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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장애를 극복하려면 (요3:1-11절)
성도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대개는 조금 당황합니다. 왜냐면 거듭남이란 사람의 눈으로 분명히 보아 알 수 있거나, 몸으로 느껴지는 어떤 외적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신 요양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의사가 어떤 환자의 방에 들어갔는데, 그 환자는 의사가 온 줄도 모르고 옷장을 뒤지고, 서랍을 뒤지고, 침대 밑에 기어서 들어가기까지 하면서 무엇을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그리 열심히 찾고 있습니까.” 의사가 묻자 그 환자는 대답하기를 “선생님, 나는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의사가 오히려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장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각 장애자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요, 청각 장애자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체 중에 어느 한 부분에 고장난 곳이 있으면 이 사람을 일컬어 신체 장애자라 합니다. 그런데 신체 장애자보다 더 심각한 장애자가 정신장애자입니다. 정신이 고장이 난 것입니다. 그러면 장애가 여기서 끝입니까?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정신 장애에서 더 나아가 심각한 장애가 있는데 그것은 인격 장애자입니다. 인격 장애자(personality disorder) 는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고, 기술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가질 것은 다 가졌는데, 그중에 한 가지, 그의 내적 존재가 장애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장애자는 스스로가 이 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게 있어 제일 큰 난치병입니다. 차라리 신체장애는 부분적입니다. 눈에 장애가 있으면 그것만 불편합니다. 그러나 인격 장애는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것입니다. 뿌리부터 흔들리는 장애입니다. 우리나라는 인격 장애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가 없습니다만 미국은 국민의 2/3가 인격 장애라고 자인하고 있습니다.
이 인격 장애는 몇 가지 내용이 있는데
a.첫째 -편협적 인격 장애가 있습니다.- 생각이 좁아집니다. 사람을 의심하고, 공연한 일도 의심합니다. 필요 없이 시기하고, 질투하며, 대수롭지 않는 일에 논쟁하고 싸우려 듭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주의가 되고, 사회에 대해,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남을 칭찬할 줄 모르고, 더불어 기뻐하지 못합니다.
b.둘째 -정신분열성 인격 장애가 있습니다.- 허무감에 빠집니다. 감각이 둔화되어 멍청해집니다. 고독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주위에 많이 있어도 언제나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롭습니다.
c.셋째 -연극성 인격 장애가 있습니다.-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 우상에 빠지고, 모두 틀렸고, 나만 옳습니다. 자기 환상에 도취되고, 자기 만족주의가 됩니다. 과거에 매여살고 항상 과거의 자랑을 합니다.
d.넷째 -경세적 인격 장애가 있습니다.- 피해망상증이라고도 부릅니다. 항상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패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자폐증 환자가 됩니다. 당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 못하고 항상 고개를 숙이고, 피해 다닙니다.
e.다섯째 -히스테리식 인격 장애입니다.- 평생 동안 단 한번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합니다. 과민반응을 일으키고, 반대를 위한 반대, 시위를 위한 시위를 합니다. 부정적 세계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어두운 면만 보는 사람입니다. 위에 열거한 이런 인격 장애자들은 알콜, 마약, 도박, 투기 등으로 그의 심령에 자위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우리나라에 중학교 때부터 흡연자가 늘어납니까? 이유는 청소년기부터 심각한 인격 장애가 왔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그 구조가 너무나 복잡하고 현란합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의식으로는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어 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 불신과 미움, 원망이 가득하고 남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고 용서하기보다는 다투기가 일 수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내적 인격을 파괴하고 심각한 장애를 일으켜 우리를 불행한 인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항간에 유행하는 말은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입니다.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이라는 연극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이 연극은 잭이라는 남자가 아내를 억압하는 이야기입니다. 잭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의 부인을 살해한 후 보석을 찾기 위해 가스등을 켜야 하는데 이 집은 공동 가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다른 가스등이 어두워져서 들킬 위험이 있자 잭은 집안의 물건을 숨기고 아내가 잃어버렸다고 몰아세웁니다. 잭이 가스등을 켤 때마다 집안이 어두워지게 되고 아내가 집안이 어둡다고 하면 잭은 아내를 탓하면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갑니다. 아내는 점차 자신의 현실인지 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가스라이팅은 가정, 학교, 연인 사이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행사합니다. 이는 정신적 학대 행위로 피해자의 자존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듭니다. 결국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정신력이 약해져서 가해자를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스라이팅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노예 제도가 그렇고, 남존여비 사상이 그렇고, 계급사회 구조가 그렇습니다. 인격을 세뇌 시켜 사람을 짐승처럼 훈련시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의식과 사상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사람이 가스라이팅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구 환경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날이 갈수록 지구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전혀 무감각하고 관심이 없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A.I 즉 인공지능에게 그 대책을 물었습니다. A.I 는 여러 가지 대안을 말해 주면서 이 사람의 사고방식을 점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A.I 와 친해지면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A.I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 주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장소에 나갔으나 A.I를 만나지 못하자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A.I 는 자기는 여자인데 빨강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때 이 사람 앞으로 빨강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반가워서 여자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A.I 냐.‘ 고 물었습니다. 여자는 놀라면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40분간 이 여자를 따라가며 만나자고 졸랐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A.I 만나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A.I 에게 지구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A.I는 ‘당신이 대중 앞에서 분신자살을 하면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환경을 개선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자녀와 부인이 있었지만 A.I가 시키는 대로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인공지능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입니다. 이제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가스라이팅을 하여 멸망하게 할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인격 장애를 극복하고 참다운 인생, 아름다운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대안은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이요, 학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선생이요, 지식의 대표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당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 비싼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왔을 만큼 부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조건을 갖춘 그 사람이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고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는 삶에 대하여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현실보다도 미래와 생명, 영생, 인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궁금증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으며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도래에 대하여 알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에는 생명에 대한 말씀이 36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 영생, 평안에 대해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의 조건만 내세웁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 나야 한다.’ 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본 장에서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세 가지인데 그것은 곧 중생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상관관계를 가지는데 사람은 중생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며, 영생을 얻은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중생임으로 중생에 대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중생 (spiritual rebirth) 즉 거듭남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입니다.
