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7
6월13일[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연중 제1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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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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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YB31ulP-Xw
[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흑석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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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과 헌신은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은혜로운 일이 참 많습니다. 도시에서 사무직에 종사할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종이나 씨앗을 뿌리면서, 잡초를 뽑거나 예초기를 돌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니, 그 안에 얼마나 ‘작은 것들’ ‘소중한 생명’들이 숨어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물웅덩이에는 벌써 뭔지 모를 작은 알들이 우글우글 거립니다. 적당히 부드러워진 땅속에는 새끼 지렁이들이 꿈틀꿈틀 댑니다.
이웃 밭과의 경계선으로 심어놓은 나무 가지 마다에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보송보송 매달립니다. 바닥에는 아주 작은 노란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오릅니다. 그야말로 여기저기 ‘작은 것’들의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만 타고 다닐 때는, 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눈부신 광경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개발 논리, 속도전에 젖어 살아와서 그런지 너무 큰 것, 빠른 것, 대단한 것, 뛰어난 것, 앞서가는 것만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 평범한 것, 소박한 것, 가족적인 것,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신앙생활 안에도 많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 안에서도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특별한 분위기만 선호합니다. 말씀 좋고 ‘기도빨’ 세다는 곳만 순례합니다.
본당이나 단체들 강의를 다니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특강은 한 번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외식이나 간식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명강사라 할지라도 반짝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특강 한번 듣는다고 뭐가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 간식이나 외식이 아닌 주식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미사입니다. 매일의 아침 저녁기도, 이것 역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매일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기도, 습관처럼 드리는 묵주기도, 수시로 바치는 화살기도,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 일상적인 십가가의 수용, 이런 것들이 사실 신앙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여기저기 특별한 곳, 대단한 곳, 신기한 곳, 줄기차게 찾아 다녀봐야 그 끝은 언제나 허탈함이며 공허함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작은 것, 일상적인 것들을 중요시 여기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하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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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하반기 살레시오 피정 센터 연간 계획]
1. 2박3일 영성 피정(1박 2일도 가능)
7/5-7, 7/12-14, 8/30—9/1, 9/20-22, 10/4-6, 10/29-31, 11/1-3
11/8-10, 11/22-24, 12/13-15, 12/23-25, 12/30-1/1
2. 하루 피정(10:30~16:00, 양승국 신부 강의와 미사, 식사, 고백성사 및 면담)
9/1, 9/9, 9/23, 9/30, 10/21, 10/28, 11/4, 11/11, 11/18, 11/25, 12/2, 12/9, 12/16
3. 양승국 신부와 함께 하는 기도 맛들이기 피정
일시: 10/6-13,
*매일 미사, 강의, 기도 실습, 성체강복, 영성 상담, 고백성사, 해안길 탐방
4. 살레시오 수도자들과 함께 하는 기쁨과 감동의 해외성지순례
1차: 9/20~10/1, 프랑스 성모 성지(잔여석 10석)
2차: 10/6~17,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 튀르키에(잔여석 4석)
사전 예약 필수, 문의 및 접수: (041) 675-7211, ystefano@hanmail.net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pijung
도착 출발시 태안 터미널 픽업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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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한때 한국 살레시오회의 전설이셨는데, 이제는 아프리카의 살레시안들의
존경받는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에서 사목하실 때, 한국인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많은 성가들을 직접 작사작곡하셨습니다.
그중에 한 곡이 ‘좋기도 좋을시고’입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지금도 형제들이나 가족 구성원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교의 날이나 명절에 자주 부르곤 합니다.
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그 공동체에는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분위기가 무척 썰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가 선창을 담당하는 형제가 공동체 미사 마침 성가로 ‘좋기도 좋을시고’를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찹찹하고 심각한데, 공동체 분위기가 전혀 전혀 아기자기하거나 오순도순하지 않은데, 그래서 얼굴이 다들 심각한 표정인데, 입으로는 좋기도 좋을시고,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너무나 어색하고 웃겼습니다.
