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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행
행 5:1-11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행 5:1-11 /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도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여 자기 재산을 정리하였다. 2) 그리고 돈의 일부를 가지고 와서는 전액을 가져왔다고 말하였다. 이런 속임수는 물론 그의 아내와 함께 꾸민 일이었다. 3) 베드로가 이것을 다 꿰뚫어 보고 그를 책망하였다. `아나니아여, 사단이 당신 속에 들어갔소? 왜 땅값을 따로 챙겨 두고 와서 전액이라고 말해 성령께 거짓말을 하는 거요? 4) 그 재산을 팔고 안팔고는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리고 판 후에 그 돈의 얼마를 남에게 주는가 하는 것도 전적으로 당신 자유 의사에 달린 것이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시오? 당신은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5)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자 마자 마룻바닥에 거꾸러져 죽었다.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떨었다. 6) 젊은이들이 그의 시체를 싸서 메고 나가 묻었다. 7) 그로부터 약 3시간쯤 지나서 그의 아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들어왔다. 8) 베드로가 그 여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판 땅값이 그게 전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여인이 대답하자 9) 베드로가 말하였다. `어쩌자고 당신은 남편과 공모하여 하나님의 영을 시험하시오? 당신 남편을 묻고 돌아온 젊은이들이 지금 막 문밖에 와 있소. 당신도 그들의 손에 운반되어 갈 것이오.' 10)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그 여인도 마룻바닥에 거꾸러져 죽었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 여인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메고 나가서 그의 남편 곁에 묻었다. 11) 온 교회는 물론이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부흥하던 초대교회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속화될 위기에 빠지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순수함을 유지합니다.
잘못된 동기(1-4)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1절은 반위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그 동안 핍박 중에도 부흥하던 초대교회의 성장에 사탄의 방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탄은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이용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소식을 듣고(행 4:37) 그들도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칩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바나바처럼 순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로부터 칭찬받기 위해 소유를 팔았지만, 판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행위로 그들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일부만을 드린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마치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나니아의 죽음(5-6)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즉사하며, 그의 죽음은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아나니아의 즉사로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성도들이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일부를 전부라고 속여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는 곳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삽비라의 죽음(7-11)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오는 삽비라에게 베드로는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라고 엄중히 묻습니다. 사실 그때는 삽비라가 진실을 말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였더라면 삽비라는 진실을 말했을 것이나 남편처럼 거짓을 말하였고, 이에 베드로는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삽비라는 아나니아처럼 감히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고(갈 6:7), 그에 대한 형벌로 즉사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삽비라의 죽음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의 존재양식은 진실입니다.
적용: 동기의 순수성은 성결의 은혜에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됨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사탄이 주는 미혹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에덴과 같은 축복의 성지일 수도 있고, 광야의 빈들일 수도 있으며, 이 시대의 우리가 걷는 인도와 지하철일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괜찮아. 한번 해 봐”
찬송가 342장은 제안합니다. 너 시험을 당해 죄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우리가 주님의 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때, 우리는 담대하게 일어나 예수님처럼 외칠 수 있을 겁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 설 교 >
거짓의 영을 경계하라
양인순 목사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은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공장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본래 창조주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세를 인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죄에 떨어진 인간은 피조물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할 것들을 하나님처럼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만들어진 하나님을 숭배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뉴욕 리디머 교회를 섬기는 티머시 켈러는 <거짓 신들의 세상> 이란 책에서 우상을 ‘거짓 신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거짓 신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만들어진 신들이 있습니다. 돌이나 쇠로 만들 것들입니다. 이런 우상은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거짓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맘몬(돈), 권력, 성, 명예, 인기, 성공, 사랑, 가족, 자아실현, 행복 등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티머시 켈러는 원래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들조차 거짓 신들로 둔갑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우상이요 거짓 신입니다. 돈은 이 시대의 최고의 우상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다가 상대방을 배신합니다. 미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재물을 우상화하면 결국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자신도 파멸의 길로 떨어집니다.
이 모든 배후에는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사탄은 거짓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사람을 유혹합니다. 사탄과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의 영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거짓이라는 미끼를 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거짓 신들을 섬기도록 조종합니다. 거짓의 영을 불어 넣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파멸의 길로 이끕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로 거짓 영의 희생자들입니다. 처음에 이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아나니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삽비라의 뜻은 ‘아름다움’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보석 사파이어가 삽비라에서 나왔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칠 만큼 헌신된 부부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세 시간 시간차를 두고 죽고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께 재산을 팔아 바치고도 죽음을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을까요?
이 사건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찬물을 끼얻는 일입니다.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 사천명, 오천명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은 산헤드린의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 재산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무상통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더해가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장에 와서 그토록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던 초대교회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일어납니다. 외적으로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부흥했던 교회 공동체가 내부의 문제로 인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외적으로 핍박이 오면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그런데 내적으로 사탄이 침투하면 쉽게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임을 당할 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모든 사람이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린 것도 아닙니다. 조금 감추었다 해도 그것이 부부가 모두 죽을 만큼 큰 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약 이 잣대를 오늘 우리에게 들이댄다면 여기에 살아있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일벌백계(一罰百戒) 하심으로 초대교회 공동체를 지키시기 위한 계획이 있습니다. 당사자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억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공동체, 성결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재산을 바쳤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속이는 자, 성령을 속이는 자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통해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선택이십니다. 그러면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재산을 팔아 바치면서 얼마를 감추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첫째, 헌신의 동기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떤 태도로 드리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어 성경에는 4장 37절과 5장 1절 사이에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4장 마지막 부분에는 바나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는 신실한 마음으로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 부부는 아직 바나바의 믿음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얼마나 교인들이 그를 칭찬했겠습니까? 그 믿음을 추켜세우며 자랑을 했겠습니까?
여기에 바로 사탄이 틈을 탄 것입니다. 바친 사람과 바치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나바는 어쩌면 교회 안에서 최고로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그의 인기는 아마 최고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 아나니아 부부 입장에서는 시기심과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한 번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자. 그래서 사람들 앞에 인정과 칭찬을 받아보자. 아마 이런 마음이 강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자신의 의를 행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일수록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교회를 섬기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할 때 어떤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나니아 부부처럼 시기와 질투심,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나 칭찬, 인기를 염두에 둔다면 이것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열심히 주의 일을 하고도 시험에 빠집니다. 공동체에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듯이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사람이기에 인정해주고,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역의 목적이 되면 자신도 시험에 떨어지고, 타인에게도 아픔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사람을 의식하기 전에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을 보지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거짓의 영인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둘째, 아나니아 부부가 거짓에 빠진 이유는 탐심입니다.
