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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皇后와 魯國大長公主
고려 왕실의 자식들을 인질로 삼고 고려 국왕을 직접 임명 •퇴출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내정간섭을 했을 뿐 아니라 가혹할 정도의 수탈을 자행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원성을 샀던 것은 고려의 여인들을 바치게 한 공녀제도이다. 고려의 여인들이 공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때만해도 고려는 처녀가 아닌 과부나 역적의 처 등을 보냈다.
그러나 1275년(충렬왕 1년) 원나라 복속국가 중에서 고려만이 여자를 공납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충렬왕이 금혼령을 발표하고 열 명의 처녀를 바침으로써 처녀 공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원은 500인의 공녀를 요구해왔다.
이렇게 시작하여 수많은 고려의 여인들이 원으로 끌려갔는데, 이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왕가나 고위 관직의 처첩이 되거나 주점에서 노래하는 기생이 되는 등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쓴 〈공녀 반대 상소문〉을 보면 당시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떠나 보내는 날이 되면,부모와 친척들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어당기다가 난간이나 길바닥에 엎어져 버립니다
비통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 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자오의 막내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총명했던 기씨 처녀는 원 나라 순제의 차 시중을 드는 궁녀가 되었다.
어린 시절 고려에서 유배 생활을 한 바 있는 순제의 눈앞에 미모와 지혜를 겸비한 고려의 처녀를 둔 것은 고용보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이었다.
당시 고려는 공녀뿐 아니라 환관도 바치고 있었다.
원은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학문적 소양과 정치적 경륜을 갖춘 고려의 환관들을 요구했고,
이들은 원나라 황실에서 인정을 받으며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어갔다.
고려 출신 환관들은 황제의 신임을 더욱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황제를 사로잡을 수 있는 고려 여인을 물색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들어 발탁된 것이 기씨 처녀였다.
순제는 자연 황후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고. 그런 순제의 눈에 궁녀 기씨가 들어왔다. 이를 질투한 황후가 기씨를 채찍으로 때리고 인두로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지만,
다행히 황후의 형제들이 순제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제거되면서 황후도 사약을 받았다.
황후의 가문을 제거한 순제는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는 건국 이후로 황후가 되는 가문이 정해져 있었다.
신하들의 반대로 기씨는 비록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황제의 총애와 고려 출신 환관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실력자가 되었다.
더구나 1339년 순제의 아들을 낳아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그리고 그 해 제2황후에 봉해졌다가 1365년 제1황후가 사망하자 제1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상 기황후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제2황후 자리에 올랐을 때부터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해 제1황후의 아버지가 권력다툼에서 제거된 뒤 제1황후는 명목상의 황후나 다를 바 없었다.
고려 충숙왕의 차남인 열두 살의 강릉대군이 인질로 베이징에 온다
강릉대군은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무르는데, 영특하고 신중해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많은 칭송을 들었다고 전한다.
기황후도 명민한 고국의 왕자를 홀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소년이 훗날의 공민왕이다.
그가 나중에 누이의 권세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던 자신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고려에서 원 냐라의 세력을 몰아낼 것을 이 때의 기황후는 짐작이나 했을까.
노국대장공주는 원의 유력한 황족인 위왕의 딸로,이름은 보탑실리라고 했다.
다른 원 나라 공주들과 달리 노국공주는 질투나 오만을 부리지 않았고, 부덕을 갖춘 여자였다.
그런 노국대장공주를 공민왕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노국대장공주도 공민왕의 뜻을 따랐다. 고려의 여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려의 의복을 비롯해 고려의 문화가 원나라에 크게 유행했는데,이것을 고려양이라 한다.
원나라 전통의상은 위아래가 하나로 붙은 원피스 형태였는데, 고려의 영향으로 위아래가 분리된 치마 처고리가 유행했고, 고려의 음식이 원나라에 전해졌다.
