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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신년 스페셜 역사기획 발해1편 아시아 네트워크-발해의 길 (2002.1.5.)
방송일: 2002105 조회수 : 8438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KBS 신년 스페셜]
역사 기획- 발해
(제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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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달리고 14 (7-8 초 보고)
668년,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해온 고구려가 멸망했다.
성 팬 7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만주와 연해주는 영원히 사라지는 듯 했다
크라스키노 성터 10 그로부터 30년 후 ,그 곳에 고구려를 계승한 또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일어났다.
제국의 이름은 떠오르는 해 4 발해였다
해동성국 글자 나오고 9 동북아시아 무대에 등장한 지 불과 100여 년만에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나라,
발해는 어떻게
길 트래킹 4 해동성국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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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 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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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크래킹 6 (보고)
크라스키노 항구 11 지난 가을 , 아시아 고고학계의 관심은 러시아 크라스키노 항구에 집중됐다.
이 항구에서 불과
캠프 13 일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는 한국, 러시아. 일본 세 나라의 공동 발굴단이 벌써 몇 개월 째 캠프생활을
하고 있다
종치고 3 (보고)
러,여 팬 서길수 10 이번 발굴은 발해 유적에 대한 러시아 극동고고 역사연구소와 고구려 연구회의 공동연구
협정에
음식 덜고 3 의한 것이다.
일본학자 3 일본은 이미 4년 전부터 러시아와 공동발굴을
러시아 학자 5 진행해 오고 있는데, 아시아 각국이 이렇듯 발해
마늘 8 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발해가 그들의 고대사에 그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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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가고 23 (3-4 초 후)
발굴 현장은 캠프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고 한다. 취재팀은 발굴단을 따라 발해의 유적으로
향했다
(보고)
우거진 갈대들 9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넓은 성터였다. 여기가 발해의 숨결을 간직한 크라스키노 성이다
발굴 현장 풀 10 현재 한국과 러시아 발굴단이 조심스레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곳은 성의 주거지역
흙 담고 3 지층의 분석결과 크라스키노 성은 모두 3백년에
볼딘 박사 3 걸쳐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발굴단은
박신경 연구원 4 가장 아래층인 8세기 시대의 유물을 찾아나가고
흙 파내고 4 있다.
볼딘 박사 인터뷰 여기는 표층이구요. 이층은 10세기입니다. 아마도 여기가 9세기이구요.
여기 이 사이층은 보시다시피 이런 모래층이 축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은 8세기 층입니다.
문화층 C/G 16 유물을 포함하고 있는 지층을 문화층이라고 한다
크리스키노성이 보여주는 문화층은 10세기에서 8세기. 이는 이성이 8세기 발해시대에 지어졌음을 말해준다
남자 3 (보고)
조개껍질 9 땅에서 드러난 조개껍질들. 이곳에 살았던 발해인들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
동물 뼈 4 다.
박신경 인터뷰 나온 뼈 중에 말뼈 소뼈 갈비뼈라든지 많이 나왔습니다.
뼈들이 칼자국들이 많이 나있습니다. 직접 고기를 도려내고 , 여기는 요즘 말하는 쓰레기장 음식 버리는
쓰레기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 모여있고 9 이번 발굴에서 한국학자들을 흥분시킨 몇가지 중요한 발굴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토기조
토기조각 꺼내고 9 각이다. 검은 색은 띄고 있는 이 토기는 8세기
즉 초기 발해시대의 토기로 밝혀졌다
박신경 연구원 인터뷰 여기서 이제 초기 발해의 발해식 토기라고 말하고 있는 이 토기는 저희들이 볼 때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입니디. 고구려 식 토기는 표면이 검고 거칠고 재질 자체가 모래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고구려 식 토기 15 한낱 거칠고 볼품없는 이 토기조각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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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고 6 (3-4 초 후 )
취재팀은 성을 가로질러
성문 터 발굴 현장 19 또 다른 발굴현장으로 향했다. 일본 발굴단이 한창 작업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성문터다.
그 동안 장마 때문에 땅을 파내려 가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성문 석축 틸 업 12 성문 자리엔 땅속 깊숙히 견고한 석축이 드러났다. ( 2-3 초 후)
석축의 흔적으로 보아 이 성문은
옹성 9 특이하게도 적들이 성문을 곧바로 공격할 수 없도록 한 옹성의 형태였다
성문 줌 아웃 14 (3-4 초 후)
성문터에서 3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치 발굴하는 사람들 9 한러일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이번 발굴의 최고의 성과로 꼽고 있다 .
돌출된 석축 11 (2-3 초 후)
성벽 밖으로 요철처럼 돌출 된 석축, 크라스키노 성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 독특한
치 5 구조물은 바로 치다
다무라 인터뷰 여러 가지 발견을 했는데 하나는 옹성이라는 문 구조가 매우 확실하게 확인됐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치의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서길수 인터뷰 처음으로 치라는게 밝혀졌어요 치라는게 뭐냐면 여기 벽이 있으면 바로 밑에 오는 적을 쏠수가
없잖아요. 경계할 수도 없고. 그래서 튀어 나오도록 해 가지고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거죠.
이것은 고구려에서 처음 발명한 특수한 축성법이었어요. 지금 중국학자들은 발해는 이것을 이어받지 못했다 ,
그렇게 주장을 했었는데 여기서 치와 옹성이 그 당시에 쌓았다 하는 것이 발굴되면서 발해의 성벽들이 고구려의
성벽들을 그대로 이어갔다는 아주 좋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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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촬영 30 (4-5 초 후)
취재팀은 크라스키노성의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항공촬영을 시도했다.
멀리 크라스키노 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2-3 초후)
크라스키노 성은 전체적으로 둥근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
성벽 팬 옹성과 치 20 성에는 모두 3개의 문이 나 있는데 현재 발굴된 곳은 동문과 남문.
크라스키노 성은 옹성과 치를 갖춘 견고한 성이었다
성벽 타이트 6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2미터.
성 풀샷 12 성의 전체 둘레는 1.4 킬로미터. 이것이 1200년 전 발해의 성이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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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C/G 20 발해는 5경 15부의 행정체계를 갖춘 국가였다
5경은 요즘으로 치면 특별시에 해당한다 . 발해는 이처럼 중요한 행정도시에 크라스키노 성과 같은 견고한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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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8 (4-5 초 보고)
발해의 수도 상경성을 찾아 취재팀은 중국 영안 동경성진 시장 18 현으로 향했다.
현재 커다란 재래식 시장이 서있는 이곳의 현재 지명은 동경성진.
발해의 수도 상경성을 한때 동경성이라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트래킹 , 성벽 보이고 9 동경성진에서 외곽으로 달려가다 우리는 상경성과 만났다.
이것이 상경성의 외성 벽이다
비석 13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은 이곳이 1200년 전 해동성국 발해의 수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오봉루 팬 10 상경성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궁성의 정문인 오봉루.
성벽 틸업 13 현무암을 이용해 견고하게 쌓아올린 오봉루는 상경성의 건물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는
유적이다
거대한 주춧돌 13 오봉루에 남아있는 거대한 주춧돌은 상경성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보고)
제1궁전지 11 높게 기단을 쌓아올린 제 1궁전지.
이곳에서 발해의 황제가 국무를 보았을 것이다
무너진 성벽 9 698년 나라를 세워 926년 명운이 다할 때까지 거대한 왕국을 이루어 결국엔 해동성국이라 불린
우물 4 나라.
훼손된 제 2 궁전지 4 발해의 실체는 무엇일까?
상경성 팬 14 그리고 무엇이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것일까
취재팀은 그 비밀을 풀어보기로 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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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9 (3-4 초 보고)
취재팀이 찾은 곳은 중국 돈화시
돈화시 24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바로 이곳에서 나라를 세웠다. 당시 구국이라 불리웠던 돈화시는 발해의
첫 번째 수도답게, 지금도 어디에 가든 쉽게 발해를 만날 수 있다
(발해 글씨들 보고)
길 팬 비석 14 취재팀은 돈화시의 외곽에서 발해가 해동성국이
강동 24개돌 옛터 될 수 있었던 그 비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 바로 강동 24개돌 유적이다
24개돌 팬 8 유적은 한 줄에 8개씩 모두 24개의 돌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독특한 형태였다
돌 훑고 13 언뜻 보기엔 주춧돌로 여겨지는데 , 땅위에 높게 솟아있는 것이 일반적인 주춧돌과는 다름 점이었다
볼펜 줌 아웃 13 돌의 크기는 24개가 거의 일정한 편이다
크기를 재어보면 폭이 80센티미터
높이 6 돌의 높이도 80센티미터에 이른다
홈 11 한가지 더 특이한 점은 돌의 상단에 홈이 파여 있는 것이다. 이 홈은 어디에 씌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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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대 외경 5 (보고)
이병건 교수 보이고 12 강동 24개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취재팀은 동원대 이병건 교수를 찾았다.