처음에는 경쟁심이나 인간적인 생각에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 바치려고 하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로 탐심이라는 우상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여기서 ‘감추었다’는 단어는 헬라어 동사 ‘노스피조(nospizo’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여호수아 7장에 등장하는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훔쳐서 땅에 감춘사건과 연결됩니다. 아간은 아이성 전투에서 빼앗은 전리품 가운데 값어치가 있는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를 장막 땅 속에 감추었습니다.(수7:21). 값비싼 물건을 본 순간 아간이 탐심이 생긴 것이죠. 그 결과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 자식들, 모든 재물을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모든 재물을 불사르고,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를 멈추셨습니다. 그곳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로 삼으셨습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탐심은 사탄이 침투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죄에 빠지는 대부분의 원인은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탐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이 말씀에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십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 재산을 쌓아 두어도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둬 가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탐심을 물리치고,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도록 늘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 것에 자족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비결입니다.
셋째, 아나니아 부부가 거짓에 빠진 이유는 잘못된 내조의 결과입니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소유의 얼마를 감추기로 동의가 이루어졌습니다. 2절에 보면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아내 삽비라 역시 남편의 탐심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여자인 삽비라가 남편에게 좀 감추자고 제안했을지도 모릅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배필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지 나쁜 일에 짝짝꿍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내 삽비라는 남편의 탐심을 절제시켰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재산을 팔았으면 온전히 드려야지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부부 일심동체가 되어 일부를 감추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죄는 혼자 짓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다른 사람과 협력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 이유는 혼자 죄를 짓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함께 할 때 파급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협력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죄에 빠지는 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단호하게 No!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헌신의 잘못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재물 앞에 탐심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부부가 선한 일에 하나되지 못하고 불의한 일에 의기투합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의 준엄한 책망을 들어보십시오. 다같이 3-4절을 읽습니다.
“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사도 베드로는 사탄이 마음속에 가득했다고 지적합니다. 성령을 속였다고 책망합니다. 그들은 사탄의 유혹 앞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성령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베드로 사도를 속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재산을 판돈이 얼마인지 베드로가 본 적이 없는데 그것을 얼마 감춘들 어찌 알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죠. 그들은 베드로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속인다고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속여도 성령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것을 미쳐 몰랐다가 결국 성령을 속이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세가 3장에서 인간을 타락시킨 사탄은 지금도 동일한 원리와 방법으로 우리를 멸망시킵니다. 오늘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속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배신감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파괴하는 것 역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9번째 계명으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거짓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요, 성령님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항상 우리 안에 거짓의 영을 불어 넣습니다. 거짓의 위험성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거짓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너무나 자주 거짓을 말합니다. 때로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심방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거짓말을 합니다. 전화가 걸려오면 아이에게 말합니다. ‘엄마 시장갔다고 그래’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자식 앞에서도 아무런 생각없이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강요합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죄의식 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책을 읽거나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전화가 걸려옵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리고 나서 이번 회사에서 좋은 보험이 나왔는데...내 말은 듣지 않고 계속 말합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지금 중요한 회의중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합니다. 생각해보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거짓말투성이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똑같이 거짓을 말한다면 이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의 영,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 선생이 미국에서 대한인 국민회(Korea National Assembly) 중앙총회장으로 있을 때의 일화입니다. 총회장으로 여러 지방을 순회하던 중 기차를 타려고 정거장에 나왔을 때, 한 간부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에 경비가 모자라 여기 어떤 목사님의 신분증을 빌려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목사 행세를 하시면 철도운임을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에 목사님에 대해서 많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안창호 선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다가 들키면 나의 신용도 떨어지고 또 목사님의 신용도 떨어질 것이니 그럴 수 없는 일이오. 경비가 모자라면 다시 돌아가 며칠 있으면서 돈을 조금 더 장만해가지고 그 때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안창호 선생은 자신과 목사님의 신용도 신용이거니와 특별히 대한민국 사람의 신용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 번의 거짓에 눈을 감으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익이 많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익도 거짓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 갖지 않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장난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꿈에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과 성령님을 속였습니다. 회개할 기회조차도 거부하고 거짓을 말했습니다. 그 결과 아나니아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름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영어사전에 ‘Ananias’를 찾으면 ‘거짓말쟁이’ 라고 되어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재산을 팔아 바치고도 탐심 때문에 하나님과 성령님을 속인 아나니아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거짓말쟁이의 표징이 됐습니다. 그 아내 삽비라 역시 거짓의 공범이 되어 ‘아름다움’이란 이름이 거짓말쟁이의 비참한 말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하여 물거품 같은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영을 속인 자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 이 사건을 통하여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과 불의를 얼마나 미워하시는 가를 보여주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과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정직함과 의로움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사탄은 거짓의 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날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깁시다. 신기루와 같은 탐심을 절제하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채워갑시다. 그리고 날마다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충만으로 무장합시다. 그것이 바로 거짓의 영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한 후에 찬양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X2)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 시키시며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려 하였느냐?
유기성 목사
오늘 말씀은 예수 믿고 성경을 처음 읽는 분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을 내용입니다.
그동안 초대교회는 은혜 충만, 성령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 큰 헌금을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부가 다 죽어나간 것입니다. 교회에 이 보다 더 큰 시험이 있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헌금하는 날 그 자리에서 부부 둘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땅을 판 돈 일부를 감추고 다 바쳤다고 거짓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큰 충격입니다. 어느 교회도 이런 이야기는 역사 기록에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이 실제 사실을 기록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읽고 가슴에 어떤 형태로든 충격이 오셨을텐데 어떤 것 때문에 충격이 왔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한 것 때문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하나님 앞에 헌금하면서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다 하더라도 땅 판 값을 다 바친 것도 아니면서 다 바쳤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그것이 충격입니까? 아니면 “아니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그렇게 죽일 수가 있어!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했다는 것이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소유인 땅을 팔아 일부만 바치고도 다 바친 것이라고 한 것이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큰 죄입니까? 남의 돈을 가지고 바친 것입니까? 교회 돈을 떼먹기나 했습니까? 결국 헌금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이 더 충격이 됩니까? 충격을 받아도 똑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받는 충격은 아나니아의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의 거짓말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이런 거짓말한 것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 충격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도 예배드리고 죽어나갈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런 죄 때문에 죽어야 된다면 무서워서 예수라도 믿겠어요?’ 이런 마음이 솔직히 우리의 마음이니까 이 본문으로 설교하기가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본문은 이미 설교하도록 주어진 본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흥분으로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설교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본문을 택하라고 했으면 지는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혜로운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고 느껴지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분위기에 오히려 찬 물을 끼얹는 것과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기대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11절 말씀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 하나님께서 두려워해야 할 일을 두려워하게 하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은 평소에는 두려워할 일인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앞으로 더 큰 일을 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나서, 예루살렘 교회가 시험에 빠졌지요? 아니 헌금을 하고 그 자리에서 둘 다 죽었으니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나는 예수 믿을 자신 없어!” 그러고 떠나간 사람이 많았다더라. 그 뒤에. 교회 부흥에 찬 물을 끼얹어져서 예루살렘 교회는 곧 문을 닫았더라. 이렇게 나오겠지요?.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 또 살펴보겠습니다마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큰 시험에 빠져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부흥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진정한 부흥을 주시려고 이 일을 쓰신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지은 죄, 헌금하고 죽어 나가야 하는 죄, 성찬받고 죽을 수도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성령을 속인 죄”라고 했습니다.
