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삼백수 권3 오연율시 114. 등악양루(登岳陽樓)-두보(杜甫) 악양루에 올라 |
登岳陽樓(등악양루)
악양루에 올라
두보
예전부터 동정호를 소문으로 들었더니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네
오나라, 초나라가 동쪽과 남쪽에 갈라섰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호수에 떠 있도다.
친한 벗에게선 편지도 한 장 오지 않고
늙고 병든 몸만 외로운 배 안에 있네.
고향 관산 북쪽에선 전쟁 일어났다니
그저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릴 뿐.
登岳陽樓
杜甫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
老病有孤舟 노병유고주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
[通釋] 예전부터 사람들이 동정호의 기상이 웅장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왔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악양루에 올라 완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과연 동정호의 물은 드넓어서 동남쪽으로 吳와 楚를 가르고 있는 것이 보이고, 호수 그 자체로 天地를 이루어 해와 달이 그 속에서 출몰하는 듯하다. 이러한 승경(勝景)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친한 친구들은 소식이 끊어졌고, 나는 늙고 병든 채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서 여기저기를 떠다닌다. 듣자니 장안과 낙양 부근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는데, 언제쯤 이 전쟁이 그치고 나라가 평안해져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난간에 기대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린다.
[解題] 이 시는 登臨詩(등림시)로 대력(大曆) 3년(768) 늦겨울에 지은 것이다. 당시 두보(杜甫)는 57세였다. 그해 正月에 그는 기주(夔州)를 떠났는데, 병란(兵亂)으로 인해 길이 막혀서 江陵·公安 등지를 표박(漂泊)하였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공안(公安)을 거쳐 세모(歲暮)에 악양(岳陽)에 도착하였고, 이 시는 그때 악양루에 올라 지은 것이다. 악양루는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陽縣)의 서문(西門)에 있는 누대(樓臺)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정호의 풍경은 예부터 절경으로 꼽혀왔다.
시의 전반부는 동정호의 경치를 묘사하였는데, 그 기세가 읽는 이를 압도하며 특히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오초동남탁 건곤일야부)’ 두 句는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이 되었다. 동정호에 대해 말로만 듣다가 악양루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는 분명 감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후반부 4구를 보면 당시 杜甫는 가련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杜甫는 장안에서 곤궁하게 살 때 이미 폐병을 얻었고, 서남쪽으로 표박(漂泊)할 때 다시 풍비(風痹)를 앓은 까닭에 오른쪽 팔은 쓰지 못하게 되었고 왼쪽 귀는 멀었다. 당시 그의 온몸은 병들어 있었고 촉(蜀)을 나온 후에는 식구들이 모두 배를 타고 떠다니는 신세였다. 이렇듯 전쟁 통에 피란하여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악양루에 올랐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시 전반부의 장엄함이 마지막 구의 서글픔을 증폭시키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杜甫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슬퍼하고 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국가의 안위(安危)와 관련지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杜甫의 시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그의 강렬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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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역주1> 岳陽樓(악양루) :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악양시(岳陽市) 서쪽에 있는데, 당(唐) 개원(開元) 초 장설(張說)이 악주자사(岳州刺史)가 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송(宋)나라 때 중수(重修)했다. 악양루가 동정호(洞庭湖)를 내려다보고 있어 등람(登覽)의 명승지가 되었다.
역주2>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 동정호는 중국의 동남부에 걸쳐 넓게 퍼져 있는 호수이다. 오초(吳楚)는 지금의 江蘇(강소)·浙江(절강)·安徽(안휘)·江西(강서)·湖南(호남)·湖北省(호북성) 지역이다. 동정호의 동쪽 일대가 吳나라 방면이며, 남쪽 일대가 楚나라 방면이다. 坼(탁)은 ‘나누어지다’, ‘찢어지다’의 뜻이다.
역주3>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과 더불어 동정호의 장활(壯闊)하고 웅위(雄偉)한 기세를 묘사한 것이다. ≪水經(수경)≫ 湘水注(상수주)에 “동정호의 물은 그 둘레가 500여 리에 이르며,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뜨고 지는 듯하다.[洞庭湖水廣圓五百餘里 日月若出沒其中]”고 하였다. 건곤(乾坤)은 天地이다.
역주4> 無一字(무일자) : 소식이 없다는 뜻이다.
역주5>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 중원(中原)에 전쟁이 있음을 이른다. 대종(代宗) 대력(大曆) 3년(768) 8월에 토번(吐蕃)이 靈武(영무)·邠州(빈주) 등지를 자주 침략하였는데, 9월에 대종이 郭子儀(곽자의)에게 명하여 병력 5만을 이끌고 봉천(奉天)에 주둔하여 방어하게 했다.
○ 憑軒(빙헌) : 난간에 기대다
○ 涕泗流(체사류) : 눈물, 콧물을 흘리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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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루에 대한 시는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楼記),유장경(劉長卿)의 악양루(岳陽樓), 양기(楊基)의 악양루(岳陽樓), 진여의(陳与義) 등악양루(登岳陽楼) 등이 있으며 이백은 與夏十二登岳陽樓(여하십이등악양루)를 지었다.
악양루(중국어 간체: 岳阳楼, 정체: 岳陽樓, 병음: Yuèyánglóu, 웨양러우[*])는 중국 후난 성 웨양 시의 고적 웨양고성 서문의 윗쪽에 있다. 아래 쪽으로는 둥팅 호가 보이며, 앞으로는 군산을 북쪽으로는 장강에 접한다. 악양루는 강남사대명루의 하나로 손꼽힌다.
웨양러우(악양루)의 전신은 삼국시대 동오의 명장 노숙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누각이다. 당시 오나라는 촉나라의 유비와 형주를 다투고 있었는데, 215년 노숙은 동정호의 파구(巴丘)에 주둔하며 수군을 훈련시키고, 파구성을 세우면서 열군루(閱軍樓)라는 망루를 지어 수군이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하였다. 이것이 동정호의 시초이다.
716년 당나라 때 악주의 태수 장열(張說)이 이곳을 수리하여 다시 세우면서 악양루라고 이름을 고쳐짓고, 그때부터 문인재사들의 시를 읊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1044년 송나라 때 등자경(藤子京)이 이곳 태수로 좌천되면서 퇴락해진 누각을 증수하게 되는데, 그때 범중엄을 초청하여 유명한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짓게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80년 청나라 광서제 때 다시 중건한 것으로 누각의 높이는 20미터에 삼층 목조 건물로 되어 있다.
동정호 : 둥팅 호(중국어: 洞庭湖, 병음: Dòngtíng Hú, 동정호[*])는 후난 성(湖南省)에 위치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한 때 중국 최대의 담수호였으나, 4개의 하천에서 흘러드는 퇴적물과 장강의 진흙 및 모래의 유입으로 수염이 점차 축소되어 포양 호에 이어 이제는 제2의 담수호로 바뀌었다.
후베이(湖北)와 후난(湖南)은 둥팅 호를 기준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수원은 남쪽에서 유입되는데, 굴원이 빠져죽은 상수(湘水)와 자수(資水), 원수(沅水), 예수(澧水) 네 곳의 지류에서 유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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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시삼백수]등악양루(登岳陽樓)-두보(杜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