이병건 교수는 강동 24개돌로
도면 5 박사학위를 받은 고대건축의 권위자다.
이병건 인터뷰 일반적으로 주춧돌 간격이 2.5에서 3미터 정도의 보편적인 간격이 아니라 1.4미터의 상당히
짧은 주춧돌 간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춧돌 위에 기둥을 직접 세우는 그러한 구조가 아니라 주춧돌
위에 목재를 수평으로 뉘어 쌓는 귀틀집 형상의 집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홈에 나무 끼우고 7 돌에 나 있는 홈은 이렇게 목재를 끼우기 위한 것이다
잔돌 채우고 5 이병건 교수의 자문으로 강동 24개돌 유적을
주춧돌 세우고 7 복원해 보았다
24개의 주춧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나무 세우고 14 수평으로 나무를 놓고 판자로 틈을 메워 바닥을 만들었다.
벽체는 나무로 촘촘히 세우고 지붕은
지붕기와 얹고 8 기와를 얹었다.
이것이 원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강동 24개돌 19 그렇다면 이 건물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주춧돌이 땅위에 솟아 있고 또 유난히 좁은 간격으로 배열돼 있는 것으로 보아 무거운 짐을 넣어두는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덕흥리 고분 벽화 12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인 덕흥리 고분벽화에서
우리는 강동24개돌 유적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경 나오고 5 이것은 고구려 창고인 부경이다
강동24개돌과 비교 10 (3-4 초 후)
강동 24개돌은 발해의 창고인 것이다
지도 분포도 10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런 24개돌 유적이 상경성 주변에서 모두 12개나 발견됐는데 우연하게
사진 나오고 14 도 주춧돌의 재료나 규모 구조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정부가 관리하는 창고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기록 18초 신당서에 의하면 당시 발해에는 발해 5도, 즉 다섯 개의 길이 있었다고 한다 .
일본도 신라도 압록도 영주도 거란도가 그것이다
지도 :창고와 길 11 놀랍게도 발해의 창고는 이 발해 5도의 길목에있다.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이 창고는 일종의
물류센터였을 것이다
이병건 인터뷰 개인이 관리하는 창고가 아니라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는 창고일 경우에 물건의 수납이라든가
이런 여러 가지 목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주요 교통로 상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도 높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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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5도에서 일본도로 12 수도 상경성에서 외국으로 향한 다섯 개의 길,
발해5도는 당시 발해의 폭넓은 국제교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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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14 취재팀은 발해 5도중의 하나인 일본도를 추적해 보기로 했다. 발해가 일본으로 떠났던 그 출발지는
어디였을까?
멀리 크라스키노 성 20 (4- 5초 보고)
발해의 성중에서 바닷가 인근에 위치한 유일한 성이 바로 크라스키노 성이다. 성 너머에는 동해를 향해 있는
포시에트 만이 있다 .
절터 27 현재까지 역사학자들은 이 크라스키노 성을 일본도의 출발지로 보고 있다
항구와 가깝다는 지리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성안에 꽤 큰 규모의 절터가 세 군데나 발견됐다는
사실도 크라스키노 성을 일본도의 출발지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옛날 발굴 유물 21 절터를 처음 발굴한 것은 지난 91년. 불교가 발해 지배계층의 종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절터는 이 성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올해 발굴 유물 15 또한 이 성의 절은 일본으로 가는 발해인들의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항해사찰일 가능성도
높았다
풀무의 벽돌 17 절터에서 발굴된 풀무늬 벽돌,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한 이 벽돌은 주요 건축물에만 사용됐다고 한다
볼딘 박사 인터뷰 이 유물의 발견은 이 도시의 위상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 도시가 아니라 발해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도시인것이죠. 두 가지 사항을 말 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이 도시가 중요한 행정
구역이었고 또 하나는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을 연결하는 항구도시라는 거죠
포시에트 항 떠나고 20 크라스키노성을 출발한 발해인은 포시에트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이렇게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으로 가는 길이 발해의 일본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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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길 트래킹 13 (7-8 초 보고)
일본도가 실제로 사용됐다면 어딘가에 발해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사야마 테라 17 취재팀은 그 흔적을 찾아 일본 오오츠시의 이시야마테라를 찾았다 .
이시야마테라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일본의 천년고찰이다.
스님 상자 열고 25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그때까지 일본열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불정존승다라니경이
이시야마테라에 전해진다 .
이 절에 다라니경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일까?
책 넘기고 24 이 책은 다라니경이 이 절에 전해진 경위를 상세히 기록한 다라니기다.
(2-3 초 후)
이 다라니기에서 취재팀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발해국사. 발해국사는 발해의 사신을 말한다
다음 장으로 넘기고 13 다라니경을 가져온 사람은 발해의 사신 이거정이었다.
(보고)
다라니경 펼치고 12 발해의 사신 이거정이 불정존승 다라니경을 가져온 해는 861년. 발해가 일본에 온 것이다
스님 인터뷰 이시야마테라 뿐만 아니라 전 일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일본의 불교계가 이 불경을 알게 되어 더욱 더 불도에 정진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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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라 항 14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온 발해사신은 일본의 작은 항구에 도착한다.
그곳은 이시가와현 후쿠라항,
비석 서 있고 21 후쿠라 항구에 서 있는 비석은 1200년 전 이곳을 지나간 발해인들을 기억하고 있다.
발해사절이 이 항구에 와서 머물렀고 당시 후쿠라 항의 이름은 복랑진이라 했다
고지마 요시다카 인터뷰 발해로 돌아가던 배가 조난으로 후쿠라항에 정박 반년간 300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883년 헤이안 시대 후쿠라 주변의 나무를 베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 이유는 발해로 돌아가는 선박을 이곳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함부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베타 유적 32 이시가와현은 작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후쿠라항 인근의 발해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하고
있다. 이 나베타 유적도 그 중의 하나다.
현재까지 모두 60동의 건물이 확인된 나베타 유적은 평시에는 항만관리시설로 이용돼다가 발해사신이 항구에
도착하면 임시 숙박시설로 이용됐
취재팀 서있고 5 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지마 설명하고 발해사람들이 왔을 때 이 건물 중 한곳에 머물렀을 텐데 이곳은 아마도 관리사무소였을 것입
니다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을 것입니다. 연회를 열었던 건물이 이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다 끼고 트래킹 12 (4-5 초 보고)
후쿠라 항에 도착한 발해사신의 최종 목적지는 수도 평성궁.
카가현 부감 4 발해사신의 발자취를 따라 가던 취재팀은 카가현
도로유적 발굴현장 21 에서 흥미로운 발굴현장을 만났다.
(2-3 초후)
언뜻 보기엔 그 정체는 알 수 없는 이 유적은 발해와 동시대인 일본 헤이안 시대에 사용됐던 도로다.
고지마 인터뷰 이 도로를 통해 저쪽으로 곧장 가면 후쿠라 항입니다 왼쪽으로 가면 현재 토마야현에 이르는
도로가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을 일본도라고 했는데 이곳은 일본의 일본도 일본
쪽에서 보면 발해도라고 할 수 있죠
석양 5 (보고)
건물 외경 4 카가현의 도로 유적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
허리띠 장식 팬 9 됐는데 이것은 허리띠 장식이다
(보고)
고지마 장식 허리에 대고
고지마 설명 일본에는 지금까지 많은 장식이 나왔는데 이런 모양은 한 점도 없었습니다. 이게 처음이죠.
중국 당나라 시대와 발해시대의 것에서 이런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이 도로를 왕래하던
발해인의 허리띠 장식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허리띠 장식 25 (4-5초 후)
발해의 허리띠 장식은 가운데 빈 공간의 한 면이 산처럼 볼록하게 솟아있는 형태로, 원래는 금을 입혔다.
일본의 허리띠와는 그 형태가 구분된다
고지마 목간 용액에 담고 12 고지마씨는 취재팀에게 도로유적에서 출토된 또 다른 유물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목간이었다. 목간은 종이가 흔하지 않
모니터에 나타난 목간 6 았던 시대에 종이대신 나무에 글씨를 쓴 일종의 서찰이다
고지마에서 목간으로 11 1200년 전 도로에서 발견된 이 목간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까? 흐릿하던 목간의
글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목간 내용 24 목간은 도로를 수리하는 사람을 보내니 이 사람을 잡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목간이 작성
된 시기는 2월 24일.
