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경영 파트너로서 인연은
인간의 성숙을 위해
과격한 수단에 주저치 않습니다.
인연에 관한 이해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불교의 영향하에 있어도
많은 편차가 있는데
현상을 이해하는 수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지요.
특정 사람과의
운명론적 만남부터
모든 사건에 개입하고 있는
원인론적 견해까지
다양합니다.
인연의 개념에 호의적인
기독교인의 경우
'하느님의 섭리' 로 이해할 수도
있지요.
무신론자는
알 수 없는 원인이 일부 가미된
조금 특별한 확률 정도로
이해할 것입니다.
어느 경우이든
인연은
우리의 관할 밖 저 너머의
원리와 작용에 관한
이야기임은 분명하지요.
사실 인간은
인연이나 섭리에
관심 혹은 최소한 호기심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근본 본성이
기존의 영역을 넘어 확장하려는
욕구이기 때문이지요.
학문적으로
이것을 종교성이라 하며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은 이나
심지어
무신론자라 스스로 자칭하는
이들에게도
종교성은 존재합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자기 영역 밖의 차원에
매료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비록
불교적 용어를 빌려 표현하지만
인연은
인간현상의 현실적 한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연은 과연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외부 개입인가요?
아니면
온전히 조종할 수는 없어도
일부
우리 의지가 반영될 수 있나요?
이해가 난해할 수 있으나
인간의 자유가 허용되는 차원에서
인연에
우리의 개입 여지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철학의 논리론
개입이 가능하기에 자유가 허용되는
동어반복의 순환이기는
하지만
다차원의 관점에선
충분히 소화되는 문제이지요.
우리의 개입에 의해
실제
다음 순간에 발현하는
우리의 현상이 달라집니다.
인간현상은
하나의 고정된 길이 아니지요.
우주적 권능이
뚝딱 만들어 던져놓은 미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매 순간 우리의 선택은
무한의
다른 우주를 창조하고 있지요.
무한의 현상 하나 하나의 가닥은
100%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에 의해
그 가닥들을 건너뛰고 있지요.
이 측면에서 선택은
100% 자유롭습니다.
한편
우리가 누군가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의 선택의 경향이 가진
한계의 정도를
가늠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의 그릇을 보고
그의 자유도를 측정하지요.
누구는 운명의 노예일 수도
누구는
운명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경영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인연과 선택의 '공동 경영 체제' 에
있지요.
서로 지분을 가졌다면
이제
그 지분의 비율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분은
그것이 아무리 커져도
50% 미만이지요.
최종 결정은
인연이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선현들이
사건의 결과에 집착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이유이지요.
과거 문화 수준에서
대중의 이해도가 떨어졌기에
구체적 언급이
없을 수는 있으나
그들이 간파한 것은
<사건의 지배 구조> 입니다.
사건의 흐름을
인간이 장악하려 하면
돌아오는 것은 고통 뿐이지요.
까르마 요가karma-yoga,
무위無爲,
순리順理는 모두
사건의 지분 구조를 이해한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지분이 적은 쪽이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대주주인 인연의 흐름을 읽고
그 경향을
활용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현실 속에서 인연과 우리 욕심
사이엔
끊임없는 충돌이 발생합니다.
아쉬움과 기다림의 지루함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히지요.
사건을 경영함에 있어
인연은 우리보다 능숙하고
깊고 넓은
안목을 지녔습니다.
경영 파트너로서
인연은 우리를 설득하고
교육하지요.
일반적으로
인연은 부드럽고 자상하게 우리를
대하지만
또 많은 경우
냉철하고 잔혹한 수단까지 동원함에
주저치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
그 많은 고통이 있는 이유는
우리 인간의
고집과 완고함 때문이지요.
누군가는
"고통은 축복이다" 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수긍할 수 없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통을 '벌penalty' 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선善함' 으로 만회하려는 강박을
느끼지요.
고통엔 이유가 있는데
그 원인을 알려하지 않고
빨리 벗어나기에
안달입니다.
경제적 고통, 건강에 관한 고통
모두에서 그러하지요.
고통과 환난을 벌칙으로
이해하기에
원죄론이 생기고
자신을 자학하며
세상의 불평등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인간을 어리석다고 하지요.
현상과 사건의 깊은 뜻을
살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통엔
인연의 의도가 있습니다.
인연이
그 고통을 특정 목적을 위해
정밀히 설계했다는
뜻이지요.
인연은
자신의 파트너가 성숙하여
자신과
좋은 호흡을 맞추기를 원합니다.
현상은 놀이이고
유희이기 때문이지요.
인연은 우리를 길들이기 위해
효과가 날만한 수단을
지속적으로
동원합니다.
우리의 완고함은
대단히 크지요.
수단은
갈수록 과격해질 수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이 사실을 눈치채는 일이지요.
영성 수련을 하며
현실적으로 길러야 하는 힘은
인연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요.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힘이 과하게 부치면
여정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눈치가 없으면
고통만 쌓이지요.
고통과 인연에 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삼킬 듯 밀려온 거친 풍랑
낡은 선박 의연히 견디니
바다의 성질 이미 익숙코
격한 대화 하얗게 피었네.
..260901小野
카페 게시글
소야小野의 옹달샘
인연이 우리를 길들이는 방식
소야(小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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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1 05:52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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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