여전히 살아 있다. 과연 모든 문제의 원인은 여호와의 얼굴이 가리어진 데 있는 것이요, 그 영광의 얼굴이 나타나는 날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 소원은 하나님이 그 영광의 얼굴 그대로 우리 이 더러운 땅에 나타나시는 일이다.
우리는 잃어진 진주를 찾노라고 밤새도록 더듬어 헤매는 자들이다. 혹은 찾는다기보다도 잃고서 낙심하여 미쳐 울부짖는 자라 할 수도 있다. 하는 말이 서로 통일이 없고 하는 일이 서로 연락이 없다. 혹 발걸음을 같이하다가 서로 걸려 넘어가기도 하고 혹 손을 일시 잡았다가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먼동이 환하게 틀 때는 어떠할까. “바로 여기 있는 것을 모르고 밤새껏 그랬네” 하고 모든 손이 한데 합하여 높이 드는 진주를 가운데 우러러보고 이때껏의 일을 다 버리고 다 잊고 기쁨으로 웃을 것 아닌가. 그때는 다른 아무것도 있을 것 없고 오직 첫 광선으로 빛나는 구슬만이 한가운데 있을 것 아닌가.
우리 살림도 그와 같다. 문화인이로라는 현대 사람의 모양을 보면 머리는 머리대로 가슴은 가슴대로 배는 배대로 손발은 각각 손과 발대로 제가끔이어서 본능과 이성이 충돌이 되고 감정과 의지가 서로 마주 서고 지식과 신앙이 서로 반대되며 정치와 도덕, 경제와 종교, 예술과 철학 하는 격으로 온갖 활동이 그 개개로는 쓸 만한 것이 없는 것 아니건만 제가끔 제대로인 고로 일곱 귀신이 들린 막달라 마리아 모양으로 그 중간에서 가엾은 영혼만 얼굴이 헤멀끔해지고 만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일은 전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맘속의 왕좌에 하나님이 그 영광으로 임하실 때에 거기 어둠이 있을 리 없고 충돌이 있을 리 없고 모순이 있을 리 없다. 있기야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이 있을 것이나 모든 것은 이미 제대로가 아니요 가운데서 사방으로 방사되는 무한한 영광중에 녹아들어 영혼의 산 통일을 이룰 것이다. 고로 거기는 자지 못하는 밤이 있을 리 없고 거하지 못할 세상이 있을 리 없다.
우리는 모진 폭풍 밑에 온 밤을 시달리는 자들이다.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부러지고 밑동까지 뒤흔들려 뿌리조차 빠질 듯하며 왼 들판이 다 바다 속에 들어갈 듯하다. 그러나 한번 아침 해가 올라와 검은 구름을 몰아내고 빛나는 광선을 만물 위에 던질 때 어떠할까. 땅에는 떨어진 늙은 잎새가 흩어졌을망정 일점 티끌 없는 공중에는 푸른 하늘이 더욱 푸를 터이요, 진주의 눈물을 머금은 새싹에서는 생명의 새로운 자람이 향기를 발하며 분주히 나올 것이다. 우리의 세상도 그럴 것 아닐까.
인류의 자랑이라고 쌓아놓았던 문화의 탑들이 하루아침 광풍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질서정연한 듯하던 모든 조직이 일순간에 탁류 속에 들어가 버릴 때 사람들은 문명의 힘이란 이런 것이냐고 실색할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그 영광으로 나타나신다면 어떠할까. 그가 그 절대 정의의 얼굴로 나타나시며 그 절대애(愛)의 얼굴로 나타나실 때에 세상은 일변할 수밖에 없다. 거기 개인 도덕과 단체 도덕의 다름이 있을 리 없고,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따로 있을 리 없고, 계급과 계급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서로 어긋남이 있을 리 없다. 고로 거기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거기는 다시 피를 흘려 제사함이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오직 하나다. 소원이란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한 것은 소원으로서 분명히 옳은 소원이다. 그저 그것이면 족하다. 자살을 하려는 자가 있는가. 그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세상을 위해 분을 참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반목하는 계급 간에 하나님이 나선다고 생각하여보라. 대립하는 두 전선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상상하여보라. 독한 술에 정신없이 취한자의 면전에, 음부의 침상에, 사회의 하수도에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림없이 나타났다고 하여보라, 어떤 일이 일어날 듯한가.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그저 하나님의 얼굴이 감추인 데 있다. 이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역사의 한 표본적인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 진영 안에 나타날 때 저들은 이겼고, 거기서 사라질 때 패하였다. 고로 그들의 시인은 환난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 얼굴을 가리지 말라고 애원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긴한 문제는 오직 하나님이 그 영광을 드러내시어 우리 모든 눈이 함께 보는 것인데, 그런데 사실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영광은 지구 어느 구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분명히 현대인에 대하여 그 얼굴을 가리셨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상이 이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는 조선에서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도들은 이 위에 말한 빌립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인용하여가지고, 이러한 말을 불신이라고 비난할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예수는 아버지를 그대로 드러내신 이요 그를 본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에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나타나셨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사람은 예수를 보았나, 보고 있는가. 역사상에 이미 왔고 그 기록을 보는 것만으로는 예수를 보았다 할 수는 없다. 문을 닫고 자는 자에게 낮이 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해가 낮 배가 되었어도 내가 덧문을 닫고 자면 나는 역시 밤의 사람이요 낮의 사람이 아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는 분명 오셨다. 