주민들의 이동이 엄격히 제한돼던 당시, 이 목간은 일종의 여권이었다
고지마 인터뷰 보통 헤이안 시대의 법률에 의하면 도로 수리는 9월인데 여기 보면 2월 24일입니다.
통상적인 일이 아니죠. 2월 24일에 수리한 이유를 보면 이 목간은 849년의 것으로 보고 있는데
당시 발해의 배가 와 있었습니다. 발해인들이 도읍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도로를 수리하고 청소했는데 이를
위해 파견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도로 유젹 22 (2-3 초후)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 정부는 서둘러 카가현에 도로수리공을 보낸다. 수로로 향하는 길을 미리
수리해서 발해사신이 편안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가 팬 두 사람 서 있고 13 이처럼 발해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노력은 일본의 역사기록 속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책 타이트 14 (기록 보고)
일본 평성궁 26 수도 평성궁으로 들어간 발해사신은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발해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특별히 제정한 직책이 무려 13가지, 정월 초하룻날엔 일본천황이 발해사신을
모시고 신년 하례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중대성첩 10 중대성첩은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문서로 당시 일본에 보낸 사절단의 직책과 인원수가
기9 록돼 있다. 이 발해의 사절단은 대부분 일본 최고귀족의 지위를 얻는다
대수령으로 줌인 13 그런데 발해의 사절단 중에서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다.
대수령, 그들은 누구인가?
고지마 인터뷰 발해에서 일본에 들어올 때는 105명이 왔습니다. 그중 도읍으로 가는 사람들은 20명 내외입니다.
나머지는 들어온 곳이나 출발 장소에 남는데 그 구성원 가운데 수령이라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각지에서 교역을 하고 교역한 물자를 발해로 가지고 돌아가서 수익을 올렸을 것입니다.
나라국립문화재 연구소 7 발해사신이 일본에 온 이유를 알기 위해 취재팀은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를 찾았다
목간 꺼내고 17 이 연구소는 수도 평성궁에서 출토된 목간들을소장하고 있다,
이 목간속에 그 동안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목간에서 글씨 나오고 12 어느 귀족이 글씨연습을 한 것처럼 보이는 이 목간은 발해사신과 교역이라는 글씨가
반복적으로 씌여져 있다
목간에서 맥인 나오고 12 또 다른 목간엔 맥인 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당시 맥인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인을 지칭했다
목간에서 초피 나오고 13 이 목간엔 초피라는 글씨가 보인다 .초피는 담비가죽으로 발해의 특산물이었다.
발해는 초피의 교역을 위해 일본에 온 것이다.
유취국사 19 발해사신이 일본에 간 회수는 모두 34차례.
일본 역사서의 한 대목은 발해사신이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기록 보고)
한규철 교수 인터뷰 신라와 일본간의 천년의 역사에서 공식적인 교류는 10여 차례 밖에 기록이 안나옵니다.
그런데 일본과의 229년 사이에 34차례나 공식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발해에 14차례
교섭기록을 가지고 있고 이 48번의 공식기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발해가 일본과의 관계라든지 당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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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5도 15 발해5도는 발해의 특산물을 수출하는 무역로이기도 했다. 이 다섯 개의 길을 통해 발해는 활발한
국제무역을 전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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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23 (4-5초 보고)
고대의 길은 정치와 문화와 경제가 교류하는 주요 통로이다. 이 통로가 많을수록 그 나라는 개방성과 국제성을
띄게 된다. 발해는 다섯 개의 길이 전부였을까?
블라디보스톡 24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한때 발해의 영토에 속해 있던 러시아는 발해에 대해 그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는 나라다.
(보고)
러시아 극동대학 외경 8 발해의 길을 추적하던 중 취재팀은 러시아 극동대학의 발해 전문가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유물
사람들 들어오고 8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을 만났다.
열쇠로 금고 열고 20 그 유물은 극동대학 역사연구소의 금고속에 소중히 보관돼 온 바로 이 은화였다.
(보고)
러시아 교수들 4 발해의 성에서 발견했다는 이 은화는 수많은 손바닥에 은화 올려놓고 8 발해 유물을 접해본
이들 발해전문가들조차도 처음으로 보는 은화였다
샤프쿠노프 보이고 7 그것은 발해의 것이 아니라 외국의 것이 분명했다
샤프쿠노프 설명하고 명백히 이 은화는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은화의 시기는 십중팔구 8세기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중앙아시아에서 극동으로까지 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은화 촬영하고 11 우리는 극동대학의 협조를 얻어 이 의문의 은화를 촬영할 수 있었다.
은화 15 은화는 아랫부분이 잘려나간 상태였고 ,표면엔
둥그런 점들이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수 없는 어떤 형상을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메일 보내고 20 이 은화가 과연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인지 , 그 정확한 출처를 알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확인이
필요했다. 취재팀은 은화의 사진을 서울로 보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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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21 (10초 정도 보고)
은화가 발견된 곳은 블라디보스톡에서 00킬로미터 떨어진 야누치로 지역. 이 지역의 작은 야산에는 발해의 성이
있다.
취재팀 오고 13 성의 이름은 노보고르데예프카. 고고학자인 니키틴 교수의 안내를 받아 취재팀은 발해의 성으로
올라갔다
니키틴 교수 설명 이런 길이 교대의 전형적인 길입니다. 폭이2.4미터 표준 폭이죠. 이 도로의 폭은 여기서 사용
했던 수레축의 폭과 같습니다.
길 5 발해인들이 다녔을 길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서자 집터로 내려가고 7 비스듬한 경사지에 주거지 터가 드러나
있었다.
니키틴 교수 설명하고 바로 여기 주거지 유적을 보고 있습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면적이죠. 여기서 유적이 잘
보입니다. 난방시스템 말이죠. 우리는 깐이라고 부르고 한국어로는 온돌이라고 하죠. 집에서 열기가 지나가는
통로죠. 아궁이들 중 한곳이고요. 두 번째 아궁이고요. 여기에 연기통로가 있습니다
연기통로 팬 19 발굴 이후 그대로 방치된 상태여서 상당부분이 빗물에 씻겨 나갔지만 이것은 분명 고구려가
처음으로 사용한 온돌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역시 온돌을 사용한 것이다.
니키틴 교수 설명하고 돌을 이렇게 세우죠. 이런 식으로요. 그 다음에 추가로 돌을 이렇게 위에 덮었어요.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해서 연기통로가 만들어진 거죠.
연기통로 C/G 16 연기통로 양옆으로 돌을 세우고, 그 위로 다시 돌을 덮었다.
두 개의 아궁이에 불을 지핀 후 연기는 가운데 구멍으로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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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템 예바 교수 연구 19 아르템 예바교수는 노보고르데예프타 성의 주거거지 발굴에 참여한 역사학자다.
아르템 예바 교수로부터 자문을 얻은 취재팀은 1200년 전 발해의 집을 복원해 보기로 했다.
집 그리고 +복원 39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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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멀리 가리키고 22 그런데 이상한 점은 노보고르데예프카 성밖에 또 다른 취락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밖에 살고 있었던 그들은 누구일까. 어쩌면 그들은 의문의 은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장 걸어오는 취재팀 14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발굴당시 이곳에선 츨토된 유물들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청동제품의 흔적이 출토되었는데 우리지역으로서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주물형태가 말이죠.
점토로 만든 것이었는데 그것으로 청동장식을 주조했죠. 연해주 지역으로서는 독특한 유물이었습니다.
유물 틸 다운 14 성밖 취락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특이하게도 유물의 대다수는 청동기 제작도구가
차지하고 있다
주물틀 7 점토로 만든 이것은 청동장식을 찍어내는 주물틀
이다.
도가니 8 이 작은 그릇은 쇠붙이는 녹이는 도가니다
줄 5 그리고 청동기 가공에 필요한 줄도 보인다.
청동장신구 15 도구들과 함께 그곳에서 제작한 청동장식물도
출토됐는데 이 장식들은 발해 고유의 것이 아니
라 중앙아시아 계통으로 밝혀졌다
성 팬 집터 13 (3-4 초 후)
노보고르데예프카 성밖의 취락지. 청동장식품을
제작했던 이 수공업단지엔 분명 이방인들이 와
있었다.
강과 갈대 18 그들은 과연 이역만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일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발견된 은화가
중앙아시아 은화일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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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외경 6 (보고)
연구실 들어가고 13 한편 블라디보스톡에서 보낸 은화사진은 서울대
김호동 교수에게 전달됐다.