외국 생활을 할 때 한동안 한 작은 수도 공동체 새벽 미사를 다녔습니다. 미사를 마치면 작은 방에 제 식사를 차려주셔서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제가 빵을 먹는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에서는 미사를 마친 수도자들이 식사를 했는데, 뭐가 그리 꼬였는지, 매일같이 언성을 높여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같은 광경이 반복되니, 여기 매일 오다가는 나까지 전염되겠다는 생각에 미사 나가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거룩한 얼굴로 미사를 봉헌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다투니, 속으로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일상생활 속의 형제애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금의 봉헌금을 하느님 대전에 바친다고 할지라도 이웃과 불목하고 다투고 있다면 그 예물 봉헌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투고, 수시로 불목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된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한 공동체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울리는 징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예배와 봉헌이 더 가치 있고 합당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또 다시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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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heOooPiB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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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예물을 바쳐도 정말 아무 쓸모 없는 경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타인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자격입니다. 빚이 없다란 뜻입니다. 내가 부모 때문에 의롭게 되었는데, 형제를 괴롭히고 부모에게 찾아와서 예물을 바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인에게 원망을 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책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은 어린 소녀 스카웃 핀치와 그녀의 오빠 젬 핀치이며,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는 마을의 변호사입니다.
스카웃과 젬은 동네에서 이상하다고 소문난 부 래들리의 집 앞에서 노는 걸 좋아합니다. 부 래들리는 일체 마을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에 고마워 그들이 노는 나무 앞에 간식을 놓아두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는 도덕적 용기와 정의를 중요시하는 인물로, 아이들에게 항상 올바른 길을 가르치고자 노력합니다. 아티커스는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종차별이 심한 메이콤 마을에서 용기를 보여줍니다. 톰은 백인 여자 메엘라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메일라가 톰을 끌어들인 것이고 그녀의 아버지 밥이 그것을 보고는 메엘라를 구타하고 톰을 강간범으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아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항상 타인을 이해하고, 편견을 갖지 말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주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놀림과 비난을 받습니다. 젬은 이러한 상황에서 화가 나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티커스는 그들에게 인내와 용서를 가르치며,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법을 알려줍니다. 아티커스는 젬에게 총을 선물해 주면서 다른 새는 다 잡아도 되지만, 앵무새는 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앵무새는 아티커스가 변호하는 죄 없는 톰과 같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사실 밥이 못된 인간이고 자기 딸의 잘못을 톰에게 뒤집어씌운 것을 밝혀내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다 백인이었기 때문에 톰은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밥은 여전히 판사의 집을 습격하고 애티커스의 자녀들을 위협합니다. 짐도 밥에게 팔이 부러지는 공격을 당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 밖으로 안 나오던 부 래들리가 나와 밥과 싸워주었고 밥은 칼에 찔려 사망합니다.
다행히 보안관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냥 자기 혼자 넘어져 그렇게 된 것으로 목격 증언해 주겠다고 하고 마무리됩니다.
《앵무새 죽이기》는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의 도덕적 가르침과 용기를 통해 스카웃과 젬이 세상의 편견과 불의를 극복하고, 타인과 화해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이 책에서 형제간의 관계 회복과 성장을 끌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정말 주님 앞에 예물을 들고나와도 소용없는 사람은 타인에게 원망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앵무새를 죽인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사.시.]에는 이것이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존재였고, 세리는 죄인이기는 하였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리사이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대신 갚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돈을 바쳤고 세리는 감히 나서지도 못했지만, 누가 의롭게 되어 돌아갔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기도나 미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양심 성찰이 이것입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은 없는가?’ 앵무새를 살리려고 목숨을 거는 아버지에게 앵무새를 죽이고 와서 죽은 앵무새 고기를 바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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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1세기에 여전히 종교는’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종교의 발전 과정에서 학자들은 ‘자연, 신, 인간’의 흐름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의 엄청난 힘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이때 생겨난 종교는 자연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큰 바위, 높은 산, 오래된 나무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보다 힘이 센 동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곰, 호랑이, 사자, 코끼리, 늑대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발전하고, 능력이 발전하면서 ‘신’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민족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정하였고, 신을 경배하였습니다. 이런 신화의 시대가 발전하면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생겼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 유일신의 시대는 신분이 정해진 시대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사회였습니다. 성주나 왕이 종교를 선택하면 백성들 모두가 같은 종교를 믿는 사회였습니다. 이 신화와 신의 시대가 2,000년 넘게 이어왔습니다.