그러나 그가 오늘 우리 맘에 오시지 않을 한 그는 오시지 않았으나 마찬가지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게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 안에도 수십만 기독교도가 있다. 교회는 주일마다 예배 저녁마다 종을 울리고 풍금을 울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정말 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目覩)한 사람들인가. 정말 주를 보았다면 어찌 그리 세상이 답답하기만 한가. 어찌 그리 사람들이 구차하기만 한가. 어찌 그리 비루하기만 하고 교활 하기만 하고 음랭하기만 하고 무생기하기만 한가. 아침 해가 올라왔다면 왜 그리 컴컴할까. 새벽바람이 분다면 왜 그리 숨이 답답할까. 뇌우가 다 쫓겨갔다면 왜 그리 더러울까. 따뜻한 별이 났다면 왜 그리 새싹이 아니 나올까. 정말 영혼을 소성케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얼굴이 환하게 나타났다면 인심이 이대로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 중에 어떤 자의 얼굴에는 다소의 광채가 없는 것 아니요, 어떤 자의 말에는 얼마쯤의 맑은 힘이 들어 있지 않은 것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직 영광을 직시하였다 할 수는 없다. 역시 막힌 것이 있고 가린 데가 있고 부자유한 것이 있고 꺼리는 것이 있다. 그들은 닭의 우는 소리를 듣고, 혹은 어떤 직감에 의하여 낮이 온 것을 알았을는지 모르고 문틈으로 새는 반사광선쯤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직감이나 들은 것은 어디까지 직감이나 들음에 멈출 뿐이요 본 것이 아니며, 반사는 어디까지 반사일 뿐이요 직사가 아니다. 우리가 솔직히 고백한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그 직선사광(直線射光)을 직시하지 못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한 자는 그 순간에 영혼 안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변질을 하여버린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본 후의 모세는 보기 전의 모세와 한가지 사람이 아니었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본 이후의 바울은 그전의 사울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다 일개 순간을 가진다. 사망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생명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건너뛰는 일순간이다. 우리는 정말 그 순간을 가졌는가. 우리는 과연 확신을 가지고 “사망아 네 쏘는 권세가 어디 있느냐” 할 수가 있는가. 그런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그런 실력이 있는가. 있다면 우리 살림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왜 우리 눈에 뵈지 않느냐. 이미 예수가 왜 우리 마음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느냐. 왜 그가 아직까지 문밖에 서서 혹은 저 먼 딴 세계 밖에 서서 우리를 향하여 손짓만을 하고 머뭇거리고 있느냐. 그가 우리를 버려서 그런가. 피하여서 그러시나. 물론 아니다. 그의 편에서는 들어오지 않을 아무 이유가 없다. 문제는 우리게 있다. 그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 40:3)
영광의 왕 저는 그의 길이 없이는 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애인은 담을 넘어 침입하지는 않는다. 그 사랑하는 자가 깨어 문을 열어 맞을 때까지 담밖에 귀를 대고 기다린다. 주는 강도처럼 문을 넘어 양심 안에 돌입하지는 않는다. 어린 나귀를 타는 이 순결하고 온유하고 평화로운 왕은 진실한 양심이 종려가지를 펴서 길을 열어놓은 후에야 그 전(殿)에 오르신다. 고로 그 길을 닦지 않고 저를 오시라 하는 것은 저를 억지하는 일이요 모욕하는 일이고 괴롭게 하는 일이다. 그의 길을 예비하지 않고 그의 임하시기를 기다리는 우리는 분명히 잘못이다.
혹은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믿지 않느냐고,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으냐고. 과연 우리는 믿는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우리 구주로 믿는다. 그러나 정말 믿었나. 그는 말하기를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나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를 세상에 보내면서 하나님의 한 말씀이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사야, 40:4)
하였다. 이대로 우리는 하였는가. 주의 길은 직선이다. 일직선이요 조금도 굽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태양광선이 직선으로만 진행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영광도 직선으로만 비친다. 지구의 백만 배나 되는 태양으로도 한 터럭만 가로막아도 그것을 돌지 못하여 그림자가 진다. 전능한 하나님으로도 곡선로만은 가실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이다. 저가 만일 그 영광의 광선을 꾸부린다면 어떤 일부에는 편의(便宜)할는지 모르나 온 우주를 두루 비추는 절대의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점령되기를 허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자기와의 사이에 직선을 예비하기를 명한다. 두 점간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직선로가 열려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우리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 맘에 있는 모든 교만의 뫼뿌리는 낮아지지 않으면 안 되고 모든 우울의 골짜기는 메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요철, 모든 이기적 죄악의 음험한 것을 다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일직선으로 그의 길을 열어야 하며 사막(沙漠) 같은 우리 양심에 그의 큰 길을 열어야 한다.