김호동 교수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아랍전문가다
은화사진 4 (보고)
김호동 교수 4 기록과 사진 등의 자료를 비교 분석한 결과
책 은화 비교하고 13 이 은화는 발해시대인 8세기에 제작됐고,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은화임이 밝혀졌다
김호동 교수 이 왕관의 뒤쪽 편으로 알마흐디라는 글짜가
보이는데 여기는 알마흐디라는 글자가 아랍어
로 새겨져 있고, 여기는 그 당시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소그드 문자로 브하라의 군주라고
하는 문자가 새겨져 있죠
은화 그래픽 14 은화는 앞면과 뒷면에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중 이 은화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열쇠는 은화
의 앞면에 있다
7 왼쪽 상단에 아랍어로 씌여진 알마흐디는 8세기
에 생존했던 아랍 왕의 이름이다
4 가운데의 무늬는 왕관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5 그 옆에는 중앙아시아 언어인 소그드어가 적혀있
다
지도 ,두개의 동전 12 발해의 성에서 발견된 이 은화는 동시대 중앙아
시아 사마르칸트에서 사용된 은화와 거의 유사하
다
김호동 교수 인터뷰 보다 정확한 증거자료는 거의 같은 시기에
중앙아시아에서 통용되던 은화가 소그드 지방
에서 발견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비교해보면
형태나 문양이나 모든 것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극동에서
발견됐지만 분명히 중앙아시아에서 만들어지
고 통용되던 것이 거기까지 흘러 들어간 것이
라고 봐야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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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로브스크 공항 15 중앙아시아의 은화가 발해에서 발견된 것처럼
아주 멀리 떨어진 이국의 문물이 의외의 지역에
나타난 경우는 또 없을까...
헬기에서 본 풍경 7 취재팀은 남부 시베리아에 위치한 치타시로 향했
다
치타시 트래킹 7 (보고)
치타 사범대학 외경 6 취재팀은 이 곳 치타시 사범대학에서 멀리 극동
연구실에 마주앉아 있고 8 지역으로부터 건너온 유물을 만날 수 있었다.
거리상으로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나
등자 보여주고 21 나타난 그 유물은 바로 이 등자다.
(3-4 초 후)
천년의 세월이 넘도록 옛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는 이 등자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빅토르 비치 설명 이 등자가 흥미로운 이유는 좁을 발걸이를 가
지고 있으며 이런 반원형태와 둥그런 손잡이
그리고 몇 개의 줄로 이어진 삼각형의 무늬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한국적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역사
적으로 북방 국가인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등자 타이트 틸업 12 고구려에서 수입된 이 등자는 손잡이부분에 수리
한 흔적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 오랫동안 사
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교수 도자기들 꺼내고 7 (3-4 초 후)
그런데 비단 고구려의 등자뿐만이 아니라 이곳
중앙아시아 도자기 15 치타시에서는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유물
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토기들이다.
이바노비치 설명하고 형태로 봐서 쌍이형태가 보전되어 있는데요.
중앙아시아인들에게 전형적인 것입니다. 바이
칼호 너머 동쪽지역에서는 이런 토기를 만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돌고
있는 나사모양이죠. 이것은 중앙아시아의 특징
입니다.
청동거울 꺼내고 22 (2-3 초 후)
이바노비치 교수는 이번엔 치타시에서 수집된
청동거울 중 이색적인 거울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 거울의 표면에는 특이하게도 11개의 악기가
새겨져 있다
이바노비치 설명하고 13 이바노비치 교수는 이 청동거울이야말로 동서문
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설
명하고 있다
청동거울 그래픽 20 청동거울에 새겨진 악기중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소, 공후, 생황, 장구, 박 비파 이렇게 6개
다. 그중 중국전통악기인 소와 생황을 제외한 나
머지는 모두 서역의 악기들이다
빅토르 비치 설명하고 여기서는 중앙아시아 민족들과 극동지역 민족
들간의 접촉이 이 시기에 가장 밀접했습니다.
이것은 유물 전체에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유물에서 나타나는 상호 연관적인 요소라든지
형태 장식의 문양 등 이런 요소들은 이곳 치타
의 특징은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점들은
상호접촉을 보여줍니다.
치타시 스케치 25 (2-3 초 후)
인구 30만의 이 작은 도시에서 중앙아시아와 극
동아시아의 문물이 만나고 있다.
먼 옛날 이곳 치타시는 중앙아시아와 극동아시아
를 잇는 중간 기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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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그래픽 26 청동거울이 발견된 치타시,
그리고 은화가 발견된 노보고르데예프카 성을 포
함해 중앙아시아의 유물이 발견된 발해의 성들..
줄긋고 10 두 지역을 이으면 새로운 발해의 길이 나타난다.
과연 이 길은 존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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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5 (보고)
취재팀 집으로 가고 8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온 취재팀은 샤프쿠
노프 박사를 찾았다.
방안의 사람들 5 발해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이 노학자는 암투병을
돋보기 든 샤박사 16 하고 있는 힘겨움 속에도 기꺼이 취재팀을 만나
주었다
(3-4초 후)
이 국제적인 학자는 취재팀에게 발해의 길에 관
지도 돋보기로 보고 4 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지도 그래픽 16 현재까지 고대 동서양을 잇는 교통로는 실크로드
로 알려져 있다. 이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그 길을 멈춘다
18 그런데 샤프쿠노프 교수는 사마르칸트에서 치타
를 지나 발해의 수도 상경성으로 가는 제 2의 동
서 교역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이 길의 이름은
담비의 길이라고 했다
샤프쿠노프 박사 인터뷰 소그드 및 중앙아시아 상인들은 항상 가능한대
로 많은 모피를 사들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
면 당시 사회의 통치자들은 모피를 많이 입었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피는 그들에게 있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담비길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게 옳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바로프스크 향토박물관 5 (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고 10 당시 발해의 특산물이 담비가죽이라는 것은 발해
와 일본의 교역에서도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호랑이 박제 13 현재 담비는 멸종위기에 있어 실제로 그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담비는 모피중에서도 최고의 상품으로 여
담비 보이고 10 겨지고 있어 러시아 북방지역에서는 현재까지도
담비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연구원 설명하고 이 진열품은 담비가죽입니다. 사냥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가죽을 만듭니다 , 그 다음 사
냥꾼이 2-3개월에 걸친 겨울 사냥에서 돌아온
후에 여자들이 이 흑담비 가죽을 가공합니다
윤기 나는 담비털 18 발해의 담비가죽이 중앙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했을 것이다.
발해 5도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 그 길은 바
로 담비길이 아니었을까.
지도 담비 길 그려지고 18 이것은 중앙아시아와 발해를 잇는 국제 교역로였
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에 부딪친다. 왜
기존의 실크로드를 이용하지 않고 먼 길을 돌아
서 갔는가 하는 점이다.
샤프쿠노프 인터뷰 10세기 이전에 중앙아시아 영토는 전쟁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터키족들과 싸
웠기 때문에 실크로드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보다는 북쪽 지역의 도로를 사용하
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는 어떤 국가도 없었죠.
그 누구끼리의 전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전한 길이었죠.
길 지도 그래픽 23 발해에는 이웃나라로 향한 5개의 국제 교역로가
있었다
그리고 멀리 중앙아시아로 가는 담비의 길이 있
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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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 칸트 트래킹 10 발해에서 사마트칸트까지는 총 000킬로미터.
실제로 발해는 이렇게 먼 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
역사박물관 외경 4 (보고)
벽화보이고 14 아프랍시압 궁전 역사박물관엔 세계적으로 유명
한 고대 벽화가 있다.
동서교역의 중심지로서 사마르칸트가 한창 번성
했던 7세기 중반,
사절들 보이고 31 이곳에는 각국에서 보낸 사신들이 모여들었다.
이 벽화는 당시 사마르칸트에 온 외국의 사신들
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중 눈에 띄는 인
물이 있다.
희미한 윤곽 속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머리에 쓴 조우관. 조우관은 고구려의 것이다
고구려 사신 13 허리에 칼을 차고 머리에는 조우관을 쓴 이 사람
은 바로 고구려의 사신이다.
(보고)
사마르칸트 34 이미 발해 이전부터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왕래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발해가 이곳 사마
르칸트까지 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마르칸트에 온 발해인, 동서문물이 쉴새없이
만나는 이 교역의 중심지는 발해에게는 새로운
시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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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5도 그려지고 10 수도 상경에서 출발하는 발해 5도는 거란, 중국,
신라, 일본으로 이어진 국제 교역로였다
상경에서 사마르칸트로 15 그리고 상경에서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담비의
길은 발해의 여섯 번째 국제 교역로였다.
