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8(월)
마카베오 상권 6장~11장
(1마카 6,3)
안티오코스 임금은 그 성읍
(페르시아의 엘리마이스 성읍)
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였으나~
(1마카 10,6263)
알렉산드로스 임금은 요나탄에게
자주색 옷을 입혀 주라고 명령하였다.
묵상-
죽어야 끝나는 전쟁인가?
유다 땅이나 다른 민족이
더 강해졌거나 모처럼
평화로울라치면, 강대국의
임금들은 여지없이 전쟁을
벌여, 자기 속국으로 만들어왔다.
안티오코스 임금 역시 그랬지만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병이 나서 죽게 생긴 거다.
‘도대체 내가 왜?
권력을 떨칠 땐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생각 나네
나는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다른 임금들과는 달리, 갑자기 웬 회개?
이 사람은 그래도 나름 자기(자아)인식이
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거다.
죽음 앞에서 자기가 행한 악한 짓들을
회상하며 회개할 수 있다는 건,
주님께서 베푸시는 커다란 자비이고
사랑일 터,
나는 안티오코스 임금의 고해성사 같은
고백을 읽으며, 임금들이 권력과 명예의
상징으로 아끼는 부하들에게 입혀왔던
자주색 옷과 연결시켜봤다.
임금도 사람이었다.
권력과 직위로 인증 받은 공인이었지만,
나약한 한 인간이었던 거다.
그랬기에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를
위해, 자기 민족이 각자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잘 인도하며 평화를
도모해야 할 왕이 마치 취미생활을
하듯 아무렇지 않게 전쟁을 벌여
불행을 자초했던 거다.
끊임없는 추구!!
트라우마 치료에서 가장
중요하게 읽어내야 하는
내담자의 심리 상태다.
어릴 적 부모의 보호와 지지없이
혼자서 스스로를 지키고 방어해야
했던 상처의 뿌리를 트라우마라고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로부터
자기만의 고유한 모습을 부여받는다.
꽃밭에 여러 꽃들이 있고, 한결같이
다 예쁘지만 자세히 보면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나만의 고유함이 있고, 너만의 색깔이
다 있다는 거다. 하여, 나의 고유함이
뭔지 잘 인식하고 알아차려서 그것을
가꾸고 꽃피워 나가는 여정을,
나의 성소, 곧 카리스마라고도 한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정서적 지지나
자기다움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함부로 대우받았거나, 외면당했거나,
더 잘하라고 강요받거나 했던
부정적인 기억들이 있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충분하지 않고 항상 부족한
존재로서,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며
분발하고 애쓰는 사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와 비교하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구약의 임금들이 그랬고, 마카베오
상권에 등장하는 임금들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냥 자기들 나라, 잘 다스리고
민족의 특성을 파악해서 백성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면 좋으련만,
한시도 멈추지 못하고 전쟁을 벌이고
약탈을 하며, 자기만이 최고의 권력을
가진 1등감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발버둥을 친다.
안티오코스 임금 역시
깊은 투라우마의 뿌리가
있었기에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며 죽어갔던 거다.
"도대체 왜?
권력을 떨칠 땐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1마카 6,11)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
사랑받기 위한 욕망의 뿌리,
그러기에 그는 늘 자신이
지금 이대로는 부족하고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
그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이유다.
주어진 지금의 것들이 나에게 충분한
선물임을 인식한다면, 얼마나 감사한
삶을 살겠는가! 더 애쓰지 않아도 되니
없는 것을 채우려 안달하지 말고, 지금
이 현재에 만족하며,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천국일 텐데 말이다.
끊임없는 추구!!!
나도 그랬었다. 물론 지금도 온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이런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이런 습성이 남아있어서 많은 부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 맞춰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주변의 시선에
내가 어떻게 비칠까 걱정하며,
내 자신이 아닌 남의 요구에 먼저
반응하는 습관, 옆집 민족이 자기보다
강해질까 봐 하는 두려움 때문에
툭하면 전쟁을 벌여서 자기가 진정한
승자임을 보여준 임금들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가 나보다 더 열심히 살고
깔축없이 기도생활하며 성화되는 것
같으면, 자기도 모르게 자극되어,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소모하며, 분발하게
되는 그런 역동같은 거다.
휴식이란 있을 수도 없고, 쉼은 곧
도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끊임없는 추구 형’에 속한다.
한시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런 자신이 아무 가치가 없는 듯이
느껴지면서 뭐라도 해야 자기효능감을
맛볼수 있게 되는 거다.
존재만으로도,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는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어릴 적부터 받은
상처의 패턴을 반복하며, 지금도
자기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 영혼을 소모시킨다.
안티오코스 임금처럼 죽어야 끝나는
전쟁이라면, 우리 역시, 내 안의 정화되지
않은 욕망의 씨앗이 죽어야 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추구하는 트라우마의 씨앗이
죽어서야 끝나는 거라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어찌 바라볼 수 있으랴.
안티오코스 임금을 비롯해서 구약의
임금들이 권력을 탐하는 부하들을
회유할 때마다 미끼로 던진 자주색
옷의 유혹을 묵상하게 된다.
지금의 나에게 자주색 옷의 상징은
뭘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
기도생활을 남보다 더 잘해서
그걸 무기삼아 나를 증명하는 것?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자선을 베풀고
기도를 해주는 모범적인 사람?
힘드신 부모님을 매사 사랑으로
섬기고, 상처 많은 형제들을
참아주고 희생하여 역시 너는
다르구나 라는 대우를 받는 사람?
몸이 지치고 힘들어도,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마치는 사람?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었네.
하늘의 임금님이신 주님께 잘 보여서
자주색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겉으로는 ‘그건 절대 아냐’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오랜 세월 습이 되어
나를 조종해온 나의 몸과 신념들은
여전히 그렇게 살도록 부추기고
있으니 말이다.
더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너는 충분하다.’라고
하시며 다독여주시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다른 사람 어떻게 사는지 알아서
뭐할 것이며,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서 뭘 더 얻을 수 있겠는가.
경쟁하고 긴장하며, 자신을 한시도
편안하게 놔두지 못한다면, 구약의
임금들과 뭐 다를 게 있으랴.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 내 자신이
되어 행복한 게 더 낫다.’
그래서일까?
안티오코스 임금의 부하
리시아스가 유다 민족에게
제안한 방법이 내게 의미 있었다.
‘이제 저 사람들과 화해하고
그들과 또 그들의 온 민족과
화친을 맺읍시다. 그들이 전처럼
자기들의 관습대로 살아가도록
해줍시다.‘
남의 민족 점령해서 내 가치를
증명하고 내가 맘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남의 고유함을
짓밟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전쟁, 경쟁 등)하며,
자신의 고유한 선물마저 잃게 된다는 것,
나는 가진 것들 안에서 평화롭게
살면 되고, 남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관습대로 살아가도록 존중하는 것,
그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마케베오 상권의 일부였다.
끊임없는 추구형이 치유를 받고
멈출 수 있는 자원 중 하나는,
‘너 절대 부족하지 않아
지금 이대로 아주 충분해.‘
라고 말씀하시며,
있는그대로의 나를 허용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일터!!
우리는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고 태어난게 아니잖은가!
오늘 하루, 나에게 또는 가족에게,
주변의 힘든 이들에게 말해보자.
‘당신, 지금 아주 잘하고 있어요.
지금 이대로 충분해요.‘
<잊혀지는 것,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것, 그리고 예수님만이
보기를 원합니다.>
/아기예수(소화)의 성녀 데레사
9일 기도, 여섯째날 '숨어있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