신앙은 쉽다는 사람은 누군가. 이런 모든 것은 그대로 두고 교회명부에 이름이 오른 것으로 신자가 다된 줄 아는 사람은 누군가. 신구약성서 한 권을 사들기만 하면 예수를 안 줄로 아는 사람은 누군가. 두세 번의 자선사(慈善事)를 행하고 천국백성인 줄 자신하는 사람은 누구며 하루에 몇 번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했노라는 사람은 누군가. 네 맘속에는 오히려 전면에서는 볼 수 없는 숨은 데가 있지 않으며 음영이 있지 않나. 그 음울한 그늘 밑에서 네 양심은 광선 부족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나. 그 때문에 외계의 풍파를 무서워하지 않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예수가 네 맘 안에 들어왔다면 네 앞가슴에서 뒷가슴까지 휑하게 뚫린 구멍이 있어야 할 것이다. 네 맘속에는 과연 곡로(曲路)가 없는가. 암거(暗渠)가 없는가. 참호(塹濠)가 없는가. 크리크가 없는가. 비밀사진을 너 혼자만 보는 암실이 과연 없는가. 너는 네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였는가. 이들 문사(問辭)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저를 위하여 또 조선을 위하여 감투(感淚)로써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이다.
하나님이 직선을 행하시는 대신에 사람은 곡선을 좋아한다. 인간이 지혜가 자란다 함은 곡선을 잘 만든단 말이요 세상이 발달한다는 것은 사회에 곡선과 복선이 많아진다 함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공명정대하신 고로 직선 위에 자기 의를 드러내고 따라서 진리란 것은 솔직간명 한 것인데 사람은 완곡을 미덕이라 하고 수식을 복잡하게 하는 것을 유능하다 한다. 그 종교는 얼마나 의식을 요구하며 그 철학은 얼마나 난삽(難澁)을 자랑하며 그 예술은 얼마나 무용한 장식을 좋아하나, 그리고 그 교육은 얼마나 수완 있는 인물의 양성을 목적하며 그 정치는 얼마나 책략이 많은가.
그런 고로 혹 가다가 하나님에게 직히 접하기를 힘쓰는 자 있으면 저를 우직하다 하며 편협하다 하고 그를 가리켜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 하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교회주의자라 한다. 저의 원하는 바가 어찌 현실 무시에 있고 인간 몰각(沒却)에 있을까. 저는 다만 될 수 있기만 하면 하나님과 둘 사이에 직선로를 열어보자고 애쓰는 자다. 벗은 몸으로 신 앞에 서보자는 자다. 저는 수직을 위하여 평면을 생각하기를 결을하지 못하는 자다. 언제든지 지상에 살고 싶은 사람들은 혹 좌경 혹 우경이 문제될는지 모르지마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는 그들은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고로 저들은 수직을 중요시한다. 평면을 중요시하는 인간의 사회는 좌우로 운동한다. 고로 역사는 진자운동의 과정을 밟는다. 그 안에 약간의 이상주의자가 있지 않았다면 역사는 영원히 동일 경로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간에 하나님에게 그 줄을 매는 소수자가 있어서 지지(遲遲)한 지자행로(之字行路)나마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직선운동자는 항상 그 몸을 위험한데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타협을 모르고 혼합을 싫어하는 그들은 현실주의자의 눈에는 항상 인간을 무시하는 자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산을 올라가는 때는 직상하는 자를 용사라 하며 칠절팔절(七折八折)의 완행로를 취하는 자는 약자요 겁자(怯者)라 하는데 도덕과 신앙에 있어서만은 직행 하는 자는 가증한 자라 한다!
예수의 생활원리는 직선적이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직선으로 연락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자기를 이 직선에 합하는 일이다. 고로 사람은 자기 안에 이 천래(天來)의 직선광이 걸림 없이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곡선을 좋아하는 본래의 성질이 근본에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회개다. 세례 요한이 온 것은 이 난공사 때문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3:2)
라고 그는 외쳤다. 그리고 그것 없이 복음을 안가(安價)로 얻으러 오는 자를 향하여 “독사의 종류”라고 노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자라는 사람은 요한을 오해한다. “천국에서는 지극히 적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니라” 한 예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 취하여 가지고 스스로는 요한 위에 선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을 정죄할 자는 도리어 요한이다. 저들은 그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더지의 구멍 같은 꼬부라진 길이 가슴 속에 뒤서리어 있는 현대인을 보고 요한은 오히려 외친다 “독사의 종류들아” 하고.
우선 요한에게 배우라. 저는 한갓 요부의 독수에 죽기 위하여 온 사람이 아니었다. 네 가슴 안에 하나님이 오시는 직선로를 예비하기 위하여 왔던 것이다. 고로 문화의 도시의 꼬부라진 길을 버리고 요단 강가에 직행로를 만들고 그 털옷 입은 교사에게 나가라. 그리하여 모든 옷을 다 벗고 요단강에 뛰어들라. 그리한 뒤에 주는 네 맘에 오시고 네 집에 오시고 네 나라에 오실 것이다.
성서조선 1939.3 122호
저작집30;18-279
전집20;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