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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0일.[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루카 17,11-19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늘 복음은 ‘감사’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사람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해서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완전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일까요? 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청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오직 감사하는 사마리아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고 구원에 다다랐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도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따라 우리 믿음도 측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역학 법칙은 0부터 3 법칙까지 4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열역학 제0 법칙은 무엇이냐면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이동한다는 법칙입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있을 때 뜨거운 물은 저절로 차가운 물에 열을 빼앗깁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주실 수 있기에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본인 의지가 아니라 빼앗기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일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데 피가 멈추었습니다.
에너지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의 믿음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역학 제1 법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를 누군가 얻었다면 누군가는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고생하듯, 하느님도 고생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에너지는 곧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만약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신들을 치유해 준 은총이 곧 예수님께서 나병에 걸리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그분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병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주시는 성체가 곧 그분의 죽음임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열역학 제1 법칙,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오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았기에 그분이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위 단계도 있습니다.
바로 열역학 제2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아무리 은총과 에너지를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계속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규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을 받기 위해 다가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그다음 단계도 있습니다.
열역학 제3 법칙인데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소멸하기까지 가만히 있으면 내 존재까지 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결국, 지금 나에게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나의 창조자이시어서 그분이 아니면 나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일까요? 바로 찬미입니다.
나를 낮추고 그분의 전능함을 찬미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대치되는 종교가 ‘저절로교’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났고 저절로 유지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창조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있음을 믿었고 남들이 소홀히 여기는 작은 차이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은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한 친구는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양계란 저절로 생성된 것이며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니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케플러는 그 친구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실제 크기의 축소비율에 맞게 만들어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별들이 빛을 발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하여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매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자기 힘으로 생겨나서 자기 힘으로 도는 것일세.”
“뭐야? 어서 말해봐.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절로 만들어지고 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나?”
“이 친구야! 이렇게 작은 장난감도 만들어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이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큰 태양계가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교에서 벗어나 열역학 법칙을 믿는 것으로 증가합니다.
열역학 법칙은 한 마디로 ‘저절로 존재하는 것도 없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없다.’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에너지와 존재를 내어줄 존재를 찾습니다.
아기들은 열역학 법칙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서 에너지와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감사했다면 열역학 법칙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열역학 법칙을 이해하면 기도의 법칙도 이해합니다. 기도하면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소멸한다는 것이며 기도로 주시는 그분의 에너지는 곧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먼저 믿게 되면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감사와 찬미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 벌거벗고 춤을 추며 찬미하였습니다.
계약궤를 모시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성찬례와 같습니다.
이때 자기를 버리고 낮출수록 찬미가 솟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비웃던 아내 미칼에게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2사무 6,22)라고 말합니다.
미칼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찬미하는 다윗을 비웃었기에 더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근엄하게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니면 먼지보다도 못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시고 자아에 지배받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기에 지금, 이 순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이 이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얻어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0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루카 17,11-19
여기 저기 숨겨져 있는 수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냅시다!
나병으로부터 치유 받은 열 명 가운데 유일하게 감사 인사를 하러 온 이방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감사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세탁물이 산더미인데 세탁기가 자주 고장이 나서 한동안 무척 성가셨습니다.
출장 서비스를 신청했더니 기사님 왈, 15년 됐으니 수명이 다됐답니다.
마침 창고를 정리하다가 큼지막한 구식 통돌이 세탁기를 발굴해서 설치했더니...
세상에 시원시원 너무나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화창한 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담요들을 널고 있자니, 제 입에서는 감사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삶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감사기도꺼리가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사기도를 바치신 흔적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복음 12장 25절)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복음 6장 11절)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수녀님들께서 친딸처럼 양육하는 청소년보호시설 개원 기념 미사 때의 일입니다.
영성체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우리 집에 살면서 감사할 꺼리 37가지'라는 묵상글을 낭독했는데,
듣고 있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감사기도보다는 청원기도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이 앞서던 제가 비참해보였습니다.
우리들의 기도생활 안에서 감사기도가 더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눈을 크게 뜨면 더 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육의 눈도 크게 뜨지만 영안(靈眼), 심안(心眼)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에 다다른 루르드의 벨라뎃다 수녀님께서 한번은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셨는데,
진정한 의미가 감사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 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원장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 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나 축복에 감사합니다.
건강과 성공에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에 대해, 이제 남은 것은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것뿐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1월 10일 성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들려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루카 17,12)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실 때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비를 청합니다. "멀찍이"라는 표현에 당시 사회가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과, 그들 스스로 느꼈던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져 참 마음이 아픕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예수님은 치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을 존중해서 무작정 다가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쩌면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악성 피부병을 앓는 이들의 발병 여부나 회복에 대해 확인을 해 주는 이가 사제였으니까요.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치유의 기적은 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걸어가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그저 믿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은 겁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믿고 가는 동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기적들도 이렇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몸에 정화의 치유가 일어난 걸 알고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단 한 사람,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몸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사제에게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말씀이 이 모든 놀라운 기적의 열쇠라는 걸 직감했지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사제의 완치 판정이나 가족과의 재회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이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아홉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적 치유에 영혼의 구원까지 얻습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권력자와 통치자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촉구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지혜 6,7)
통치자, 힘 없는 이들 할 것 없이 누구나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이들을 콕 짚어 더 엄중하게 지혜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겠지요. 사실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한낱 작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은 일부에게 더 많은 재능과 재물과 권력을 허락하시고 그에 맞갖는 자질과 덕행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을수록 주제 파악이 필요합니다. 본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단지 하느님께서 뭔가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라고 잠시 힘을 맡기셨다는 것을 자각할 때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사는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알며 하느님을 아는 이의 덕행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줄 아는 권력자는 세상을, 타인을, 가난한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지혜 6,11)
권력자나 통치자가 끝내 얻어야 할 것은 힘이나 명성, 재물, 이권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분이 떠나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인간 실존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기껏해야 짧게 지나가 버릴 이 풍진 지상 삶에서 도토리 키재기가 목표여서는 안 되니까요.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지혜를 갈망하고 갈구하는 이는 지혜를 찾아 얻고 지상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관통하는 가르침을 받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지혜를 구합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희로애락의 파도에 출렁이고 생로병사의 풍랑에 뒤집어지면서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리고 있다면 지혜의 길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몸과 마음이 힘들고 처한 상황이 어렵다 해도,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감사할 일들을 꼽아내어 주님 앞에 엎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를 청하고 감사를 되돌려 드리는 이들을 결코 그냥 보내지 않으시니, 벗님에게도 치유와 구원이 반드시 함께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은총과 자비의 주님께서 벗님과 함께 하시길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