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하원시킨 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트에 머물고 있었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을 넘겼지만, 집에 들어서는 즉시 해야 할 일들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다. 배 속의 8개월 차 아이, 24개월 아이와 가지런하게 정돈된 마트 진열대를 무거운 발을 끌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잉...지잉...’
엄마였다. 이불이 무거워 덮기 힘들다는 아빠를 위해 백화점에서 가장 가벼운 이불을 사다 드리고 돌아온 직후였는데.
엄마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아빠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어.”
“연락하고 지금 갈게.”
연락한다고는 했지만, 어디로 연락해야 하지. 병원? 119? 떨리는 손으로 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다이얼 패드를 누르기도 전에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구급차가 올 거야. 강남 성모병원으로 와.”
이날을 위해 3달 전부터 준비했다. 원활한 호스피스 병동 입원을 위해 2달 전에 2박 3일 동안 사전 입원도 해둔 터였으니, 목적지는 분명했다. 아빠가 스스로 걸어 입원했던 때와 달리, 구급차를 타고 들 것에 실려 긴박하게 병원으로 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2005년 위암, 2008년 대장암, 2015년 췌장암이 아빠의 몸에 머물렀다. 병문안 온 이들은 큰일이 난 듯 어두운 낯빛으로 생과 사를 이야기했다. 위로인지, 악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염려의 말 속에 아빠의 죽음을 가정한 단어는 작고 예리한 유리 조각처럼 빛났다.
위암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는 말했다. 아빠와 함께 수술받은 10명 중 9명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살아남은 유일한 1명이라고. 90%의 확률로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왔었지만, 실감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끊김 없이 이어질 생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죽음을 떠올릴 때도 죽음을 전제하지 않았다. 아빠가 ‘죽는다면’이 아닌, ‘건강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12년 동안 3차례의 암이 아빠의 몸을 휩쓸고 황폐하게 만들었을 때도, 항암치료 중단을 결정하고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죽는다.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치료를 중단하자, 약기운으로 억누르고 있던 암세포가 급격한 증식을 시작했다.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해지자 체중 감량이 일어났고, 도움 없이는 스스로 거동조차 힘들어졌다. 아빠의 몸은 점점 작아져 갔다. 건장했던 80kg의 몸이 36kg에 이르렀다.
아빠를 돌보는 일은 엄마의 몫이 되었고 활동 보조인이 되어 밀착 생활을 했다. 환자를 돌보다 환자가 될 것 같은 엄마를 보다 못해 말했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아빠가 너무 오래 살면 안 되겠어. 어차피 갈 거라면 빨리 가는 게 낫겠어.“
”아파서 누워 있어도 같이 있을 때가 좋은 거라고 하더라.“
엄마는 자신의 힘듦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빠의 연명을 바랐다. 배 속의 아이와 만 두 살 된 아이를 돌보느라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지만, 아빠의 죽음을 바란 건 오히려 나였다. 12년의 긴 투병 기간에도 아빠의 죽음을 그려본 적 없었는데, 어쩌자고 이런 말을 했던 걸까.
아빠의 언제 끊길지 모르는 가느다란 삶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힘들어서, 엄마를 위한다는 알량한 이유로, 엄마마저 잃고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출산과 장례식이 겹치면 엄마 혼자 상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아빠의 죽음을 떠올렸다.
타인의 말에서 날카로운 조각을 찾아내 마음에 상처 냈으면서, 가장 크고 예리한 조각을 만들어냈다.
바람대로 아빠는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어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의외로 길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시작될 무렵, 아빠는 입원한 지 만 2일 되던 날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난 죽음을 끝, 고통의 종료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꺼져가는 생을 바라보는 일과 그 생에 매달리며 무너지는 일상이 버거워서 차라리 끝나 버리면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바랐던 건 정말 아빠의 죽음이었을까. 가족의 죽음이 종료가 아닌 새로운 고통의 시작임을 알았더라도 아빠의 죽음을 바랐을까.
떠나는 아빠가 가슴 아플까 봐 우리 걱정하지 말고 잘 가라고, 나의 아빠여서 고마웠다고 애써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지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아빠가 아픈 이 거지 같은 상황이 정말 싫다고,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게 왜 하필 아빠여야 하냐고, 우리를 두고 떠나지 말라고, 어떻게든 버티라고, 엄마와 남겨질 미래가 두렵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원한 고통의 종료는 죽음이 아닌 아빠가 아프기 이전으로, 건강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첫댓글 질병의 한 가운데에서 고통을 견디는 당사자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봐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고통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충분히 와 닿는 글이에요.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