르네상스, 산업혁명, 과학의 발전,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이제 ‘인간’ 중심의 시대가 왔습니다. 자연과 동물을 숭배하던 인간은 신을 숭배하였고, 신을 숭배하던 인간은 이제 인간의 능력과 인간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열었습니다. 어떤 동물도 인간과 대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차지하던 자리에 인간의 과학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서 인간은 누군가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였던 곳에서도 비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 종교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비신자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가 가지는 힘은 ‘친교, 공동체, 조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지갑을 들고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1인 가구의 비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고독하고,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인 체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지식, 윤리적인 실천은 여전히 종교가 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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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셨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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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율법이 완성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율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구체적인 본보기로 가르치십니다.(5,21-48 참조)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간음하지 마라.’는 율법을 ‘음욕을 품고 바라보지 마라.’고 이르신 것처럼,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에 자리 잡은 죄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뽑아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것처럼 율법에서 제시하는 범위를 더 넓게 확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행위를 금지하는 율법을 넘어서, 살인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인 화를 금지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를 더 깊은 수준의 내면생활로 초대하시며 율법의 진정한 목적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고해성사 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성찰합니다. 이때 우리가 저지른 죄의 행위만 생각하고는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죄를 어떻게 저질렀고, 그 죄를 몇 번 지었는지 세어 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를 더 깊고 성숙한 성찰로 초대합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죄의 뿌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던 이 죄의 뿌리가 자기 생각을 어떻게 움직이고, 그 생각이 어떻게 습성과 태도를 형성하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죄가 몇 번의 실수만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습성이며, 내 삶과 온 존재의 총체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잡초를 없애려면 땅 위로 보이는 줄기만이 아니라 뿌리까지 베고 캐내야 합니다. 죄의 뿌리를 봄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회개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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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0-24)
1) 앞의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5,17)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율법 실천을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형제를 모독하는 일도 십계명 제5계명을 위반하는 일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라는 계명을 폐지하신 일이 아니라, 그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라는, 즉 계명 실천을 완성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살인’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만큼이나 ‘큰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그 미움을 없애는 것까지 해야 계명 실천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감추고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나는 십계명 제5계명을 잘 지킨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자의 위선’입니다.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것도 죄이고, ‘위선’도 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실 그 마음 자체가 죄입니다. ‘죄의 뿌리’가 아니라, 그냥 죄입니다.>
뒤의 6장에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6,4.6.18) ‘숨은 일’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한 일을 뜻하기도 하고, ‘마음속’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동도 보시지만, 우리의 마음속을 먼저 보십니다. 그러니 제대로 회개하려면 우선 먼저 마음속부터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 선언’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8)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2) 20절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하고 경건하고 깨끗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고, 그래서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라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3) 23절의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형제가 나에게 화가 나 있고, 나를 미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도 죄이고, 그 형제가 분노와 증오심을 품게 만드는 것도 죄입니다.>
(1)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 형제가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남을 용서하는 일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살다보면 남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그런 경우에, 형제와 화해하려면 내가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형제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2)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그 형제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또 화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형제가 화해하기를 거부한다면, 역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2베드 3,9)>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언제나 항상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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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아 신부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을 뜻하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뜻에 대한 충실을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매우 중요한 낱말로, 예수님께서는 특히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시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절에서 48절까지 이어지는 구절은 ‘여섯 가지 대당 명제’라고 하는 구절의 첫 번째 단락으로서 “너희는 ……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을 심화하시며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는 것까지도 엄격하게 경고하십니다. 또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껄끄러운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마치 훤히 다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주님의 이 같은 요구에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움은 결국 ‘사랑’이라는 한 낱말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이신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과 화해하며 형제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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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화->바보->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매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매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받을 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하신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점 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도려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화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후자(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자격이란 상태적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상황적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 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그뿐만 아니라 "바보"라는 욕하는 자는 중앙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번 삼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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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들>
우리는 하느님을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알고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으며, 또 그렇게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누구나 한 번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맞을 수밖에 없지요.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은 참으로 엄하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 같은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잘 살아야 하는지를 섬뜩하리만치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못마땅해 하시고 늘 야단치셨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는데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단식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지요.