이것이 발해가 구축한 아시아 네트워크다
길 트래킹 34 발해 5도와 담비의 길.
이 길을 통해 발해는 국제무역을 펼치고 부를 얻
었다 .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은 발해가 해
동성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원천이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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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신년 스페셜 역사기획 발해 2편 대륙의 제국
방송일: 2002106 조회수 : 7307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KBS 신년스페셜]
- 역사기획 발해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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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성 트래킹 4 발해의 수도, 상경성
오봉루 팬 9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도의 옛
자취는 한때 대륙을 호령했던 제국의 힘을 말
궁전터 4 없이 보여주고 있다.
계단 4 (보고)
주춧돌 12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
라였다
묘지석 15 (2초 정도 후)
이 거대한 제국의 통치자를 그들은 황제라 불렀
다. 황제의 나라, 발해는 어디까지였을까?
눈길 트래킹에서 서브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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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부: 대륙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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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팬 14 (3-4 초 후)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
진 지점에 우수리스크가 있다.
시내 트래킹 24 우수리스크는 인구가 16만에 불과한 중소도시
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
이자 경제 중심지다
지금은 낯선 이국 땅, 이 도시 한가운데에 발해
의 성이 있다.
남우수리스크 성터 팬 12 남우스리스크 성터는 지난 1950년대 초 한두
차례 발굴이 이루어진 후 발굴이 계속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관청터 12 지표 깊숙히 발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곳
은 관청 터다
피디, 교수 주춧돌 보고 21 (2-3 초 후)
관청 터 군데 군데 주춧돌이 드러나 있다
주춧돌의 거대한 크기로 보아 여기에 세워졌을
기둥의 크기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니키틴 인터뷰 주춧돌이 맨 땅위에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돌 아래의 땅에는 이런 큰 구멍이 있습니다.
그곳에 잔돌을 깔아놓았는데 그것은 수평을
잡아서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
다. 이곳의 땅은 겨울에 약 50-60센티미터 깊
이까지 얼게 됩니다. 그래서 얼음의 압력 때문
에 수평이 흔들리는것을 방지해야만 했습니다
세 사람 걸어가고 17 마치 허름한 주택가의 담벼락처럼 보이는 이것
이 우스리스크 성벽이다.
주택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성벽이 잘려졌는지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남쪽 성벽 틸업 23 (3-4 초 후)
성벽은 약 15센티미터 가량의 층이 차곡차곡 포
개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판축을 한 흔적이다.
니키틴 인터뷰 이 부분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아래가 저렇죠.
자연적이예요. 그 다음에는 나무판자를 놓고
흙으로 덮고 눌러 다지고 그 다음에 또 덮고
눌러 다지고 그 다음에 나무판자를 들어올리
고 그 다음 조금 좁혀서 피리미드 형태처럼
만듭니다.
성벽 11 지금은 이미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진 상태지만
원래 성벽의 높이는 무려 8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벽 팬 해자 17 그리고 성벽 바깥쪽으로 현재 주택이 들어서 있
는 곳은 해자가 있던 자리다. 성벽을 빙 둘러
깊은 참호를 파고 강물을 흐르게 한 해자는 성의
제1방어선이다.
라즈돌라야 강 줌인 30 우수리스크 성 주변으로 라즈돌라야 강이 흐른다
풍요의 강이라는 뜻을 지닌 이 강의 원래 이름은
수이푼 강이었다고 한다 .수이푼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인 솔빈에서 나온 말이다
솔빈, 그것은 발해의 지명이다
니키틴 교수 인터뷰 수이푼 강 유역의 모든 지역은 연해주에서 잘
알려져 있는 2개부 중 한 곳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쑈이빈이라 부릅니다. 쇼이빈은 예전에
쇼이품, 쇼이삔, 쇼이빈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
니다. 이것은 수이푼 강을 부르는 모두 같은
명칭입니다
기록 20 발해의 행정구역을 기록한 중국의 신당서에서도
솔빈을 확인할 수 있다. 솔빈부는 화주, 익주,
건주 등 3주를 통치한다. 솔빈부는 발해의 주요
행정구역이었던 것이다
니키틴 인터뷰 초기 발해사람들은 이곳에 보다 이전에 나타났
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8세기
중반부터 이곳이 발해의 영역으로 포함된 것입
니다. 그리고 이미 9세기 중반부터는 현재의
우수리스크 깊숙한 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습
니다.
지도 25 발해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
었다. 5경은 다섯 개의 대도시인 상경, 중경, 서
경, 남경, 동경을 가리킨다 .
그리고 15부 중의 하나가 현재 우수리스크 지역
에 해당하는 솔빈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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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16 (4-5 초 후)
우수리스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러시아 파르
티잔스크 지역이 나온다
니꼴라예프카성 8 이 지역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발해의 성이 있다.
니꼴라예프카 성이다.
성문으로 들어오고 27 (4-5 초 후)
발해는 행정의 중심지마다 성을 쌓아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 성도 발해의 행정
구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문으로 들어서자 광활한 성터가 드러났다
남문 5 니꼴라예프카 성은 현재 발굴된 발해의 성중에서
성벽 팬 남문 11 비교적 그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성벽과 성문의 형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보고)
철도 팬 성 내부 16 성 내부로 현재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관통하고
있는 니꼴라예프카 성은 평지에 건설된 성으로서
이 인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성에 해당한다.
성벽 걸어가고 6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로 보아 원래 높이는
10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너진 성벽들 17 무너져 내린 성벽쪽에는 돌이 드러나 있다
(3-4 초 후)
성벽의 내부는 이렇게 돌을 채우고 겉에는 흙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토성이다
해자터 10 성벽 밖으로는 성벽을 따라 깊은 참호가 둘러
쳐져 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한 해자다
줄자 재고 16 (3-4 초 후)
이 해자의 폭은 얼마나 될까?
해자의 폭은 무려 18미터.
해자와 성벽 24 (2-3 초 후)
지금은 거의 물이 말라버린 상태지만 원래 이 해
자엔 이렇게 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보고)
내부 성 팬 21 니꼴라예프카 성은 전체 둘레가 약 4킬로미터 ,
면적은 약 15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성이었다
(보고)
아이들 놀고 있고 19 (아이들 손흔드는 것 보고)
지금은 동네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니꼴라
예프카성. 러시아인들은 이 성을 어떻게 기억하
고 있을까?
러시아 꼬마 인터뷰 이 성에는 주르젠 (여진)인들이 살았고 이곳에
는 세 개의 절이 있었고 저쪽에는 곡식을 빻던
절구가 있어요.
취재팀 보이고 10 현재까지도 러시아인들은 이 성을 여진시대의 성
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절구 7 그 이전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이블리예프 인터뷰 절구 유적이네요. 8세기에서 12세기 사이의
여러 시대 사람들이 쓰던 것입니다. 농경방식
에 있어 주르젠인들과 발해인들은 매우 가까웠
습니다. 그래서 많은 도구들과 가재도구들이
많은 유사성을 가집니다. 이 물건도 마찬가지
입니다
책 넘기고 5 무엇보다 이 성에 발해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
취재팀 서 있고 4 실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유물이 발견됐다.
부절 보이고 10 바로 이것이다.
(보고)
부절 줌 아웃 18 청동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부절, 부절은 상대
방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하나의 물건을 두 개
로 나눈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부절의 왼
쪽에 해당한다, 다른 한쪽은 중앙정부에서 보관
탁본 5 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절 4 (보고)
그래픽 부절 15 니꼴라예프카 성의 부절이 오른쪽 부절을 만나면
이렇게 세로로 합동이란 글이 완성된다
(보고)
뒷면 34 부절의 뒷면에는 부절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글
씨가 새겨져 있다. 좌효위 장군, 이것은 발해와
당나라에서 주로 사용한 고위 관직이다
섭리계는 사람이름이다. 이름 끝자인 계는 말갈
계통의 발해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섭리계라는
이 고위급 관리가 부절의 주인공인 것이다.
기차 지나고, 성 줌 아웃 26 (3-4 초 보고)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크고 견고한 성채,
그리고 좌효위 장군 섭리계와 같은 고위급 장군
이 주둔해 있었다면, 분명 이 니꼴라예프카 성은
발해의 주요 행정구역이었을 것이다
지도 18 (2-3 초 후 )
청동 부절이 출토된 니꼴라예프카 성은 발해 행
정구역 5경 15부중에서 정리부의 소재지로 밝혀
졌다
속 일본기 30 영토는 고대국가에서 그 나라의 융성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다, 발해의 영역은 어디까지 였
을까?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옛 터전을 회복했다고 쓰고 있다.
