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연의(西漢演義)
서한연의(西漢演義)는
명나라 종성(鐘惺, 1574~1625)이 지은
동명의 서한연의 번역본이다.
초한지, 서한지, 장량전, 장자방실기,
초패왕실기, 항우전, 홍문연, 초한연의
등으로도 불리는데,
단권으로 일부만 번역된 이본도 있고
전질을 번역한 책도 있다.
단권 번역본(국립중앙도서관본)은
앞에 가사인
우미인가, 항우가, 초한가 등이
첨부되어 있어
서한연의에 대한 당대의 인기를
반영하는 간접적인 자료가 된다.
이 소설은 국문 필사본 56편,
방각본 82편,
국문 활자본 21편이나 보인다.
지금까지 발견된 편수로는
국문 소설 중 당당 10위권에 들 만큼
널리 알려진 소설임에 틀림없다.
중국은 물론 서방까지 알려진
경극 희곡(京劇戱曲)인 패왕별희는
바로 이 서한연의에 의거한
작품이기도 하다.
서한연의에 대한 기록부터 보자.
최초의 기록은 이미 1595년
쇄미록(鎖尾錄)에 보인다.
쇄미록은 선조 임진왜란 때,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임란을 겪기 1년 전인
1591년에서 1601년까지 쓴 일기인데,
여기에
“종일 집에만 있자니 무료하였다.
딸의 청으로 초한연의를 번역하여
둘째 딸을 시켜 쓰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대통관(大通官)이
칙사의 분부를 아룁니다.
서한연의 국문 번역본
한 질을 구해 들이라 하므로
들여보내고자 합니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 기록은 오희문으로부터 79년 뒤다.
대통관은
번역과 통역을 맡아보던 우두머리다.
내용으로 미루어
중국에서 온 칙사가
국문 번역본 서한연의를
구해 달라는 내용이다.
위 기록이 승정원일기,
현종 15년(1674) 1월 8일조에
보이는 기사인 점으로 미루어,
1674년에 이미 중국에서 들어와
국문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수발집(溲勃集) ‘소설경람자’에도 보이니
1762년이다.
이미 저 당시에도 서한연의의 인기가
녹록지 않음을 어림할 수 있다.
언급한 바, 이 책은 본래
명나라 종성이 찬한 소설 서한연의를
우리나라에서 번안(飜案)한 것이다.
번역이라 하지 않고
번안이라 함은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쳤다는 뜻이다.
따라서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는
번역과는 달리
번역자의 의중이
작품 속에 들어가 있다.
일찍이 한국 고소설사의
주춧돌을 놓은 김태준은
그의 조선소설사에서
“그중에도 서한연의는
가장 인상 깊게 애독되어
일찍 초한가를 부르며
초한장기를 놀며
홍문연을 배연(排演)하여
삼척동자도 번쾌, 항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일부분씩을 적출해서
초패왕실기(楚覇王實記),
장자방전(張子房傳),
농암노인(聾巖老人)이 발선(拔選)한
유악귀감(帷幄龜鑑) 등 같은 것이
번역되었다”라고 써놓았고,
불후의 명작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 같은 이도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 동주열국지 같은
소설을 탐독하는 가운데
이 서한연의 또한 읽었다고 하니
일제 치하까지
이 소설이 꽤 읽혔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작가가 내놓은 초한지도
이 서주연의와 관계 있다.
이러한 고소설을
‘연의 소설(演義小說)’,
줄여 ‘연의’라 한다.
연의는 이렇듯 역사상의 사실을
소설적 흥미로 수식,
부연해 놓은 중국 소설로서
국문으로 번역한 소설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넓은 의미의 소설’이라는 말과
통용되기도 하였다.
내용을 살펴보자.
진시황이 죽었다.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영웅들은 일어났다.
항우는 범증을 얻어
강성한 세력을 키운다.
유방은 운명의 사내 장량을 만난다.
장량은 유방에게서
제왕의 덕이 있음을 보고,
유방과 항우는
먼저 함양에 도착하는 자가
관중 땅의 왕이 되기로 한다.