(3절) 네가 성령을 속이고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시기심과 탐심과 거짓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 헌금을 했지만 동기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 바친 일로 온 교회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자기도 받고 싶었습니다. ‘나에게도 땅이 있는데 이것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면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칭찬하겠구나.’그러나 막상 땅을 팔아 다 바치려고 하니 돈이 아까왔습니다. 탐심이 역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땅 판 것을 다 바쳤다는 칭찬은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그것이 땅 판 것의 모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지은 죄입니다.
이 죄가 그렇게 심각한 죄입니까? 사실 시기심, 탐심, 거짓말은 우리가 늘 쉽게 넘어지는 죄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큰 죄인가?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죽어나가야 할만큼 큰 죄인가?’ 그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누구나 그런 죄는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심히 두려운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가? ‘죽을만한 죄를 지었네.’ 이렇게 생각이 들기보다는 ‘어떻게 그런 정도를 가지고서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벌을 주실 수 있는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죄가 두려운 것은 하나님을 향한 죄였다는 것입니다.
(4절)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렇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큰 헌금을 하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헌신해도 우리가 이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쪽으로 보면 분명히 큰 헌금을 했고 교회를 위해서 크게 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헌금한 것을 가난한 사람 도와주라고 돈 내는 것 정도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속이려고 들고 또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과 마찬가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고 업신여기는 사람의 죄가 작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충격입니다. 왜냐하면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있었던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역사가 가장 강력하게 나타났던 때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날마다 보았습니다. 성령 받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교제히던 교인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성령의 체험을 반드시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런데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계시고 늘 성령님이 자기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실제로는 안 믿은 것입니다. 믿었다면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성령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라고 그가 정말 믿었다면, 아니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거짓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땅을 판 값이 얼마이고 지금 바치는 값이 얼마인지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그 말은 성령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다는 것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성령의 가장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던 때 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는 엄청난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도 성령께서 자기 안에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에 대해서 듣고 성령에 대해서 배워도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구나. 내가 지금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구나.’ 하는 것을 실제로 안 믿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일을 보면 압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그 자리에서 거두어가셔야만 하는 이유는 영적으로 마귀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3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마음에 가득하여”
이 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가룟유다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그러니까 성령을 속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소경처럼 되어버리니까.
사단이 마음에 가득하다는 말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 때 되어진 일과 똑같습니다. 사단은 가룟유다에게 처음에는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때 가룟유다가 그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스스로가 분별할 수 있었는데도 생각이니까 어때. 생각을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생각을 품습니다. 그러니 마귀가 가룟유다 속에 들어갑니다. 그때부터 가룟유다는 모든 자기 의지를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합니다. 그래서 결국 가룟유다는 예수를 은 30에 팔았습니다. 나중에 깨닫고는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난 다음에 감당을 못하겠어서 자살을 하고 맙니다. 가룟유다의 비참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똑같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사단이 시기심과 탐심과 거짓말을 할 마음을 심어 넣어주었습니다.
마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도 처음에는 거짓말을 할 생각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생각의 뿌리를 살피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생각이려니 하고 품은 것입니다. 이것을 심각하게 여겼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떨쳐버렸겠지만 그것이 생각이니까 그냥 마음에 품었습니다. 시기심이 일어나고 탐심이 일어나고 그러자니 거짓말을 해야 되고. “그렇게 하자!”
4절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
결국 사단이 마음에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사람에게 거짓말하는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지도 분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단이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영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분명히 예수 믿고 성령의 체험도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니까 사단이 마음에 가득해져서 불신자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생각의 근원을 살펴야 합니다. 잠언 2장 23절 말씀처럼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지킬 것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여러분, 품어야 될 생각이 있고 내좇아야 될 생각이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정확해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면 큰 일 납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면 가룟유다 같이 마귀가 들어와 주인 노릇하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게 되고 불신자처럼 영적으로 소경이 됩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교회 안에서 마귀가 주는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알고 품어서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보면 마귀가 하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주간에 살인죄나 간음죄를 지었다면 지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아실텐데 내가 이런 죄를 짓고도 이렇게 예배 드려도 될까? 하나님은 나같은 죄인도 용서해주실 수 있을까? 내가 새 삶을 정말 살 수 있을까? 내가 왜 그런 죄를 지었을까?’ 얼마나 마음이 고통스럽고 안타깝고 간절하겠어요? 살인죄 짓고 간음죄 짓고 오늘 예배 드릴 때 졸 사람이 있겠습니까? 졸음이 안 오지요.
그러면 탐심과 시기심과 거짓말은 어떻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그런 죄를 짓고 예배 시간에 졸 수도 있습니다.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아니 시기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돈 좋아하지 않는 사림이 누가 있어? 거짓말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죄를 제대로 죄라고 느끼면 졸음이 옵니까? 고개를 들 수 있습니까? 살인죄나 간음죄와 시기, 탐심, 거짓말하는 죄하고 어떤 것이 더 무섭습니까? 시기, 탐심, 거짓말하는 죄가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고 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도 태연히 예배하고 성찬도 받고 웃고 인사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죄 지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살인죄나 간음죄를 지으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앞에 고개를 못 듭니다. 이런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마음으로부터 애통해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정말 구원을 호소합니다. 살인죄 지은 자도 천국에 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오른편 강도도 천국에 갔습니다. 살인마 고재붕도 천국 갔습니다. 자기가 무서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아니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도 되고 어떤 죄를 지은 자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가 없는 죄가 어떻게 용서함이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살인죄나 간음죄보다 더 무서운 죄가 시기 질투 탐심 거짓말하는 죄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꼭 말로만 나는 죄 지었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얼굴 표정에 벌써 나타나지 않아요?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속이는 죄를 자기도 모르게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 몰랐고 그 당시 교인들도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다 놀라고 그때서야 비로서 ‘이것이 두려운 것이구나. 이것이 큰 죄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성령을 속이는 죄를 짓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에게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죄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 지은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 앞에 가서야 다 드러납니다. 시기하고 탐심을 가지고 거짓말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속이고 산 죄입니다.
