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야낭자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오는 1600년전 삼한시대 관개용저수지 김제벽골제
김제 북쪽을 흐르는 만경강과 남쪽으로 흘러서 새만금방조제가 세워진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동진강 중앙에 자리잡은 김제 벽골제는 우리나라 곡창지대중 하나인 김제평야의 풍요한 농업 생산량을 위하여 1600여년전에 축조한 삼한시대(삼국시대) 수리시설이다.
김제평야는 동진강·고부천·원평천 유역에 발달한 평야지역으로 동진강 지류인 원평천 상류에 우리나라 최초의 관개용 저수지에 해당하는 벽골제가 축조된 이래로 국내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 수리시설을 갖춘 곳으로서 고부천 상류의 홍덕제와 원평천 상류의 금평제 등이 바로 그곳이다.
제방길이가 3km에 이르는 삼국시대 백제11대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된 벽골제는 천년(1682년전)이 넘는 세월을 그 자리를 지켜오면서 수많은 전설과 야사가 전해오는데 그중에도 가장 아련한 슬픔을 전해주는 것은 통일신라 제 38대 원성왕때 제방 축조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단야낭자의 전설이다.
벽골제가 축조된지 460여년이 흘러 여기저기 둑이 유실되어 보수가 시급해져 나라(통일신라)에서는 토목기술자인 원덕랑을 급파하여 수리에 들어갔는데 이모습을 지켜보던 지역 태수의 딸 단야가 흠모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가 태수의 딸사랑으로 제물이 된것을 알아채고 단야낭자가 대신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벽골제 입구를 지켜선 소슬대문을 지나서 제방쪽으로 가다보면 대나무로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백룡과 흑룡이 눈에 띄는데 이와 관련하여 몽고 침략기에 처인성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김제 조씨의 시조 조연벽장군의 전설이 전해온다.
연성전투의 전공으로 벽성군에 봉해져 김제에 터를 잡은 조연벽장군의 꿈에 벽골제의 수호신인 백룡이 현몽하여 흑룡이 벽골제에서 문제를 일으키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자 조연벽장군이 백룡과 흑룡이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흑룡을 활로 싸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백룡은 조연벽장군의 가문의 융성을 약속하였고 아들3형제가 모두 훌륭하게 장성하였다고 전해온다.
김제에는 전설과 더불어 벽골제와 관련된 지명과 전설이 많이 전해오는데 양전동 용두마을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황산 기슭의 강정마을은 벽골제의 물이 머무른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벽골제로부터 동남쪽 6km나 떨어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에는 배가 들어왔다고 하여 배들이라는 지명이 전해온다.
벽골제 제방위에 올라서면 드넓은 김제평야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거대한 저수지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에 의하면 “처음 벽골지를 여니 제방의 길이가 일천팔백보” 라고 적혀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데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벽골제 제방을 운암제 설치에 따른 김제간선수로로 개조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날과 같이 제방만 남고 물은 보이지 않은 형태로 별해 버려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사적 제111호로 지정된 벽골제 중수비는 벽골제 수축에 동원된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고 해진 짚신을 버려 산을 이루었다는 신털미산 정상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벽골제단지내로 이전하였는데 재질이 점판암인 까닭에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울 정도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참고로 벽골제에 대한 기록을 확인 할수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옛 사람이 김제의 옛 이름을 들어서 그 이름은 벽골이라고 붙였다.
둑의 길이는 6만 8백 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천 8백 40결 95복이다.
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만경현의 남쪽에 이르고, 둘째 고랑을 장생거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윤부의 근원에 이르며, 셋째 도랑을 중심거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물이 고부의 북쪽 부령의 동쪽에 이르고, 넷째 도랑을 경장거라 하고, 다섯째 도랑을 유통거라고 하는데, 둘 다 한 줄기 물이 인의현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고 전해온다
김제벽골제 - 국가사적 제111호
전북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119-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