기록 20 중국의 신당서는 발해의 영역을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발해가 점차 영토를 넓혀 나가, 결국엔 그 영역
이 사방 5천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지도 그리고 23 사방 5천리는 과연 어느 정도 규모일까?
(다 그린 후)
기록이 다소 과장돼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발해
의 영토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외경 5 (보고)
회의하는 취재팀 17 발해는 우리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해의 구체적인
경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취재팀은 발해가 과연 어디까지 미쳤는지 그 영
지도 동해안 줌인 12 역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2-3 초 후)
먼저 발해의 동쪽 경계선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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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길 트래킹 13 (보고)
해 줌 아웃 9 취재팀은 연해주의 동쪽 끝을 향해 달렸다.
그 끝은 올가만이라는 바다로 이어진다
바닷가 트래킹 5 발해는 여기까지 왔을까?
길 팬 언덕 올라오고 19 (5-6초 보고)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올가만 인근 산비탈에
서 고대 유적이 발굴됐다. 시니에스칼르이 유적
으로 불리는 고대 취락지였다
유적 22 (3-4 초 후)
발굴 현장을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렴풋이 그 위치만 알아볼 수 있을
뿐, 취락지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도면 보고 10 발굴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이 가파른 산비탈에
에서 10여 채의 주거지 터가 발견됐다고 한다
니키틴 교수 인터뷰 여기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았던 때가 거의
15000년 전입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살던
땅의 상층부를 보면 발해시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상층부가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유물 팬 10 시니에스칼르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양한
시기에 걸쳐 있다. 그만큼 이 취락지가 오랜 세
석기 4 월에 걸쳐 사용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자기와 장신구 9 (보고)
발해유물 팬 10 그런데 그 중에 눈에 띄는 유물들이 있다
(보고)
청동방울 11 마치 두 개의 눈이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청동방울이다.
시니에스칼르이에서 출토된 이 청동방울은
세 개 비교 14 발해 귀족들의 무덤인 중국 육정산 고분과 니
꼴라예프카 성에서 출토된 방울과 일치한다.
발해는 여기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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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20 (7-8초 보고)
취재팀은 이번엔 발해의 북쪽 경계를 찾아 나섰
다. 그 여정에서 마리아노프카 성을 만났다
(보고)
갈대 숲 지나고 7 오랫동안 인적이 끊겼는지, 성안엔 사람 키를
넘기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니키틴 설명하고 이곳이 성문의 중앙부분입니다. 좌우측 양쪽에
두 개의 큰 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 위에 성문
의 주요 시설들이 있었습니다. 이곳 중앙부에
더 어떤 시설이 있었고 성문이 있던 곳은 약간
솟아올라 있습니다.
성팬 23 마리아노프카 성은 둘레가 1.3킬로미터로
자그마한 성이다.
지금까지 이성은 모두 세 번에 걸쳐 발굴이 이루
어졌는데 그 결과 8세기에서 13세기까지 500년
동안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사진 9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발굴작업을 진행한 1995
년, 마리아노프카성에서는 주목할 만한 유물들이
동물뼈 8 출토됐다
(보고)
골제 장식판 13 뼈로 만든 이 장식판에 새겨진 무늬들은 모두
발해의 것이다.
(보고)
토기 7 유물 중에는 고구려의 양식도 눈에 띄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수키와 4 이 연꽃무늬 수키와다
성벽 걸어가는 취재팀 12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약 3미터, 원래 높이는
6-7미터였다고 한다.
성벽위로 올라서자 이 성이 발해의 성임을 알려
주는 시설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키틴 걸어오고 여기 모퉁이 쪽에 치가 있습니다 . 치의 돌출
부죠. 이 성의 영토를 방위하는 시설입니다.
이것은 고구려가 생각해낸 것입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성벽에서 이렇게 앞으로 돌출된
것이죠.
치 그래픽 14 (4-5 초 후)
1200년 전,성벽의 원래 모습은 이러했을 것이다
성 팬 10 모두 12개의 치가 설치돼 있는 마리아노프카성.
이 성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이다
니키틴 설명하고 발해시대 말에 이미 이곳에 도시가 형성됐을
겁니다. 왜냐면 북방민족들과 발해와의 교역을
위해 여기에 국경도시가 있었다고들 하거든요.
지도 줌인 34 현재까지 발굴된 발해의 성중에서 최북단에 위치
한 성이 마리아노프카성,
일부학자들이 이성을 발해의 북방한계선으로 잡
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더 북쪽으로는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발해의 성이 발견될 가능
성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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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길 트래킹 20 (3-4 초 후)
취재팀은 발해의 흔적을 찾아 마리아노프카성의
북쪽으로 향했다.
하바로프스크 팬 코 17 하바로프스크를 끼고 흐르는 우수리강에는 섬이
하나 있다. 코르사꼬프 섬이다.
지난 70년대 이 섬에서는 1500개의 고분이 발
견돼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코르사코프 고분군 5 취재팀은 코르사코프 고분군에서 발해의 흔적을
유수리강 7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마랴빈 안드레이 인터뷰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전반적으로 아무
르 강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어느 정도는 연해주의 발해문화와 유사성도 있
습니다.
민족한 연구소 8 취재팀은 코르사코프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을
확인하기 위해
메드베제프 보이고 11 메드베제프 박사를 찾았다.
메드베제프 박사는 4년동안 코르사코프 고분군
발굴작업에 참여한 고고학자다
발굴보고서 보고 8 당시 모두 500기의 고분을 발굴했는데, 고분의
연대는 7세기에서 11세기까지였다
열쇠 열고 10 메드베제프 박사는 취재팀에게 당시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여 주었다.
작은 불상 집고 9 10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이 작은 불상은 7-8세
기 즉 발해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메드베제프 인터뷰 고구려 시대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불교식 의상
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구려시대 문화의 주류
였던 고구려의 불교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무
엇보다도 이러한 의상에 주목합니다. 화려한
의상에 어깨나 등을 이렇게 싸고 목까지 오는
모양, 그리고 다리는 원추형으로 서 있죠. 이런
전반적인 특색들이 고구려 문화것입니다.
유물상자 9 고구려 양식의 불상이 수입됐거나 선물로 흘러들
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발해의 흔적은 비
취재팀 2 단 불상 뿐만은 아니었다
장식용 머리핀 15 이 장식용 머리핀 역시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형태라고 한다
(보고)
메드베제프 인터뷰 이것은 현지 생산한 것이 아닙니다. 호사스런
여성용 머리핀 장신구인데요. 이것은 발해인들
에 의해서 남쪽 영토에서 온 것으로 추측됩니
다
화살촉 팬 7 (2-3 초 후)
고분군에서는 대량의 화살촉도 발굴됐다.
풀샷 5 이 화살촉 중에서 취재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
명적 5 었다. 바로 이 것이다.
고구려 벽화 17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수렵도에는 고구려인들
들이 독특한 화살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신호용 화살인 명적이다
출토화살 15 코르사코프 고분군에서 출토된 이 화살은 고구려
명적과 거의 흡사하다.
(보고)
화살촉들 8 그 외에 끝이 두 갈래로 갈라졌거나 주걱모양인
화살촉들도 눈에 띈다
메드베제프 설명하고 이것은 단지 전투를 위한 것뽄만 아니라 사
냥에서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이런 주걱처럼
생긴 끝 부분은 전투에서 상대에게 좀더 치명
적인 상처를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살촉 비교 16 이런 화살촉들은 발해의 니꼴라예프카성과
마리아노프카 성에서도 똑같이 출토됐다. 이
화살촉들은 발해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메드베제프 인터뷰 발해가 어느 정도 일정한 발전에 도달하게
됐을 때 발해의 국경은 멀리 북쪽으로 확장됐
습니다. 그리고 발해 인구의 일부가 우수리지
역, 즉 코르사코프 고분 지역과 아무르 지역으
로 이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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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23 (3초 보고)
우리는 역사기록 속에서 발해의 북쪽영역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은 구당서에 기록
된 발해의 영역이다
남쪽은 신라와 닿고 월희 말갈에서 동북부로
흑수 말갈까지 이른다
길 트래킹 20 발해의 동북부 영역을 알기 위해서는 흑수말갈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말갈족은 모두 7개의 부락
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말
갈족이 바로 흑수말갈이다.