살인마 강호순, 인물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이웃사람들이 입을 모아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력적이라 할 만큼 준수한 외모와 선량한 미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서운 살인자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살인마 강호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진 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다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성실하고 흠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 갔더니 드러나는 죄마다 상상할 수 없는 죄가 나오는 것이지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정말 두려워해야 될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기심을 한번 놓고 봅시다. 여러분, 시기심이 그렇게 큰 죄라고 정말 생각하십니까? 시기심을 작게 여기면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인 중에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3절에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곧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증거로 시기와 다툼을 꼽았습니다.
고전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가 많고 겉으로는 교회 지도자 같아도 시기와 다툼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자아 중심의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인 사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 시기심이 무서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누구나 다 그렇지 뭐.” 이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시기와 다툼의 죄를 살인과 간음과 같은 죄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하며 십자가를 붙잡아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회개가 안되니 문제인 것입니다.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탐심은 모든 죄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아십니까?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
여러분은 여전히 돈을 사랑하십니까? 돈을 미워하십니까? 대답해 보세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회개할 거리라고도 생각 안합니다. ‘내가 무슨 살인죄를 지었나, 간음죄를 지었나.’ 모든 죄의 뿌리가 돈을 사랑하면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을 사는 것이 죄냐고 물었습니다. 죄인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편의점에 들어가 복권을 삽니다. 그는 희망에 취해 그것을 지갑에 찔러넣고는 가게를 나섭니다. 자기가 복권에 꼭 당첨되리라는 생각에서가 아닙니다. 단지 공상에 파묻힐 기회를 사는 것입니다. 복권 발표가 될 때까지 그는 새 옷, 새 집, 새 지동차 등 복권 당첨으로 찾아올 삶의 변화를 꿈을 꿉니다. 후원금을 보낼 자선단체들까지도 상상합니다. 결국 복권 번호가 발표되고 당첨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을 배부르게 하였던 탐심은 다음번 복권을 손에 쥘 때까지 시들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뭐가 나쁜가? 한낱 게임일 뿐이지 않는가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공상하며 보내는 그 시간들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 기회를 다 놓칩니다. 그런 공상을 하는 자는 기도도 안되고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인격은 파괴되어갑니다. 하나님의 기회도 사라지게 됩니다. 자기 현실에 대한 불만만 커지게 되고, 마귀가 그 영혼을 사로잡게 됩니다. 이렇게 가정 불화, 범죄, 전쟁이 일어나고 노예제도, 공산주의, 지금의 경제위기가 다 탐심 때문에 일어난 것들입니다.
여러분 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살인죄 지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며 회개하는 역사가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우리에게 깨우치시려는 것입니다.
거짓말, 정말 무서운 죄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거짓말에 익숙해 있습니다. 거짓말은 죄로도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마귀에서부터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할 때마다 여러분 입을 틀어막아야 됩니다.‘하나님,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이 술술 나옵니까?’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교회에서 거짓말하고도 전혀 가책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도 없는 것이고 회개가 없으니 씻음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주보에 교인 통계를 내는 이유는 가장 쉽게 하는 거짓말이 교인이 몇 명이냐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꾸 부풀려서 말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반면에 부담금은 적게 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 재정보고도 정직하게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갚아야 될 돈도 많지만 정직하게 보고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거짓말하는 것은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 주인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성도 여러분, 십일조는 정말 바로 해야 합니다. 육신대로 사는 것이 술마시고 방탕하게 사는 것만이 아님을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에서 봅니다.그들은 헌금하고 육신에 끌려 사는 사람이 되었지 않습니까? 헌금하는 일에도 육신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라고 헌금했으면 십일조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헌금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물로 하나님을 속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신앙적으로 병이 들어도 심각하게 병든 것입니다. 그당시 하나님 앞에 드린 재물 중에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을 바친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한번 마음이 영적으로 완전히 굳어져 버리면 하나님께 무서운 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헌금을 할 수 있습니까?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듣기만 했지, 실제로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성경을 읽어보면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즉각적인 징계가 계속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8-30절을 보면 성찬 받을 때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고전 11:28-30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여기서 “잠잔다.”는 말은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성찬을 받을 때 그것이 정말 주님의 몸임을 믿지 못하고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받은 자 중에 병든 자와 죽은 자가 적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러한 일은 계속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회개해야 할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볍게 지나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회개하지 않고 예배를 드립니다. 성찬을 받아도 아무런 회개없이 성찬을 받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아무 분별이 없어집니다.
시기, 탐심, 거짓말을 살인죄 도적질 간음죄처럼 여기는 자가 심령이 복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틈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성령 충만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건강하게 부흥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정결함을 받아야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이 일로 인해서 더 부흥이 됐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더 정결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지켜보고계시구나. 내 마음 중심에 계시구나.’ 그것을 성도들이 다 분명히 명심하게 됐습니다. 마음에 시기심조차 탐심조차 마음에 일어나는 거짓말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며 교회가 얼마나 정결해졌나요.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11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했는데, “온 교회”에는 우리 교회도 포함되고 “이 일을 듣는 사람”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성령께서 이 사건을 왜 기록하게 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괜히 두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잠깐 불꽃처럼 일어났다가 사그러져 버리는 일시적인 부흥이 아니라 지속적인 부흥, 모래 위에 세워지지 않은 부흥, 겉으로만 요란하고 얼마 동안만 뜨거웠던 부흥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흥을 얻으려면 반드시 정결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정말 심각한 죄인데도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을 이 시간 드러내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진심으로 죄 같지 않다고 여기며 넘어갔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를 믿으면 욕심, 이기주의, 거짓말, 명예욕, 시기, 질투 등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성결한 교회, 증거하는 교회
이수영 목사
오늘은 교회가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던 초대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 우리의 교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성령충만했던 초대교회가 드러낸 능력 중 대표적인 것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부활하시고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순절 날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자 제자들이 한 것이 예루살렘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 지역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놀랍게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라며 당황하여"(행2:12) 수근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하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그날 하루에만 삼천 명이나 되었을 정도로(행2:41) 제자들의 증거는 힘이 있었습니다. 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해주자 이를 보고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모인 무리들을 향해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듣고 믿게 된 이들이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행4:4). 행4:31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고 공회에 끌려나가 제사장들을 위시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수없이 위협을 받기도 하고(행4:18, 21, 5:28)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으나(행5:40)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행5:42)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힘있게 증거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날로 왕성하여 예루살렘 시를 뒤덮으며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폭발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부부가 어느 날 그들 소유의 땅을 팔아 교회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땅 판 값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 그 중에서 얼마를 빼돌려 감추고는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의 계시로 그 사실을 알고있던 베드로 앞에서 그것이 땅 판 값의 전부인양 거짓말하다가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죽고만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충격적이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를 몽땅 팔아 그 절반만 바친다 해도 대단한 것이고 칭찬받을 만 한 일인데, 다 바치지 않았다고 부부를 즉사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조금 자세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감추었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오늘 본문에서 말고 유일하게 다시 나오는 딛2:10에서는 "훔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씌어진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서 같은 단어가 쓰인 곳이 수7:1입니다. 