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두고 주요 공직자들에 이어, 대형교회 목회자들마저 막말의 대열에 동참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목사 조광작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강남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사랑의교회 목사 오정현은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아들의 (세월호 희생자와 가족을 향해) 미개하다는 발언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거들었다.
이런 발언의 이면에는 자신들(기득권)의 자녀들은 그토록 허술한 고물배를 타는 미개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아냥으로 들린다. 세월호 침몰 39일째를 지난 지금까지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다가도 기적 같은 뉴스를 찾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함께 나누지는 못할망정 이렇듯 막말을 지껄이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인간본성에 대한 회의감 마져 든다.
지극한 공감능력(共感能力 empathy)장애다. 한편으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자심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인간의 ‘공감능력’이야말로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생존 법칙이기 때문에 더 나은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막말을 내뱃을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상쇄하는 삶의 안전장치를 믿지 않고서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작년 한 해 동안 누군가의 아빠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남편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는 1,920명의 노동자들이 불안전한 산업현장에서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또한, 가난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으며, 삼성전자 수리기사 염호석씨와 전주 신성여객 해고자 진기승씨의 자살에서 보듯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우리는 산자를 살리지도 못했고, 죽은자의 유언도 지켜주지 못하는 차가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에게 성범죄나 강력범죄의 경우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비정규직', '청년 실업', '노동자 파업', '워킹푸어', '독거노인'과 같은 단어들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뉴스'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 고통으로 인한 신음소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우리는 애써 외면하지 않았는지 성찰해야한다. '공감의 촉수'가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감능력(共感能力 empathy)이나 보살핌의 윤리(care ethics)가 더 우월하다든가, 동정심을 전제하거나 사회적 의제가, 개인의 일상적인 삶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함이 아니다. 이러한 고통과 슬픔을 개인적인 일로 또는 못가진자들의 하소연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기득권층의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수준의 행태를 모른척하는 우리들의 의지의 문제다.

<지구 반대편에서 함께 하는 연대와 공감!>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국이 답을 찾고 있다' 라는 사설에서 세월호 및 기타 여러 사건들을 별개의 사건이 아닌 ‘자본에 대한 규제 시스템의 붕괴’에 따른 결과로 보기 시작했다고 설명하면서, 성장과 부를 좇는 과정에서 한국이 안전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다른 병폐에도 눈을 감았다. 소득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지만, 자살률은 3배 이상으로 늘었고, 65세 이상 노인의 거의 절반이 빈곤선 이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한국 사회가 문제점들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면, 일정 부분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수준을 보면 암울하기 짝없다. 벌써부터 정부는 경제전반의 모든 문제와 그 책임을 '세월호 참사' 탓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 오호통재라!~ 이를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