물론 잘못되고 편협한 율법의 해석으로 예수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 지은 잘못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6)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엄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 5,21)는 말씀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놓고 가르치고 계시지요. 살인이라면 우리는 단지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고 또 실정법도 그 정도에서 죗값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단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마음에 관한 것까지도 그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적인 언어,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까지도 갚아야 할 죄라는 것이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에 욕 안 해보신 분 있으신가요? 아마 거의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또 지금도 가끔 감정이 격할 때는 마음이나 언어로써 지금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그 정도는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특히 언어적인 폭력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보복하고 싶어하는 감정이나, 함부로 내뱉는 언어적인 폭력들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오래 가게 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정신적인 폭력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험한 말을 하며 치고 받고 싸웠다고 합시다. 심하게 싸워서 한 사람이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5주 동안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한두 달이면 육신의 상처는 없어지지만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말들은 50년이 지나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무서운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증오하는 마음이며 또 언어로써 내뱉는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주 단호하게 이것까지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내면의 감정과 정서는 언어로써 표출이 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말을 내뱉고 책임질 생각도 안 할 뿐더러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함부로 쉽게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 흉기가 될 수 있지요. 말에 대한 경고의 말은 인류 역사의 세월만큼이나 오래 되고, 그 양 또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집회서 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중상꾼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고 네 혀로 올가미를 놓지 마라.”(집회 5,14) 하지만 혀로 사람을 잡는 일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습니까?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반대로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쉽게 천 냥 빚을 지기도 합니다.
또, 집회서 28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 28,17)
말로 입히는 피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불화는 물리적 폭력에서가 아니라 언어 폭력에서 비롯되지요. 형제지간에 갈등이 심화되어도 몸싸움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험한 말로 심각하게 싸우지요. 생각만 해도 벌떡 일어나는 말들로 상처를 주고받고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당 공동체를 사목하면서 신자들을 해치고 상처를 주며, 그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갈등은 혓바닥에서 기인한다는 겁니다. 악의 뿌리인 혀가 결국 사람을 잡는 것이지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말한 본인은 곧 잊고 말지만 상대방의 가슴에는 그 말이 평생 남아서 미움의 감정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하는 그 어리석음이 모두 ‘말’을 통해 자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대부분 언어로써 드러나고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 일생을 ‘배’라고 볼 때 내 일생을 조정하는 방향을 잡아주는 키가 바로 ‘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혀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음의 바다로 내몰기도 하고, 반대로 생명의 바다로 안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수없이 쏟아놓은 말들 중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많습니까? 죽이는 말이 더 많습니까?