수7:1은 여호수아와 함께 견고한 성 여리고를 손쉽게 점령한 이스라엘 군대가 이어서 작은 성 아이를 치러 올라갔다가 대패한 일을 전하며 그 참패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아간이라는 자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을 "가졌음"으로, 즉 하나님의 것을 훔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들어오는 데에 재산을 팔아 바치는 것은 전혀 강요된 것이나 의무조항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4절에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말하기를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한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들의 땅을 그냥 갖고 있을 수도 있었고 팔아서도 자기들 마음대로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은 다 바치지 않고 얼마를 떼어놓고 바친 일을 두고 베드로가 하나님의 것을 훔쳤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또는 사도나 교회 앞에서 그 땅 판 값을 다 바치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 후에 그들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후에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며, 그 때부터는 거기서 얼마를 떼어놓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아간의 도적질 사건과 아나니아의 도적질 사건 사이에는 의미있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해 가고 있을 때 아이성에서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질 물건을 훔친 사건과, 새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예루살렘을 영적으로 점령해가고 있을 때 아나니아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것을 훔친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의 행진을 멈추게 하는 일이라고 하는 공통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단지 하나님 것을 도적질한 부정직성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한 거짓말로 속이려 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께 약속드린 바를 온전히 행하지도 않고 온전히 행한 것처럼 거짓말하여 칭찬과 존경과 명성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산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과 명성 또한 훔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부부가 따로 따로 베드로 앞에 서면서도 꼭같이 말할 만큼 사전에 의논하여 입을 잘 맞추었듯이 계획된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들은 그 거짓말로 베드로를 속이려 했지만 사실은 본문 3절에서 베드로가 말하듯이 "성령을 속인 것"이었고, 4절에서 말하듯이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었습니다.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비극적 사건은 단지 특정 개인에게 일어난 하나의 소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충만하여 놀라운 증거의 능력을 보이며 예루살렘을 점령해가고 있던 승리하는 복음의 역사를 기록하는 중간에 이 불미스러운 사건을 끼워넣은 의도가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로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 증거의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성결한 교회, 성결한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호수아 영도 하의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의 승전보를 기록하던 도중에 아간의 도적질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을 기록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려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거짓되고 속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각각 베드로 앞에 선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하나님께서 모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게 하신 것은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단호하심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거짓과 위선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시로 보아야 합니다. 죄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잠시라도 함께 머무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도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했고, 11절에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의 것을 훔치며 하나님을 속이고 능멸하는 일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함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사도행전의 기자가 강조하여 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는 과연 하나님의 것을 훔치며 하나님을 속이고 능멸하는 일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자기의 소유를 판 돈의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자신이 사탄의 간계에 넘어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뼈아픈 경험을 가진 베드로였기에,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발동하는 사탄의 역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사탄을 즉각 간파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탄의 사특한 역사에 대한 베드로 자신의 또 하나의 경험을 기억합니다.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영광스럽기 이를 데 없는 굉장한 칭찬을 받았습니다(마16:13-19). 그런데 그러자 곧바로 사탄은 베드로의 마음 속에 들어가 간교한 역사를 발동했습니다. 베드로의 그 고백이 있은 후 비로소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드러내셨는데,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했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대답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던 것입니다.(마16:21-23)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사탄이 파고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 사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인의 믿음이 굳게 서는 것을 결코 묵과하지 않는 것이 사탄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진실하게 서지 못하도록 우리를 더럽히고 넘어뜨리려고 온갖 궤계를 부리는 사탄의 역사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늘날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았음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증거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성결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이 거짓과 위선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하나님의 복음전파의 도구로 쓰임 받기는커녕 하나님의 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결해야 합니다. 성결한 교회이어야 증거의 능력을 갖습니다. 누가 성결하지 않은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사람들이 귀기울여주지 않는 교회가 어찌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교회 구석구석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침투해있는 사탄을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거슬려 준동하는 사탄의 역사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더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결한 교회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증거의 능력을 지닌 교회가 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결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성결해지기를 갈망하며 성결한 삶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
김명혁 목사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국기원에서 개최된 “2006 미션컵 전국태권도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며 태권도 시범을 잠시 관람했는데, 청소년들이 자기들이 닦은 태권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태권도 시범에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눈물겨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모인 600여명 이상의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최선을 다하는 순복음노원교회 성도들의 헌신적인 모습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도 행전 2장 이하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4:34,35).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 중에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기도회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교제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전도하는 일이나 바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와 같은 불성실한 신자들 중의 두 사람인 아나니아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불성실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저는 그렇게 추측합니다. 바클레이의 주석을 보았더니 아나니아 부부가 범한 죄 중의 기본적인 죄가 불성실의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Failure in diligence 가 그들의 기본적인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신앙 생활에 불성실할 때, 여러가지 잘못에 빠질 수가 있는데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가 빠졌던 세 가지 잘못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 아나니아 부부는 명예욕에 빠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존경과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신앙의 인격을 갖추고 봉사의 삶을 지니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행16:2)라고 했습니다. 도르가는 욥바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10:22). 도르가와 고넬료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도 모두 칭찬 받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6:3). 초대교회 신자들 중 밭과 집이 있는 신자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고 사도들은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을 때, 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신자들이 신자다운 인격과 삶을 지닐 때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이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과 칭찬을 많이 받는 것은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에 있는 신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도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 중에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고 특히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래서 저들이 사도들과 신자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 아나니아 부부는 자기들도 무엇을 해서라도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새로 시작하는 개척교회인 영안교회를 8개월 동안 맡아서 섬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교회당을 하나 지어서 바치든지, 1억 원의 헌금을 드리든지, 자동차를 한 대 사서 드리는 일이 반드시 옳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자동차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1억 원의 헌금을 드릴 때, 1억 원 상당의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도 봉사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일부러 시도할 때 무서운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마6:2).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과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억지로 헌금도 하고 억지로 구제도 하고 억지로 봉사도 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정 반대로 생각을 하면 그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래, 나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지 않으려고 헌금도 하지 않고, 구제도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아, 내가 참 잘 하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시면서 그를 칭찬하시고 부자의 인색한 헌금은 칭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막12:41-44). 아나니아 부부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두 사람이 공모한 후 소유를 팔았습니다. 바나바처럼 그들도 땅을 팔았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었지만 그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불순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나니아 부부는 탐욕에 빠졌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명예욕에 이끌려서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헌금을 하기 위해서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소유를 판 값이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소유를 판 값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을 다 바치기가 아까운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탐욕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꼭 맞았습니다.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좋은 일에 공모를 하여야 하는데 아나니아 부부는 나쁜 일에 공모를 했습니다. 박종렬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나쁜 일에 부부가 보조를 맞추는 일이 있다. 예배에 지각하고 헌금에 인색하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고 말 많고 세상 쾌락을 사랑하고 교역자를 괴롭히는 일에 부부가 죽이 맞는 일이 있다. 아나니아 부부가 그러했다.” 아나니아 부부는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헌금을 바치기 위해서 마련한 돈이었는데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사랑해서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다가 그만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너무 사랑하다가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시지만은 않습니다. 무섭게 책망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구약 시대에 아간이란 사람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덩이 오십 세겔을 자기 장막 땅 속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아 아골 골짜기 돌 무더기에 묻힌 일이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 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수7:25). 엘리사의 종 게하시도 옷 두 벌과 은 두 달란트를 나아만에게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왕하5:26,27). 재물에 대한 탐심과 탐욕은 무서운 책망과 무서운 저주를 불러옵니다.