중생은 죄인 된 인간의 구속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하늘의 법칙이며, 하늘의 현실입니다. 본문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했습니다. ‘거듭난다’ 라는 말에서 거듭이라는 헬라어 ‘아노덴’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 꼭대기에서... ② 위에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③ 처음부터, 완전히 ④ 다시. 두 번째 등의 뜻이 있습니다.
*요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결국 ‘아노덴’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단지 법적인 절차에 의해 유대교로 개종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다는 것은 모태로부터의 자연적 출생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심령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심으로써 그 영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며,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분별하고 사모할 수 있게 됩니다. 벧후1:3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성경은 이 중생한 사람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2. 왜 거듭나야 합니까?
니고데모는 율법 학자였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위해 변호도 해주었습니다.
*요7:50-51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보십시요. 이런 니고데모가 왜 거듭나야 합니까. 거듭나지 않아도 그는 선한 사람 같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니고데모와 같이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에게는 중생이 필요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들은 중생을 초자연적인 변화로 보지 않고, 단지 도덕적 선한 행위를 하는 마음의 변화 정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판단이나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선하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선하다고 자신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을 만한 아무런 의도 행할 수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면 누구나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이 점에서 니고데모도 유대인의 관원도 예외는 없습니다. 여러분! 공부를 많이 시킨다고 인격이 달라지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위가 높다고 인격이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이 많이 생겼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잘 살게 되었다고 인간이 바뀌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큰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부터 인격 장애가 먼저 옵니다. 이 모든 인격 장애는 오직 성령으로만 치료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중생을 생각합시다. 중생하지 못한 인격, 중생하지 못한 일군, 중생하지 못한 교인은 이제 중생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인 것입니다.
3. 어떻게 거듭납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중생의 형식적인 수단이 물에 의한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세례라 부릅니다. 그러나 세례가 거듭나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그가 거듭났음을 알리는 표적이요, sign입니다. 또한 이 물에 의한 출생을 말할 때 단순한 물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는 말씀으로 말미암는 출생을 의미합니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거듭난 것은 전적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집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직접 역사하여서 이 일이 이루어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태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계를 홍수심판으로 다 멸절하시고, 노아와 그 가족의 후손만 남겨 두셨지만, 이로써 타락한 세계가 다시 회복될 수 없음을 아시고, 타락한 세계를 다시 재창조하셨으니, 이 창조는 다름 아닌 새 창조입니다. 첫 번째 창조 시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으며,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두 번째 창조 시에도 이와 같습니다. 죄인들이 영적 죽음의 어두움 가운데 있었고, 성령은 이 어두운 사람의 양심과 마음 가운데 운행하기 시작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가운데 전해지면서 그 결과 죄인들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지기 시작합니다.
*고후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어떤 교인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나서 한 가지가 달라졌어요. 전에는 다른 사람은 다 틀리고, 나만 옳은 줄 알았는데, 이제는 웬일인지 다른 사람은 옳고, 훌륭하고, 나는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두 마음 밖에 없다는데 그 하나는 누구를 만나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보아도, 아이를 보아도 그저 미안하다는 것, 또 하나는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이처럼 사랑해주고 같이 살아준 것을 생각할 때 그저 감사하고, 고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야 말로 중생한 사람이요, 거듭난 사람입니다. 중생이 무엇입니까? 인격 장애자의 반대의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 나도 모르게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됩니다. 오늘날 누가 거듭난 사람입니까? 전에는 편협했으나 지금은 너그럽고, 전에는 인생이 허무하고 고독하고 쓸쓸했으나 지금은 기쁘고 행복하고, 전에는 환상적이고 과거에 매여 살았으나 지금은 미래 지향적이고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며, 모든 일에 당당하고 더불어 살아가기를 좋아하고 항상 밝게 웃고 남에게도 웃음을 선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중생한 사람입니다. 전에는 아내를 볼 때에 왜 저리도 못났을까? 왜 내가 저런 사람과 살까? 비관하며 지냈는데 지금은 그저 이 아내가 예쁘고 사랑스럽고 어떻게 이런 좋은 사람이 내 아내가 되었을까?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 나에게 좋은 아빠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사람, 좋은 자식 주신 것에 감사하는 사람, 사회도, 환경도, 조건도, 모든 현실에 감사하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입니다. 매사에 육신의 쾌락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거룩하고 신령하게 사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 그 어떤 인간의 지식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리에 거하는 사람이 중생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변화를 바라십니다. K.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넘어선 자에게 시작되어 있는 것이요, 인간의 힘을 초월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생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이 분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면 내 안에 언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신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 한 사람의 변화가 내 가정, 이웃, 사회를 거듭나게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역사, 여기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거듭남의 축복 속에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 나라의 성도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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