한편 고려에 전해진 원나라의 풍습으로는 족두리,변발, 소주 등이 있다. 《원사》《후비 열전》은 기황후에 대해 ‘시간이 나면 《여효경》과 역사서를 보며 역대 황후들의 좋은 덕행에 대해 공부하고 전국각지에서 올라온 진 상품 중에서도 진귀한 것들은 먼저 태묘에 제사 지낸 뒤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큰 기근이 들어 20만 명이 굶어 죽고 시체가 길가에 나뒹굴자 자신의 명의로 돈을 풀어 시체를 묻는 등 구호사업을 펼쳤다는 기록도 있다.
막대한 자금이 드는 이런사업을 뒷받침한 것은 자정원(資政院)이었다.
기황후는 황후부속기관이자 자금조달기구인 자정원을 세력기반으로 삼아 고용보를 자정원사에 임명하고 고려 출신 환관들을 비롯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로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또한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최고 군사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에 임명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스물두 살의 공민왕을 고려 제31대 왕에 봉했다.
고려에 돌아올 당시 공민왕은 다른 원의 부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변발과 호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곧 변발을 풀고 호복을 벗어 던졌다. 그렇게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은 시작되었다.
10년 동안 베이징에 머물렀던 공민왕은 원나라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려 역시 왜구의 잦은 침입과 원나라를 등에 업은 세력들의 농간 속에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백성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한편,적극적인 반원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대해 노국대장공주가 반발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앞서 고려에 시집왔던 원 나라 공주들이 남편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원나라의 편에 섰던 것에 반해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 가운데도 기황후의 형제들이었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은 원나라 궁궐에 딸을 바친 권겸 등과 일당을 이루어 예전 무신들 보다 더 심한 비리와 횡포를 저질렀다.
공민왕은 이들을 대역을 도모 했다는 이유로 처단하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까지 함락되고, 김용의 반란 등 계속 어려움을 당하자 반원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공주도 이에 동의해 이재현의 딸이 혜비가 되어 궁에 들어왔다. 하지만 질투를 느낀 공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궁녀들과 내관들의 비방을 받기도 했다.
공민왕은 정사를 뒷전으로 미룰 만큼 슬픔에 잠겼고, 이후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에 전념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뒤 공민왕은 정사를 신돈에게 맡기지만, 신돈의 거침없는 개혁정치에 부담을 느껴 제거한 뒤, 고려는 더 이상회생가능성 없는 몰락의 길 을 걷기 시작한다. “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며 질책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분노는 마침내 1364년 공민왕을 폐위한 뒤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에 책봉하고 1만여 군사로 압록강을 건너게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전멸 당해 기황후의 복수는 성사되지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몽골 족의 통치에 저항하는 한족들의 봉기가 일어나 원나라를 위협하고 있는데, 순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기황후와 그 측근 세력들은 순제를 양위시키고 젊은 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타파하려 했다.
그러나 순제의 반발로 무산되고 기황후의 모의를 거부한 재상이 귀양가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1366년 결국 주원장에게 쫓겨 몽골의 깊숙한 초원으로 도피한 순제는 2년 뒤 황태자에게 무너져가는 나라를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고, 기황후가 낳은 아들이 북원(北元)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고 하나 기황후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제국 원나라의 100 여 년에 걸친 역사 가운데 30년 동안 정권을 좌지우지했던 기황후 였지만 노년은 불행했던 듯하다. 《원사》와 《고려사》에 기록된 기황후의 모습은 부정적이다.
유학의 관점에서 저술된 책들이기에 여성의 정치 참여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공민왕을 폐위시키려 했고,오빠인 기철의 횡포 등 고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충렬왕 이후 80여 년간 계속되던 공녀 징발을 금지시키고, 환관의 징발을 축소했을 뿐 아니라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논의를 폐지시키는 등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도 많다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되고 있다.
반면 자신의 모국 대신 남편의 모국과 의지를 따랐던 노국대장공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우호적이다.
13세기 전반 몽골 족인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중 홍건적은 당시 유행하던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를 업고,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홍건적의 사상적 기반이 된 백련교에 몸 담았던 주원장이 원을 무너뜨리고 명을 건국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개경을 비롯해 서북 지역이 파괴되었고, 사회가 혼란에 빠졌으며, 공민왕이 적극 추진해오던 반원개혁정치가 홍건적의 침입 때문에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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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중요한 역사...공부많이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