저의 삶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제가 헌금을 떼어 먹은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돈에 대한 탐심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나를 위해서 판공비를 어느 정도 쓸 수도 있었지만 거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교회가 써야 할 돈이 많을 때 되도록 적게 쓰려고 했고 다른 돈으로 그것을 보충한 일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제가 저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들은 이야기이지만, 저의 어머니는 돈에 대해서 깨끗했습니다. 남에게서 빌린 돈은 기한 내에 반드시 값 곤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돈에 대해서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어둡고 컴컴한 면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판 값에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두 사람이 공모해서 벽장에 감추었는지 땅을 파고 거기에 감추었는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책망과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나니아 부부는 거짓과 불회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명예욕이나 탐욕 등 죄에 빠질 때 그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예수님은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 부부가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고 일부를 그에게 가져왔을 때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에게 저들이 땅 값을 감춘 죄를 정면으로 지적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아나니아는 사도 베드로의 긴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시간 후 그의 아내 삽비라가 사도 베드로에게 와서 똑 같은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들의 죄를 은폐했습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행5:7,8). 두 사람이 단단히 공모를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회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잘못을 범할 때 그것이 단순한 윤리적인 죄에 그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단을 끌어드리는 무서운 죄이고 성령을 대적하는 무서운 죄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 앞에서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죄를 범할 때 그것이 사단을 끌어드리고 성령과 대적하는 무서운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회개에 빠진 아나니아 부부는 둘 다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아나이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사람들이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5:5,6).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 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하더라”(행5:10,1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의 생활을 하다가 그리고 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갖다 비치다가 심판을 받게 되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강변교회 신자들 중에서 아나니아 부부와 같은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는 책망의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불행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평상시에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기도와 교제와 봉사와 전도와 바치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도부원들처럼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봉사하기를 힘쓰고 전도하기를 힘쓰면 될 것입니다. 평상시에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인 청교도들은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지나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위선과 거짓의 죄를 범하게 될 때 즉시즉시 회개를 하면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일곱 집사들의 행복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 일곱 집사들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될지언정 아나니아 부부 같은 불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이름 값도 못하고 죽었습니까
이일기 목사
미국 시카고의 신문에 이런 기사 거리가 보도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리노이 주의 어글스비라는 마을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는 사람이 고객의 옷을 정리하다가 주머니에서 2만 달러 정도의 돈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주인이 옷을 찾으러 오지 않자 이 세탁소 주인은 그 돈을 경찰서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신문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는데 기자는 이 기사의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을 돌려주는 일이 지극히 마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직한 것이 오히려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세상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부정직하게 변했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에는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한 부정직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소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헌금에 대한 거짓말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은 사건 전체가 다 거짓말이 아니라 반 정도만 거짓말로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밭을 팔아 마련한 그 돈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들 부부는 일부분을 감추어 두고는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처럼 했는데 그것 때문에 부부가 동시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 부부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떠한 사람인지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먼저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나니아라는 이름은“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란 의미가 있고 삽비라라는 이름은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는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될 당시 다메섹에 거하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바울에게 안수기도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행 09:10~17).
아마 이들 부부의 부모가 이들이 세상에 태었을 때 제각기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아름다운 믿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어준 이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앞날이 믿음으로 잘 열려지기를 기대했다는 의미도 되겠는데 안타깝게도 그 좋은 이름을 탐심으로 인해 이름 값도 제대로 못한 체 불행한 죽음을 당하는 불명예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들 부부가 왜 이러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는지 그 이유를 여러분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그저 피상적으로만 읽는다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그 하나님께서 좀 지나치시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헌금의 행위에 일부분의 거짓말이 있었다고 그렇게 가차 없는 징계를 내리실 수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에요.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헌금 문제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큼 그렇게 큰 죄악이냐 하는 것이죠? 이 일에 대하여는 동양권과 서양권에서 보는 시각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거짓말을 그리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사건에 대해 좀 관대하게 보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서양 문화권은 기독교적인 윤리 혹은 청교도 윤리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거짓말을 어떤 죄보다도 심각하게 취급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전통으로 인해 그 벌이 결코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가령 미국 사회에서는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면 물러나는데 그 예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972년 일어났던 사건으로서 당시 미국의 대통령 닉슨이 대선을 앞두고 재선을 위하여 워터게이트라 불리는 건물에 있는 상대 당 민주당 선거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였다가 탄로 난 후 부인하다 거짓말 죄로 탄핵 당해 물러남)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할 때에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려는 아주 좋은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분적으로 속였다는 사실로 죽음을 당한 이들 부부의 사건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 누가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문화권이나 수준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려고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즉 교회는 거짓과 불의에 대하여는 어떤 경우라도 용납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부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곁에서 당장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을 더 받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며 또 실제로 우리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고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삶보다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삶을 더 귀하게 여기고 살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왜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눈을 더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간접적인 근거가 사도행전 04장에 나와 있는데 한 번 살펴볼까요?