유방이 먼저 도착하여
진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지만,
병력은 항우군에 비하여 열세였다.
항우는 약속을 저버리고
유방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항우는 범증의 계획에 따라
유방을 제거하려 했으나
장량이 미리 눈치채고
유방을 도망치게 한다.
항우는 스스로 초 패왕(楚覇王)이 되고
유방은 서촉 변방 파촉의 한 왕(漢王)이 된다.
장량은 항우를 섬기던 한신을
유방에게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한다.
한신은 유방을 찾고
‘초를 격파하는 장군’이란 뜻의
파초대장군(破楚大將軍)에 봉해진다.
한신의 연승으로
점차 유방을 따르는 제후가 많아진다.
이에 힘입은 유방은
항우를 선제공격하였다가
그만 크게 패하지만
한신의 노력으로
점차 세력을 만회한다.
팽성에 있던 항우가
한신이 보낸 첩자의 계략에 빠져
팽성에서 나오고야 만다.
유방의 군대는 이미 매복 중이었다.
구리산으로 진격하던 항우군은
뒤늦게 함정임을 알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벗어난 뒤다.
항우는 다급히 퇴각 명령을 내린다.
항우는 팽성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으나
이미 유방의 수중에 떨어진 뒤다.
장량은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초의 군대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들려주는
책략을 쓴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 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책략은 적중했고
초의 군대는 붕괴된다.
항우는 강동으로 탈출을 계획하고,
영원히 항우의 여인이 되고자 한
우미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항우는 8백여 명의 남은 군사를 이끌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내 다시 한군에 포위된다.
운명이라 생각한 항우는
오강에서 목숨을 끊는다.
그의 적토마도 오강에 뛰어들어
주인과 운명을 함께한다.
천하는 유방에 의해 통일되었다.
한신이 초 왕(楚王)에 봉해졌다.
장량은 왕업은 이루었고
공명은 부질없다며
청산으로 들어간다.
한신은 곧 초 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되더니,
끝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유감 어린 넉 자를 남기고
역적으로 몰려 참살당한다.
그 후 한나라는
4백 년간 유지되다가
조조, 유현덕, 손권에 이르러
삼국이 정립된다.
항우(項羽, B.C. 232~B.C. 202)와
유방(劉邦, B.C. 247~B.C. 195)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으니,
긴 서술은 피하겠다.
항우가 죽은 것은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유방은 40대 중반이었다.
항우가 마지막으로
우미인(虞美人)과 눈물로 이별할 때,
슬피 울며 부른 해하가(垓下歌)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겠다.
한때 중원 대륙을 호령했던 항우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선
한 남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를 듣고
우미인은 자결하고
이어 항우도,
항우의 애마 오추마도
주인의 죽음을 알았는지
크게 운 뒤 오강에 뛰어든다.
훗날 우미인의 무덤가에서
작은 바람에도 엷게 떠는
비단결 같은 꽃잎의 꽃이 피어난다.
사람들은 이 꽃을
우미인의 영혼이 환생한 것이라 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라 부르게 되었다.
우미인초는 우리말로 ‘개양귀비’다.
개양귀비의 접두사로 쓰인 ‘개-’는
‘변변치 못하다’는 의미다.
멍첨지와는 관계 짓지 말아야 한다.
아래는 항우가 죽기 직전에
지었다는 유명한 시다.
力拔山兮氣蓋世
(역발산혜기개세 ;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백은 온 세상을 덮을 만하다네.)
時不利兮騅不逝
(시불리혜추불서 ;
때가 불리하니 추(騅, 항우의 애마 이름)
마저도 달리지 못한다네.)
騅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내하 ;
추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해야 하는가.)
虞兮虞兮奈若何
(우혜우혜내약하 ;
우(虞, 항우의 첩인 우미인)여,
우여, 그대를 어찌 하랴.)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지만
時不利兮騶不逝
형편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나아가질 않는구나
騶不逝兮可奈何
오추마가 나아가질 않으니
내 어찌할 것인가
虞兮虞兮奈若何
우미인아! 우미인아!
내 너를 어찌할 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