신당서 흑수말갈전 20 또 이런 기록도 보인다.
신당서 흑수말갈전에 의하면 발해가 강성해지자
흑수말갈이 발해에 복속되면서 더 이상 중국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규철 교수 인터뷰 흑수말갈은 815년부터 당나라에 대한 조공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있습니
다. 이런 사실로 볼 때 흑수말갈은 815년부터
약 백여년 가까이 발해가 멸망하는 그런 즈음
까지 발해에 복속돼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강 팬 하바로프스크 25 (5-6 초 보고)
발해가 복속한 흑수말갈의 중심지는 지금의 러시
아 하바로프스크로 알려져 있다.
(보고)
하바로프스크 18 러시아 극동지방의 최대도시인 하바로프스크.
지금 그곳엔 발해는 물론 흑수말갈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먼 옛날 발해는 이곳 하
바로프스크까지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눈길 트래킹 15 (4-5 초 후)
흑수말갈의 후예를 찾아 취재팀은 다시 길을 떠
났다. 흑수말갈은 어디까지 살고 있었을까?
팬 자리 마을 8 하바로프스크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자리 마을이 있다.
썰매 끄는 사람 4 총 0가구가 모여 사는 아주 자그마한 마을이다
아저씨 인사하고 8 (5-6 초 보고)
이 마을 주민의 60%가 나나이족인데
아이들 10 전형적인 북방계 몽골리안의 모습한 이들 나나이
족이 흑수말갈의 후예들이다
집 외경 6 (보고)
고기 자르는 할머니 15 취재팀은 대대로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뉴라 할머니를 만났다. 올해 79세인 뉴라
할머니 순수한 나나이족 혈통을 타고났다.
생선껍질 벗기고 16 지금도 이 곳에 살고 있는 나나이족들은 어로와
수렵을 주된 생계로 삼고 있다. 뉴라 할머니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할머니의 아들은 벌써
취재팀 앉아있고 8 몇 개월 째 겨울 사냥을 나가 있고 할머니는 현
재 딸 라리사와 함께 지내고 있다
라리라 인터뷰 겨울에 남자들은 사냥하러 나갔어요. 그들은
사냥하러 멀리까지 나갔고 사냥이 성공적이냐
성공적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가족의 풍요로운
삶이 좌우되었죠.
마을 팬 15 아무르 강가의 소수민족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나나이족, 흑수말갈의 후예인 그들을 통해
발해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 29 (4-5 초 후)
지금까지 취재팀이 확인한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하바로프스크 일대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시니에스칼레이 유적이 발굴된 바닷
가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발해는 서쪽으로 어디까지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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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성 10 (2-3 초 후)
중국 산동반도에 위치한 등주성은 당나라의 군사
적 경제적 요충지였다. 이곳 중국땅에서 일어난
배 8 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는 발해의 서쪽 영역
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다
지도 줌인 15 (5-6 초 보고)
732년 , 발해는 당나라의 해군기지인 등주를 공
격한다
전쟁 이미지 16 기습적인 발해의 공격을 받은 당나라군은 변변
한 대항한번 못하고 대패했다. 등주성을 점령함
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한 발해는 다시 돌
아갔다
자치통감 21 (3-4 초 후)
이 사건을 중국의 역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
다.
무예가 장수 장문휴를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에 쳐들어와 자사 위준을 살해하였다
지도 31 (3-4 초 후)
발해가 등주를 공격한 그 이듬해 ,이번에는 발해
무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의 마도산지역
을 공격한다
이 두 번의 공격 루트를 주목해 보자.
모두 요동반도의 안정이 없이는 공격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한규철 인터뷰 발해가 서쪽으로 요동까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이라든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알
수 있습니다. 732년에 발해가 등주를 공격한
사건은 발해가 요동을 차지하지 않고는 불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발해가 멸망할 즈음
요동지역은 거란과 발해가 격전했던 지역이었
습니다. 이것은 발해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근
거고 또 발해사신을 요수의 객이다 이렇게 표
현도 했는가하면 발해는 요양이라 이렇게 대신
표현했던 말도 있었습니다. 이런걸 통해 볼 때
요동은 발해의 영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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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33 (5- 6초 보고)
결국 발해는 북쪽으로는 하바로프스크 일대에
동쪽으로는 연해주 바닷가에
그리고 서쪽으로는 요동반도에 이르렀다.
이것은 고구려 영토의 1.5배가 넘는 우리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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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12 (4-5 초 보고)
취재팀은 발해의 실체에 좀더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중국 화룡현을 찾았다
건물 줌인 9 화룡현 외곽지역에는 소중한 발해의 유적이 있다
정효공주묘 비석 4 발해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다
건물 외경 7 얼마전 중국정부는 유적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무덤 위에 큰 건물을 지어놓았다.
땅에서 자물쇠로 11 현재 정효공주 묘는 중국정부의 철저한 통제속에
외부인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보고)
발굴사진 18 정효공주 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79
년. 그 이듬해에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그 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발해의 정치사회상도 조금씩 밝
혀지기 시작했다
도록 7 (2-3초 후)
안타깝게도 실물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전호태 교수 보이고 7 취재팀은 울산대 전호태 교수의 자문을 얻어 정
효공주 무덤을 복원해보기로 했다.
무덤의 구조도 10 복원을 위해 그동안 학계에 보고된 발굴보고서와
사진 등을 근거자료로 사용했다
탑 돌고 6 (2-3 초후)
정효공주묘는 무덤 위에 벽돌로 쌓은 탑을 세웠
다.
계단생기고 9 이 탑 아래에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좌우 무사벽화 9 무덤입구의 좌우벽면에는 공주의 무덤을 지키는
무사가 그려져 있다 , 입구를 지나
무덤칸 벽화들 팬 15 입구를 지나 무덤칸 안으로 들어서면 역시 사방
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그 한가운데 공주의 시
신을 모신 목관이 있다.
전호태 교수 인터뷰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 좌우 길에다 일종의
시위 무사죠. 무사 한사람씩 그리고 그 내부의
석실 안에도 무덤을 지키는 무사외에 시종이라
든가 악사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10명을 거의
실물크기 가깝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한면에 한사람씩 들어갈 수 있도록 아주
제한해서 그리고 그 외엔 아무런 장식이 없어
요.이 양식은 당시에 당을 중심으로한 문화권
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형태의 인물배치
는 이후에 발해를 무너뜨렸던 거란의 요나라.
혹은 요와 대립했던 한반도의 고려 이런 것에
벽화문화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
이 이후에 이 지역들에서 전승된다는 것이 오
히려 중요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벽화 팬 30 벽화속에 그려져 있는 12명의 인물들은 누구일
까?