행 0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여기에 나오는 바나바라는 사람은 그의 별명이 권위자라고 소개되는 것을 보아 상대방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자기의 밭을 팔아 교회의 필요와 구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렸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마 바나바는 자기의 재산을 하나님 앞에 드린 후에 교회에서 인기가 아주 높아졌을 것이며 이러한 헌금의 정신은 모든 성도들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음은 능히 짐작이 갑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사건이 나오고 난 이후에 이어서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 이들 부부도 바나바의 헌신을 보고 많은 은혜를 받았고 또 자신들도 믿음으로 그러한 일을 하고 싶었던 생각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0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성령님께서 주신 생각 아닙니까? 하여간 좋은 생각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주신 은혜의 마음, 섬김의 마음을 이들 부부는 이내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도 바나바처럼 소유를 바치면 교회에서나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겠지 라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순수하고 좋은 마음, 성령님의 감동 된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이들 부부는 불순한 마음을 안고 물질에 시험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 부부가 바나바처럼 소유를 팔아 놓고는 적당히 떼어 놓았습니다.
0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여기까지 살펴보는 가운데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헌금의 동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중심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서 행동을 더 중시하는 자들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06:0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어떠합니까? 일상적인 삶의 환경이나 봉사의 자리에서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더 살피면서 일하는 자들을 외식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천국의 상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06:0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2. 성령님의 감동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생활에서 헌금을 하는 행위보다도 헌금을 하는 그 동기를 더 중요하게 보심을 아십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소유(땅)를 팔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결심한 것은 바나바의 신앙의 모범과 사도들을 통한 말씀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지 사도들이나 아니면 누가 곁에서 시켜서 한 행위는 결코 아닙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따랐기 때문에 바나바와 같은 생각을 감히 가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0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01절까지만 해도 이들 부부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해 땅을 팔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02절에서 그 땅값을 손에 직접 들고 보니 물질에 대한 애착과 이것을 다 바치면 장래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염려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염려의 틈 사이를 사단이 치고 들어와서 마침내 이들 부부의 마음을 흔들어 대는데 결국은 성령님의 감동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했던 그 좋은 믿음이 변질되면서 하늘나라의 축복의 상급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들 부부가 사도들에게 가져다 놓은 그 물질에 대하여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는 지 03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0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감추다(νοσφιζω): 착복하다 라는 의미로 디도서 02장 10절에서의 떼어 먹지 말고 라는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딛 02:10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창세기 02장 18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부부 관계를 가리켜서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배필로서 돕는다는 것은 생활의 필요만을 주고받는다는 일상적이고 단순한 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이며 정신적인 유익까지 포함해서 상대방의 모든 약한 부분을 보완하여 유익하게 하는 역할자라는 말입니다. 건강한 부부 상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건강하고 바람직한 믿음의 부부는 서로 품위가 있는 신앙의 조화를 이루어 가게 하는 것인데 초대교회 시절 사도 바울을 도와 복음전파에 크게 기여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편 아나니아가 땅값 얼마를 감출 때 곁에서 삽비라가 여보, 우리 하나님 앞에서 재물에 욕심 부리지 말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삽시다 라고 만류를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게만 하였더라면 이들도 바나바처럼 길이길이 그 행적이 믿음으로 빛나는 축복이 되었을 것이나 오히려 아내도 헌금을 에누리 하는 도적질에 그만 동참을 하고 말았습니다.
0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참담한 비극 중의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충고할 수 있는 관계가 되지 못했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여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하면서 따가운 충고를 해 줄 수 있었고 그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비극을 당하지도 아니했거니와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영원히 빛날 수가 있었을 것 아닐까요?
우리는 그 일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 말고 혹시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 부부처럼 같은 전철을 밟고 있지를 않는가 한 번 돌아봅시다.
만일 그러한 자리에 내가 있다면 고쳐야지요. 구약시대에 아합 왕과 이세벨 부부가 합하여 악한 일을 꾀하다가 비극의 결말을 맞고 말았음을 기억하십시오.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결국 이들 부부는 처음에 받은 성령님의 감동을 서서히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다가 마침내 사단의 생각으로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있어서 어떠한 분야에서든지 성령님의 감동을 받게 되어질 때 순종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사단의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거짓을 회복할 기회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0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땅값 얼마를 감추어 두고서 교회 앞에 등장하기까지 아나니아의 고민스러웠던 많은 시간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은 계속 아나니아에게 감동하고 계셨을 것이고 양심도 그를 계속 책망하고 있었을 터인데 이때 아나니아가 오! 하나님 하면서 밤중에라도 일어나 마음을 정리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갔더라면 이들 부부의 삶은 얼마나 복된 길이 되었겠습니까?
아니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땅값을 가지고 사도들 앞에 나아가 드릴 때 사도님! 여기 저의 재산 중의 일부를 드립니다 라는 고백만 하였더라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리고 여기 저의 재산 모두를 드립니다 라는 거짓의 헌금을 드릴 때도 회개를 할 수 있는 잠깐의 기회는 여전히 주어져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베드로의 책망을 받는 마지막 그 순간에라도 아나니아가 옳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손을 들었더라면 비극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거짓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까지 그만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아내 삽비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에 계속되어지는 사건을 보십시오.
0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이 중요한 시점에 부부가 함께 오지 않고 따로 따로 들어왔는데 이 세 시간 동안 무엇을 하다가 늦게 오게 된 것 같습니까?
남편이 죽은 지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 소식을 몰랐다면 아마 밖에서 나돌아 다니지는 아니한 것으로 생각되네요. 무엇을 하다 온 것 같습니까? 같이 한 번 추측을 보해 봅시다.
그 동안에 삽비라는 헌금 에누리한 돈을 안전하게 간수하는 일을 하였을 것이고 다음으로는 우리도 바나바처럼 땅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다고 하면서 이집 저 집 다니며 열심히 입방아 찧다가 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0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이때 삽비라의 가슴이 얼마나 당황이 되었겠습니까?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물은 것은 비록 남편 아나니아는 죽음의 비극을 맞이했지만 삽비라에게 회개할 기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기회가 있음이 은혜 아닙니까?
그런데 삽비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 이뿐이로라. 이미 남편과 같이 입을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이것뿐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겠지요?
아무리 사도라도 설마 우리가 은밀히 계획한 것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 거짓말을 단 번에 알고 있었습니다.
0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이제는 더 이상 거짓을 회개하여 믿음으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졌으며 주어진 그 기회를 계속적으로 거절한 결과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딜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도 죄를 많이 지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거절했기 때문에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죄인 아닌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약 70여 년 전에 터키에 유명한 여시푸라는 레슬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레슬링을 잘해서 유럽 지역에서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는데 몸무게가 무려 200kg나 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가람입니다.