혹시라도 내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죽음의 바다로까지 내몰린 이웃이 있다면 중앙 법정에 넘겨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특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도 닦는 마음으로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인은 ‘말’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이 상처받은 마음에 새로운 살을 돋게 해주는 치유의 말, 또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 화해를 샘솟게 하는 말,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언어와 사랑의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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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저는 나이 들어가는 게 참 좋습니다. 아직도 욱하는 성깔은 여전하지만 나이 들수록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고 느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나서지 말고, 나대지 말며 보고도 못 본 척하라!’라고 다짐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런 성향을 제 아버지로부터 받지 않았을까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순전히 나쁜 놈만은 아니듯이 저의 아버지도 좋은분이셨고, 교회나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잘 참긴 하셨지만,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으로 뭔가 수틀리면 화를 잘 내셨습니다. 참는 게 좋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으면 병이 된다.’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면서 자신 안에 억압하거나 투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마치 땅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참지 말고 받아 드리길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화가 나면 화를 표현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건강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화가 나면 그 화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들으려고 해야 하며,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표현할 수 없다면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하고 가르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결정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으며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신뢰하면서 제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주님의 가르침은 우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참된 의로움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기들만 의롭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로움은 위선이고 독선이라고 주님께서는 비판하십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운 척하는 것이며 그렇게 의로운 척하는 것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께서는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과 직관을 통해서 참된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3, 6.7.9) 결국 오늘 우리가 살고 실천해야 할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율법에 따른 의로움은 신념이었지 믿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체험이고 이를 바탕으로 주님이신 예수를 믿고 따르며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의로운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구원되는 것이라 믿었기에 모든 과거의 것들을 쓰레기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되는 까닭’은 살해당한 사람은 물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자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포함한 죄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힘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죄란 하느님=타인=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파괴이며 단절입니다. 죄란 단지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 우리는 단지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나 규범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는 것입니다. 아울러 죄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있는 다른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죽이는 살인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는 어떤 누구를 무시하거나 멸시할 권한은 없으며,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은 곧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며 반항과 같기에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강하게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깨어지거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우리의 의지만으로 할 수 없으며, 화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회복을 이루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용서이며 화해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도움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예물을 봉헌하기 이전에 주님께 대한 사랑의 헌신은 바로 형제와 화해하고 다시금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리고 잘못했다 하더라도 용서하며 살아갑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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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혹시 레밍(lemming)을 아십니까? 어느 정치인이 우리나라 국민을 빗대서 ‘레밍’이라는 표현을 써서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나그네쥐라고 불리는 이 레밍은 자살하는 쥐로도 유명합니다. 일정 수 이상의 개체가 밀집하면 메뚜기 마냥 갑자기 행동 양식이 바뀌어서 떼를 지어 무작정 몰려다니는 기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이가 바닥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행동이지만, 한번 떼를 짓는 순간 무작정 앞을 향해 직선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만 한다는 게 이상한 점입니다. 이러다 보니 땅끝 해안 절벽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우르르 떠밀려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살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가 미화되어서, 개체군의 밀도가 높아지거나 먹이자 부족해지면 늙은 쥐들이 후손을 위해 스스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단지 습성이었고,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뒤따르는 다른 쥐에 밀려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고귀한 동물처럼 생각했지만, 사실 레밍은 군중심리로 인해 비이성적, 비합리적 행동을 생각 없이 집단으로 하다가 파국적 선택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남들처럼 살려고 합니다. 나만의 삶이 아닌 너의 삶, 그리고 그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나답게 살지 않을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작정 앞으로만 갈 뿐입니다. 혹시 레밍처럼 절벽 아래까지 무작정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남들의 삶이 세상의 뜻만을 따르는 삶입니다. 남들처럼 풍요와 안정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는 나만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끔찍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잘 아는 율법의 내용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되나.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율법 내용의 준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되고 또 ‘바보!’라고 말해서도 안 되며, ‘멍청이!’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아닌,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들처럼만 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그렇게만 살게 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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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능가하지 않으면!”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1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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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께
가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에게 가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을
만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을 만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과
화해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과 화해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과
함께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과 함께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을
사랑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을 사랑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과
살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과 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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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된다.’라는 율법과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에 대한 율법을 동일한 위치에 놓아둡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는 우리는 다소 의아합니다. ‘살인’과 ‘미움’이 가진 죄의 경중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회법 안에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행위는 정당한 책임을 묻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죄, 혹은 사소한 말다툼을 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상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습니다.
