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타령
요즘 부쩍 신문이나 방송에서 부쩍 ‘금수저’, ‘은수저’ 얘기에다 ‘흙수저’까지 들린다.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도 아니고, 인도에선 근대까지 맥을 이어왔다는 카스트 제도를 연상하게 해 씁쓸하다. 하기야 한우 판매점에서도 등급으로 값을 치르고 수능이나 내신도 등급으로 나누는 세상이다. 내야 재물로는 물려받음 없고 힘써 불림도 없기에 빈손 왔다 빈손으로 가도 아무런 유감이 없다.
선인이 살아간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니 부러움을 살 만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그 부러움의 기준은 나이 들어 높은 관직에서 제 역량을 펼친 사람들이었다. 당쟁이 심했던 조선시대는 아무리 능력이 있을지라도 상대편의 집요한 모함에 정치적 부침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많은 벼슬아치들이 사약을 받거나 귀양살이를 떠났다. 대중탕으로 치면 열탕과 냉탕을 오고간 것이다.
‘복록(福祿)’의 사전적 뜻은 이렇다. 타고난 복과 벼슬아치의 녹봉이라는 뜻으로 복되고 영화로운 삶을 이른다. 복록에다 장수까지 했다면 금상첨화다. 역사 속 인물 가운데 왕은 드물어도 재상이나 예술가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조선 후기 미수 허목과 번암 채제공이 그에 해당했다. 둘 다 정치적 격랑 속에서 영의정에 올랐고 미수는 여든 여덟, 번암은 여든까지 살았다.
일전 번암 채제공이 나이 예순 일곱에 관악산을 올랐다가 남긴 ‘관악산유람기’를 읽었다. 한학자 심경호가 번역한 국문과 당시 한문을 견주어 살폈다. 그 가운데 이 구절이 눈길을 끌었다. “천하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다.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이니, 장수 가는데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天下萬事, 心而已, 心帥也, 氣卒也, 其帥往, 其卒焉得不往)” 마음 가는데 몸이 따르렷다.
마음은 우리 몸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눈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기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우리 눈에 쉬 드러나게 마련이다. 심지가 두텁다면 그 사람의 의중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고 혈기가 왕성하다면 겉으로 불끈불끈 힘이 솟음을 의미한다. 정신과 육신의 조화로운 균형을 잘 유지함이 건강의 첫걸음일 테다. 그런데 이 두 수레바퀴를 잘 굴러가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운은 에너지다. 이두박근 삼두박근의 힘줄만이 에너지가 아니다. 에너지는 우리 몸으로부터 나오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도 수혈이 가능하다. 외부에서 받는 기운은 재물이다. 누구나 재물이 있으면 든든할 것이다. 남들 보기에도 어깨 힘이 들어가 보일 것이다. 흔히 궁색한 사람을 두고 어깨가 처졌다고 하지 않는가. 기운은 외부로 금방 드러나기에 자신은 물론 타인도 쉽게 알아챈다.
마음 가는 곳은 올바른 곳을 지향해야 한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괜히 무리수를 둔다든지 엉뚱한 곳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 상식이 통하고 실현 가능한 곳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과욕을 부려 몸을 상하거나 체통까지 일그러지게 해서는 곤란하다. 우리 주변 번잡한 세상사에서 잠시 그릇된 마음이 엉뚱한 길로 들게 해 난감한 일을 겪는 수가 더러 있다.
다시 수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오늘날 청와대는 옛적에는 궁궐이다. 내야 한 번 초대 받은 적 없다만 영빈관을 예로 들어 보련다. 그 테이블을 차지하고 밥을 먹는 사람들이 금수저를 들었던가, 은수저를 들었던가. 그저 서민 밥상 수저통에 담긴 스테인리스 숟가락이고 젓가락 아니겠는가. 내가 한 밤 자 보질 않았다만 방한한 외국 정상이 머무는 서울 시내 호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연히 수저 타령으로 위화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제 위치에서 제 직분을 다하면 될 것이다. 왕대밭에 왕대 나든, 개천에서 용이 나든 나는 상관 않으련다. 나는 내가 여태 걸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마음 둔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련다. 마음이 가는 곳에 기운이 따를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모두가 아랍 산유국 왕자가 될 수 없고 삼성 이건희 손자가 될 수 없지 않은가.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