그래서 여시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최고의 레슬링 선수였던 루이스와 시합을 하여 그를 장난감 집어 던지듯 해치웠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그는 상금으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돈을 가지고 가봐야 환전하는데도 복잡하니까 그 돈을 전부 금으로 달라고 한 후 허리에 둘둘 감은 큰 전대 속에 채워 넣고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바다 한 가운데 왔을 때 그가 탄 배가 그만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시푸는 그 큰 체구에 불거지도록 금이 가득찬 전대를 둘둘 감은 채로 배에서 뛰어 내렸는데 아무리 운동선수지만 몸에 감은 금의 무게 때문에 미처 구명보트가 도착하기 전에 곧장 대서양 밑창에 가라앉아서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 금만 포기했더라면, 그 금만 벗어놓고 뛰어내렸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욕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문만 열려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문이 닫히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사람의 생각으로 살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성령님의 감동함을 따라 살며 성령님의 감동이 올 때는 그 감동을 변질시키지 않고 끝까지 잘 유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신앙과 진실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미얀마의 우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코브라에 물려 죽어가는 아이를 부모가 업고 고승에게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를 바라보던 고승은 너무 애처로워서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아이를 구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음 속에 숨겨둔 진실한 말을 하면 혹시 천지신명께서 자비를 베풀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고승은 자신의 진실을 토로했습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50년 동안 중 노릇을 했지만 7년 동안만 행복했고 그 나머지 세월은 늘 불행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존경하지만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고승이 말하자 아이를 죽게 하던 코브라의 독이 아이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저도 평생 불교신자로서 스님이 오실 때마다 시주를 드리고 절에 헌금도 했지만 기쁨으로 드린 적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아이의 가슴에 있던 독이 허리로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저는 남편과 결혼하여 15년 동안 살았는데 사람들은 저더러 행복한 여자라고 말하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행복을 느낀 것은 1년에 이틀 정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자마자 아이의 허리에 있던 독기가 발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완전히 몸에서 나가 버렸다는 우화 이야기입니다.
이 우화는 인간이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실제로 많은 순간을 위장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을 원하십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진실을 원하시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을 시작하면서 본문을 중심하여 <신앙과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허울좋은 이름
본문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어느 날 은혜를 받고 땅을 팔아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유를 내놓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쓰던 일이 있었습니다.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 사람 바나바도 땅을 팔아 교회에 내놓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작정을 하고 땅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아 돈을 쥐고 나니까 시험이 왔습니다. 반만 드리고 나머지는 숨겨 두었다가 쓰라는 유혹이 왔습니다. 그들이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반만 가지고 가고 전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의 저주를 받고 현장에서 숨지는 불행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반만 드린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반만 드린다고 뭐라 하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사도를 속이고 거짓을 말하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나니아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삽비라도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삽비라는 "아름다운"의 뜻이며 또는 "사파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하나님을 속이고 사도를 속이다가 저주를 받고 불행한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름은 좋은데 이름 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허울 좋은 이름들이 참 많습니다. 지난 연말에 민주당 의원 세 사람이 자민련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자민련 의원이 17명밖에 되지 않아 교섭단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20석이 되어야 교섭단체로 등록할 수 있는데 3석이 모자랍니다. 이 기준을 17석으로 낮추어 보려고 했지만 한나라 당이 펄쩍 뛰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10석 이상만 되면 교섭단체가 될 수 있던 것을 20석으로 올려 놓은 장본인이 김종필 씨라고 합니다. 자기가 찍은 도끼에 자기 발을 찍은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 궁리 끝에 민주당 의원 세 사람이 자민련으로 이사를 가서 20명을 채워 교섭단체를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민련의 강창희 의원이 거부하는바람에 교섭단체로 등록하지 못하고 화가 난 자민련은 강창희 의원을 제명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로 정치권이 더욱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행동은 아무리 위장을 해도 빛이 나지 않습니다. 허울만 좋았지 세상 사람들에게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름 값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요? 지금 우리 기독교도 이름 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매스컴이 들고 일어나 떠드는 바람에 기독교가 큰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매스컴이 한번 비판하면 선교에 큰 타격을 받습니다. 전도의 문이 닫힙니다. 일방적인 비판을 자제해 줄 것을 매스컴 당국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비판하면 시청하지 않겠다고 경고도 하고 있습니다. 선교에 큰 타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스컴의 처사가 전도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스컴의 자제도 요청해야 하지만 스스로 자정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이름 값을 못했기 때문에 나온 비난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비난을 약으로 삼고 회개하여 진실을 찾는다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사실 회개할 것 많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덕이 되지 않는 행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부끄러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는 말로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석연치 않습니다. 정말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일벌백계의 사건
본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값의 반만 드리면서 전부인 것처럼 위장하였다가 저주를 받아 죽은 사건은 하나님이 어느 정도 진실함을 원하시는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닌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벌백계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다루신다면 그 앞에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진실의 기준마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널리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지만 진실의 기준만큼은 여전히 엄격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엄격하셨을까요? 그 당시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열면서 진실함의 새로운 기준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준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적당히 진실한 것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진실하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이 걸렸습니다. 그러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생각하기를 90%는 닮아야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90%만 닮아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주먹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는 하나님을 95%는 닮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꽤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자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사모와 대판 싸움을 했습니다. 한참 싸우다가 정신이 들었는데 하나님을 95%만 닮으려고 해서는 안되겠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5%는 하나님을 닮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5% 때문에 싸움을 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100% 닮기로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적당히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엄격함을 아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하시듯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벌 백계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진실함의 기준을 신중히 따라야 합니다. 특별히 이 사건은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열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새해를 여는 이 시간 본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진실
이처럼 신앙인에게는 고차원의 진실이 요구됩니다. 그러면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성도가 진실을 읽지 않으려면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 속에 사단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사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다가 진실을 잃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유혹할 때 대체로 4가지 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 다 그렇고 그렇게 사는데 뭘 그리 혼자 고민하는가? 남들 하는대로 적당히 따라서 해라." 이런 말들은 우리를 편하게 해 주지만 망하는 길입니다. 둘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도록 유혹합니다. 셋째는 "아직 나는 젊으니까."라는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 하나님 나라에 갈 때가 가까우면 그때 가서 진실해지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까 젊어서는 좀 즐겨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번 한번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이번 한번만 하고 다음부터는 안하면 된다는 생각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마귀는 이런 생각들로 성도를 유혹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단의 유혹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진실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진실을 지키려면 둘째로 성령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베드로를 속이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함께 계시는 성령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속인다고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속여도 성령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것을 미쳐 몰랐다가 결국 성령을 속이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기독교가 유교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유교는 사람을 상대하는 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체면윤리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을 속여 체면만 세우면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십시다.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 앞에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석교 가족 여러분! 새해 첫 주일입니다. 금년에는 순수성 회복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마침 오늘 새벽부터 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새벽에 마당에 나와보니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이 온 대지를 덮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많이 불편하겠구나. 그러나 참 깨끗하다." 그러면서 진실이 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실은 다소 불편하더라도 아름답습니다. 진실하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된 삶은 고귀합니다. 금년 한해를 기도하며 진실과 순수성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