궁궐을 지키는 무사
공주를 호위하는 시위
공주의 시중을 드는 시종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그리고 내시들이다
이들은 생전에 모두 공주를 보좌하던 인물들이었
을 것이다
인물 나오고 18 이 벽화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발해인과 만날 수
있는데
얼굴은 둥글고 큰 편이고 ,눈은 작고 눈썹이
가늘며, 입술은 작고 붉은 편이다
세 사람 의복 9 또한 그들은 무사를 제외하고 당시 국제적으로
유행했던 단령포라는 옷을 입고 있다
조우현 교수 인터뷰 단령포 패션이라고 하는 것은 그당시 일본까지
통일신라 발해 북방 유목민족의 모든 계열, 현
재의 우즈베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이란지역까
지 이르는 곳에 아주 광범위하게 우행되어졌던
복식구조이기 때문에 하나의 국제적인 모드로
봐도 되리라고 보구요
비석 32 무덤의 입구에선 묘지석이 발견됐는데, 딸을
잃은 아버지의 비통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내용 보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바로 이 황상
이란 단어다. 정효공주의 아버지 문왕을 발해인
들은 황상 곧 황제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전호태 교수 인터뷰 고구려적 천하관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계승을
해서 예를 들어서 말갈 소수민족이라든가 만주
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해서 발해중앙 정부를 황
제국으로 예우하도록 요구를 하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하는 방식. 그래서 대내적으로는 황제
국에 맞는 용어라든가 개념을 써서 황상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쓴다든가 왕부를 개설을 한다든
가 이런 방식을 썼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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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다리 줌인 16 (3-4 초 후)
취재팀은 일본 구라시키시로 향했다. 이곳에 발
해가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유물
이 있다고 한다
차 트래킹 6 (보고)
구라시키시 부감팬 10 일본 구라시키시
오오하라 미술관 13 이 도시의 오오하라 미술관에는 그 경위를 알 수
없지만 바다를 건너온 발해의 유물이 있다
유물 훑고 17 (보고)
미술관 한쪽 벽면에 서 있는 함화 4년명 비상
함화 4년, 즉 834년 발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비상 틸 다운 13 높이 64센티미터의 이유물은 상단에는 아미타불
을 중심으로 보살들이 조각돼 있고 하단에는 모
두 93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 팬 10 이 명문은 비상이 만들어진 경위를 간략하게 적
고 있는데, 그 내용은 허왕부의 관리였던 조문휴
조문휴와 허왕부 21 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 허왕부라는 관청의
이름이다. 이는 발해에 왕으로 봉해진 이가 있었
다는 뜻이 된다
전호태 인터뷰 허왕부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당시 중국 쪽의
제도나 이런 것을 참조해보면 왕부를 개설할
수 있는 곳은 황제를 주장하는 국가 혹은 황제
의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개설할 수 있는 그런
기관인데 현재 발해의 경우 다른 사례가 확인
되지 않지만 일단 허왕부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등장하니까 일단 발해왕의 위상에 대한 별다른
관념 이른바 황제국을 주장하는 그런 관념이
존재하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개설된 제도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속 일본기 34 당시 국제사회에서 발해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
는 대목이 있다. 발해가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
천손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고구려처럼 일본
과의 관계를 형제가 아닌 구생 즉 장인과 사위라
는 호칭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발해는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 천손이라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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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15 (5-6초 보고)
취재팀은 황제국의 수도 상경성을 찾아가는 길목
에서 동모산을 만났다
산성 올라가고 4 동모산에 서있는 성산자 산성
비석 16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그 기틀을 다졌다. 때는 698년. 고구려가 멸망
한지 30년만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성문 15 그후 급속도로 성장한 발해는 거대한 영토를 바
탕으로 대륙을 호령하는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된
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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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9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 있는 곳은 중국 영안현
(보고)
동경성진 19 수도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엔 커다란 시장이
서 있다. 1300년 전에도 이곳은 수도를 드나드
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보고)
발해진 13 지금은 아예 발해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예전에 이곳은 발해의 주민들이 살던 상경성의
외성이었다
비석 5 상경용천부 유지라는 비석이 이 곳이 상경성임을
성벽 21 말해 주고 있을 뿐, 170년 동안 발해의 수도로
서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상경성의 유적들은 아
무렇게나 방치된 채 훼손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상경성의 외성 벽이다.
흉륭사 7 상경성의 절 흉륭사,
석등 24 불교를 숭상했던 발해는 상경성에 모두 9개의
절을 짓고 절 앞에는 이렇게 석등을 세웠다.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이 석등은 발해의 예술
성을 보여준다
돌사자 10 또한 상경성의 절터에서는 정혜공주무덤에서 발
견된 것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돌사자와
치미 4 거대한 크기의 치미
귀면와 4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기와들이 발견되었다
수막새 4 (보고)
중앙 길 6 상경성의 외성지역인 발해진을 달리면
길 달리고 , 성벽보이고 10 멀리 끝없이 이어진 성벽이 보이는데 , 이것이
상경성의 성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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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성전체 15 (2-3 초후)
상경성은 전체 둘레가 16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성으로 이는 조선시대 한성과 같은 같은
크기다
주작대로 만들어지고 19 성 중앙으로 110미터에 이르는 주작대로가 지나
고, 반듯반듯한 도로는 마치 바둑판처럼 질서정
연하게 만나고 있다 . 상경성은 잘 설계된 하나
의 계획도시다 .
거주지역 16 주민들이 사는 외성엔 총 81개의 거주지역이 있
었다. 1구역의 크기는 가로 500미터, 세로 300미
터 .이 크기로 보아 상경성의 총 인구는 20만명
으로 추정된다
이병건 교수 보이고 20 (2-3 초후)
취재팀은 상경성을 영상복원하기 위해 동원대 이
병건 교수의 자문을 구했다. 아직까지 상경성의
전체 모습이 복원된 적은 없기 때문에 보다 면밀
한 관찰이 필요했다
이병건 인터뷰 상경성이 당시에 장안성하고 도성제도가 매우
유사합니다. 장안성뿐 아니라 일본의 평성경하
고도 상당히 유사한데 당시에 이러한 도성체계
는 중국의 장안성을 모방했다기 보다는 동북아
시아에 가지고 있던 도성제도의 보편적인 그런
도성체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구요, 장안성하고 다른 거는 장안성이 남북
으로 긴 장방형인데 비해서 상경성은 동서로
긴 장방형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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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성지 비석 6 상경성의 내부에는 두 개의 성이 있는데 가장 안
쪽의 성이 궁성이다
오봉루 팬 10 궁성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정문인 오봉루를 지나
야 한다. 현재까지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는 오봉
문 입구 3 루는 일단 규모부터 거대하다.
성벽 7 돌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벽의 높이는 5미터
(보고)
성벽 위의 주춧돌 팬 12 성벽 위에 오르면 동서길이 42미터 남북으로
27미터에 이르는 넓은 터가 펼쳐지는데, 그위엔
주춧돌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주춧돌 훑고 22 (3-4 초 후)
주춧돌의 거대한 크기로 보아 이곳에 서 있던
건물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봉루 짓고 26 궁성의 정문 오봉루를 복원해 본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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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팬 10 오봉루를 지나면 발해의 황제가 국사를 보고
생활을 하던 궁성터가 나타난다
회랑 주춧돌 14 (2-3 초 후)
오봉루에서 궁전으로 이어진 이 주춧돌은 회랑을
세웠던 흔적이다
제1궁전지 풀샷 4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제1궁전터 .
계단 4 약 3미터 높이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성벽 13 얹었다.
궁성의 성벽은 현무암으로 쌓았는데 돌과 돌 사
이에는 회를 발라 마감했다.
회 만지고 16 (5-6 초)
지금도 궁성 안에는 당시 사용하던 회의 잔해들
이 남아있다
궁전 터 팬 10 제1궁전 터의 규모는 가로 56미터,
세로 25미터로 역시 웅장한 규모의 주춧돌이
궁전에서 본 오봉루 동서로 다섯줄씩 배열돼 있다
제1궁전 복원 38 (30초 정도 보고)
이것이 발해의 황제가 국사를 보던 제1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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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터 팬 14 제 1궁전터 뒤로는 일직선으로 모두 네 개의 궁
전터가 이어져 있다
(보고)
발굴사진 15 그중에서 황제의 침실에 해당한는 제 4궁전터에
서는 온돌이 출토됐다.
(보고)
땅 지나고 10 지금도 궁성안에는 가는 곳마다 발해의 기와들이
흩어져 있다. 상경성의 거대한 건물을 덮기 위해
기와조각들 7 엄청난 규모의 기와를 구웠을 것이다
(보고)
기와조각 들고 19 그런데 발해의 기와중에서 독특한 모양이 눈에
띈다 . 기와에 새겨진 이것은 문자다 . 문자기와
는 발해만의 독창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보고)
팔보유리정 18 궁성안에는 팔보유리정이라 불리는 왕실 우물이
있다. 입구를 팔각형모양에 내부는 원으로 구성
된 이 우물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우물양식을 이
어받은 것이다
정원터 팬 22 (2-3 초 후)
또한 궁성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정원터가 보인
다.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못에 물이 남
아 있는 이 정원은 경주 신라의 안압지와 거의
유사한 형태였다고 한다
차 달리고 15 756년 발해의 수도가 된 이래,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영화로웠던 시절을 보낸 수도 상경
성, 이제 수도 상경성의 그 화려했던 옛 모습을
복원해 본다.
상경성 복원 57 (궁전 다 들어서면)
다섯 개의 궁전이 있는 궁성 주변으로는
3성6부의 관청이 들어선 내성이 둘러싸고 있다
(외성 보이면)
그리고 그 앞으로는 주민들이 거주지인 외성이
형성돼 있다.
이 거대한 도시가 바로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다
한규철 인터뷰 발해를 영토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보다
더 넓은 강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
고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였었다 이것은
종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발
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였었다 그리고 신라
도 일본도 거란도 등을 통해서 매우 개방적인
경제활동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던 왕조였다 이
렇게 볼 수 있습니다.
상경성 줌 아웃 34 1300 년 전, 우리역사의 한 시대는 분명 영화
로웠다. 그 곳엔 한국사의 무대를 넓힌 대륙의
제국, 발해가 있었다.
과거의 지나간 역사에 그치지 않고 미래의 꿈을
주는 역사, 그것이 우리가 찾은 발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