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꺼풀 -2-
나미 이모 방은 부엌 반대편에 있었다. 그 방에는 작은 발코니가 있어 바깥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방안에는 큰 비취색 화장대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오만 가지 색깔의 메뉴큐어가 있었다. 우리가 서울에 도착하면 이모는 가장 먼저 나를 화장대 앞으로 데려가서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게 했고, 내가 한참 궁리한 끝에 하나를 고르면,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서 매뉴큐어를 정성스레 칠해주었다. 마지막엔 꼭 매니큐어를 빨리 마르게 한다면서 무슨 특수 동결 에어로졸 스프레이라는 걸 뿌렸다. 그러면 각피에 잠깐 거품이 생겼다가 이내 드라이아이스처럼 증발해 버렸다.
나미 이모는 세상에서 동화책을 가장 잘 읽는 사람이기도 했다. 할어버지가 원래 성우였는데, 이모 역시 같은 일을 했다. 이모는 주로 다큐멘터리 내래이션, 애니매이션 더빙을 했다. 성용 오빠와 나는 이모 목소리가 나오는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또 봤다. 밤이면 이모가 갖가지 목소리로 한국어로 된 세일러 문 책을 읽어주었다.
비록 영어로 통역까지 해주진 못했지만 상관 없었다. 이모는 낭랑한 목소리로 다양한 인물을 자유자재로 연기했다. 못된 여왕이 되어 낄낄거리다가 불굴의 정신을 가진 여주인공으로 변신해 웅변을 토했고 곧장 무능한 들러리가 되어 덜덜 떠나 싶더니 대뜸 늠름한 왕자로 변신해 달콤한 목소리로 맹세의 말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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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 나미 이모는 지금의 이모부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이모부는 검은 올백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흰머리가 한 줄 들어가 있어 꼭 페페 르 퓨* [루니툰 만화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흰색 줄무늬 털을 가진 스컹크] 처럼 보였다. 한의사인 이모부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 치료제로 쓸 각종 약초를 말리고 섞고 달이는 일을 했다. 이모부의 등장은 나를 이상적으로 만들겠다는 엄마의 오랜 작전에 새로운 무기가 되어주었다. 아침마다 이모부는 키 크는 약을 가져와 달였고, 약이 달여지는 동안 내가 학교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도록 두뇌 활동을 자극하는 침을 머리에 놓았다.
한약은 짙은 짙은 초록색이었고 감초에 호랑이 연고를 섞어놓은 듯한 냄새가 났다. 맛는 탁한 호수 물에 담근 과일 껍질 같은 맛으로, 내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썼다.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코를 감싸쥐고 그 뜨겁고 걸쭉한 액체를 최대한 많이 들이키려고 사력을 다했다. 번번히 토하는 바람에 그릇에 담긴 걸 끝까지 다 먹은 적이 없었지만. 나중에 20대가 되어서 그 맛이, 요즘 외식업계에서 최고로 인기라는 쓴맛 나는 이탈리아 독주 페르넷과 맛이 비슷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은미 이모 방은 나미 이모 반대 쪽에 있었다. 막내인 은미 이모는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이모는 전공이 영어 영문학이었고 그 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라 엄마가 통역사 역할에 지칠 때면 이모가 대신 나서서 그 역할을 했다.은미 이모는 엄마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지만 내게는 보호자라기보다 친구처럼 느껴졌다.
아마 당시에 결혼도 안 했고 애인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은미 이모, 성용 오빠와 보냈다. 둘의 시디 컬렉션을 뒤적이고 그해 새로 유행하는 한국 캐릭터 ― 파자마 시스터나 블루베어 아니면 머리에 뚫어뻥을 달고 다니는 괴상한 토끼인인 마시마로― 가 점령한 문구점에 같이 가달라고 두 사람을 조르곤 했다.
쌍꺼풀 -3- 14-15일 같이 실음
밤이면 엄마와 나는 거실에 깔아놓은 접이식 메트에서, 유리 미닫이문 반대쪽에 머리를 두고 잤다. 나는 혼자 자는 걸 싫어해서 특별한 핑계없이도 엄마와 그렇게 붙어 잘 수 있는 기회를 신나게 즐겼다. 우리는 시차에 적응하느라 새벽 세시까지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나한테 이렇게 속삭였다. "할머니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가보자."
우리 집에서는 내가 저녁 여덟시에 찬창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꾸지람을 들었는데, 서울에서는 엄마가 마치 아이가 된 양 작전을 주도했다. 우리는 검푸른 어둠에 싸인 꿉꿉한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갖가지 반찬이 터퍼웨어 통을 모조리 열고 함께 그것들을 집어먹었다.
바솥 뚜껑을 열어놓고 그 자리에서 뜨끈뜨끈한 보라색 콩밥을 한 숟가락 가득 입에 퍼 넣고, 달콤하게 조린 검정콩, 파와 참기름을 넣고, 아삭하게 무친 콩나물 한입 베어 물면 시큼한 즙이 입안 가득 퍼지는 오이김치를 번갈아가며 정신 없이 퍼먹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서로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면서 간장게장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토실토실한 생게 다리를 쪽쪽 빨았다가 혀끝을 껍질 사이로 밀어넣었다. 하면서 짭조름하고 몽글몽글한 살을 발라먹는 틈틈이 손가락에 묻은 간장을 핥아먹었다. 엄마는 깻잎 조림을 오물오물 씹어 먹으면서 말했다.. "넌 진짜 한국 사람이야."
엄마는 저녁때가 되면 할머니방 돌침대에서 빈둥거리기를 좋아했다. 엄마가 할머니 곁에 말없이 누워서 한국 퀴즈 프로를 보고 있고, 할머니는 줄담배을 피우거나 큰 식칼로 배 껍질을 끊지 않고 한번에 깎는 모습을 문간에 서서 물끄러미 지켜 봤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과육을 자르고 남은 과심을 알뜰히 베어먹었고, 엄마는 온전한 조각만 집어 먹었다.
집에서 엄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시에는 엄마가 미국에서 지낸 모든 시간을 벌충
하려 애쓰는 중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여인이 내 엄마의 엄마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때인데, 두 분의 관계가 평생토록 우리 애착 관계의 모델이 되리라는 걸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으랴
나는 할머니가 무서웠다. 할머니는 말투가 거칠고 목소리가 큰데다 영어는 기껏해야 열다섯 단어 정도 밖에 몰랐으므로 내게는 밤낮없이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사진을 찍을 때도 절대 웃는 법이 없었다. 웃음이 나면 꼭 낄낄 웃다가 요란하게 잔기침을 했고, 끝에 가서는 여지없이 우렁찬 기침으로 마무리 했다.
할머니는 우산 손잡이 처럼 등이 굽었고, 밤이고 낮이고 체크무늬 파자마와 까슬까슬한 반짝이 천으로 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할머니가 위풍당당하게 휘두르는 똥침이라는 특수 무기였다. 똥침은 말 그대로 똥을 겨냥한 침으로, 총 모양으로 손깍지를 끼고 양 검지를 마주 붙여 바늘을 만든 다음 남의 항문을 불시에 푹 찌르는 놀이다. 무시무시하게 들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한국에서 매우 흔한, 말하자면 *웨지[ 바지 뒤춤을 잡고 들어오려 엉덩이에 끼게하는 장난] 와 유사한 놀이지 성추행 같은 건 전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