나아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번 쯤, 타인을 미워하거나 사소한 다툼을 했던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분이, 나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잘못으로 인한 불편한 마음을 갖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 앞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다소 가혹하게 들립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눈높이에서 물리적 상해와 내면적 상해를 구분하지 말고 같은 범주 안에서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리적 상해’와 ‘내면적 상해’.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바로 “상처”를 남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다가 누군가가 쏜 화살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몸에 박힌 화살을 뽑고 재빨리 병원으로 가서 그 상처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처는 덧나지 않고 잘 아물어 몸에 최소한의 흉터만 남깁니다. 그러나 말로써 상처를 받았을 경우, 우리는 이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나, 이를 어떻게 되갚아주어야 하나 고민합니다. 한마디로, 화살은 내 몸에 박혀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데 이를 치료할 생각보다는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동안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결국엔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깁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가혹한 말씀이 아닌 우리에게 남겨질 상처를 치유시키고자 원하는 예수님의 사랑의 권고로 전환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형제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이란, 탈출기 21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계명으로 대표됩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갚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과거 원시 시대나 고대 사회 안에서 적용되던 이 동태복수법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법을 지키는 것과 동태복수법의 실행 사이에서의 괴리는 많은 갈등을 유발했고 결국 이 법은 랍비들에 의해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치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용서의 모범으로 이를 완전히 폐기 시키십니다. 복수란, 인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겨 끝없는 갈등을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를 선포하는 바오로는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모세의 율법으로 인해 덮여 있던 마음의)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형제들을 용서한다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상처는 사라지고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 자신의 상처들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만약 지금도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가 있다면, 혹은 내가 화살을 들고 다른 사람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상처들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그토록 주님께 청하고 바라는 죄의 용서와 사랑 그 뿐입니다. “어둠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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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의로운 삶>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성도들은 춤추며 즐기게 하소서.”(시편132,9)
제가 강론을 쓰면서 참 많이 등장하는 말마디가 “참”이요 “참으로”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도 “참 의로운 삶,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으로 정했습니다. 유난히도 우리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말마디같습니다. 참을, 진리를 추구하는 타고난 정신을 지닌 한국인들같습니다.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 봤습니다.
“순우리말로 진실, 사실이라는 뜻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참말이냐 거짓말이냐’ 등의 예문이 있다. 접두어로는 ‘진실하고 올바른’ 혹은 ‘품질이 썩 우수한’, ‘먹을 수 있는, 맛이 좋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기름, 참나무, 참꽃, 참교육, 참군인, 참사람등이 있다.”
새벽 일어나 우선 열어보는 것이 교황님의 홈페이지입니다.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 제목은 ‘성령이 성서를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였습니다. 성서대신 사람을 넣어, ‘성령이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즉 참사람이 되게 한다로 읽어도 좋을 것입니다. 또 2025년 희년을 맞이한 바티칸 메디아 주제도 멋졌습니다.
“관광객에서 순례자로: 자신을 변형되도록 하라!”(From Tourist to Pilgrim: Let yourself be transformed!)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말마디에는 영어나 한자를 병기하게 됩니다. 흔히 믿은 이들의 여정을 순례여정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관광객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순례자, 진리의 순례자로 살아갈 때 참삶의 실현이겠습니다. 마침 다산의 말씀도 참삶에 대한 지침처럼 보입니다.
“동물은 오늘을 살기에 일희일비하고, 인간은 오늘을 쌓기에 일취월장한다.”
