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food delivery box [배달통]
식구(食口)는 늘 신선하다?
뒷자리에 빨간 배달통을 달고 달리는 작은 스쿠터는 도시의 틈바구니에서 놀라운 순발력과 역동성을 발휘하는 사물이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에서 역동적인 것은 스쿠터가 아니라 손님의 니즈를 반영해서 어디든 도착하는 '배달통'이다.
어린 시절 기억을 포함하면 빨간 배달통보다 더 낯익은 배달통은 중국집 은색 배달통이다. 예전에는 그 은색 배달통을 스쿠터 뒷자리에 실은 게 아니라 중국집 배달부가 한 손에 쥐고서 곡예운전을 하는 풍경이 흔했다. 그렇게 곡예운전을 하면서도 한 손에 쥔 배달통속 짜장면이 쏠리거나 짬뽕국물이 쏟아지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은 놀라웠다.
배달통의 생명은 시간 단축에 있다. 주문하는 사람과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시간에 예민할까. 아마 배달하는 사람 쪽이지 않을까. 배고픈 거야 배를 만지면서 잠시 참으면 되지만, 배달시간을 줄이는 일은 음식점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니 말이다. 배달시간은 단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요리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배달이 지체될수록 짜장면발은 불고 짬뽕국물은 식는다.
소비 사회가 도래하면서 외식 소비가 일상화되었다. 이젠 어릴 때처럼 운동회날이나 생일이나 아이가 아픈 날이 아니라도, 또는 특별하게 바쁜 일이 없어도 집에서 다양한 음식을 주문해서 배달해 먹는 일이 잦다. 배달통은 특별한 선물이 아니다. 배달통은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전국 어디나 실시간에 도착한다. 그러므로 배달통 속. - 이제 사실상 '외식'이 아니라 '자기 집 부엌'을 대행하는 음식이 되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점점 더 배달 시간의 지연을 참지 못하고, 요리 신선도가 온전히 유지되지 못한 음식을 짜증스러워 한다. 왜일까. 믿거나 말거나 심리소설 같은 과감한 해석을 감행해보자. 지연된 배달통에
대한 불쾌함은 어쩌면 배달통의 음식이 대행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착각하는 '자기 집 음식', '자기 집 부엌'의 신선도가 유지되지 않아서가 아닐까. 여기에서 배달통이 최종적으로 건드린 무의식은 금방한 밥처럼 늘 '따뜻하다(따뜻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정'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아닐까. 가정을 뜻하는 '식구(食口)'란 단어도 결국
'밥을 먹는 입'이란 뜻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식구도 엄밀히 보면 나 아닌 타인이다. 나 아닌 존재를 만나는 장(場)에는 늘 어긋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은가.
가정에 관해 우리는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