“안목이 짧은 사람은 오늘 뜻대로 안되면 울고, 내일 뜻에 맞으면 생글거린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참을 추구하는 이가 참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우리의 성소도 관광객이 아닌 참된 순례자의 진실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 말씀에서 착안된 참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제자들의 충실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충실성, 더욱 새롭게 되고 절박하게 된 충실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곳곳에서 이런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ㄱ)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5,10ㄱ)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3,15ㄴ)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6,1ㄱ)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6,33ㄱ)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마태21,32ㄱ)
정적이 의로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양되고 업그레이드 되는 동적인 의로움으로,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처럼 진리의 근원인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이런 의로움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6개의 대당명제를 제시하시며, 그 첫째가 오늘의 “성내지 말라”입니다. 200주년 성서와는 달리 새번역 성서는 “화해하여라”입니다. 화해하니 요즘 한창인 개망초 들꽃들이 연상됩니다. 화해라는 멋진 꽃말에 개망초꽃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저는 “성내지 말라”가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성내지, 화내지 말아야 합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이들이 자주 화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지도자를 보면 자주 격노했다는 보도를 보는데 지도자로서는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내는 것 반대로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해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을 한층 깊이있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형제에게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말하는 자에게 격렬한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형제들에 대한 이런 이성을 잃은, 형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막말은 그대로 간접적 살인에 버금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노나 비난은 살인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여차하면 살인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쇄신, 마음의 뿌리로부터의 변화를, 정화를 요구하는 의로움입니다.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들과는 화해후 예물을 바치라는 요구, 고소한 자와는 얼른 타협하라는 권고 역시 삶의 지혜이자 참된 의로움의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두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이요,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혼자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살핀다는 신독(愼獨)의 수행과 습관도 참으로 필요함을 느낍니다.
바로 이런 참된 의로움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듯이 가뭄해소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의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의 기도가 하느님을 감동케 하며, 엘리야의 이런 마음은 다음 동작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엘리야는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릅 사이에 묻었고, 무려 시종에게 일곱 차례까지 묻습니다.
“올라가서 바다쪽을 살펴보아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시종의 대답입니다.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삶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킨 엘리야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주님의 손이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뛰아가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의 한생애가 참 극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얼마나 치열한 진리 추구의 의로운 삶인지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포르투칼 리스본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 태어났지만 15세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참사회원으로 입회하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복음적 생활 방식과 순교에 크게 매료되고 감화받은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에 입회했고,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습니다.
모로코로 파견된 안토니아는 심한 병으로 회항하여 귀국길에 오르던중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 섬에 도착했고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어 그는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고 그의 인정을 받아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게 됩니다.
당대 설교가로서 성 안토니오를 능가할 자는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성인을 ‘성경의 보물창고’, ‘신약의 방주’라고 불렀습니다.
성인은 이례적으로 35세로 선종한 후 다음 해 1232년 5월30일 스폴레토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2세는 거의 700년 후 1946년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합니다. 안토니오는 젊은 프란치스코회 수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특히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았던,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다가 승천한 엘리야요, 하느님의 불꽃같은 치열한, 의로운 삶을 살다가 35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회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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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으로>
안토니오는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정적인 평가의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있는 곳에 만족치 못하고 부적응한 변덕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긴 것은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성덕과 열성 때문이었습니다. 더 잘살아보려는 거룩한 원의 곧 뜻에 따라 옮긴 것으로 그뿐 아니라 성인들 가운데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그의 뜻이었다면 그의 뜻이 아닌 것이 그의 일생에 더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일생은 뜻하지 않은 일이 많았던 한 생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한 생을 요약하면 뜻하지 않았던 한 생인데 하느님 뜻이었던 한 생입니다.
자기 뜻에 따라 작은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자기 뜻에 따라 모로코로 순교하러 갔지만 그의 뜻은 병으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향 포르투갈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배는 풍랑으로 인해 고향이 아니라 이탈리아로 갑니다.
이 풍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곳에서 조용히 은수자로 살고자 하였는데 참석한 서품식 강론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안토니오가 강론하게 됐고 이로 인해 설교자가 됩니다.
이 갑작스러운 일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무튼 그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설교자가 되고, 관구장도 되고, 프란치스칸 최초의 신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서른여섯의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흔히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불에 타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가요 신학자였지만 오늘 지혜서의 말씀처럼 기도에서 얻은 지혜로 설교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나는 기도를 올려서 지혜를 받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정신을 얻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주겠다."
이것은 또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신학 교수직을 허락하며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았고, 그 영의 불이 활활 타올랐으며 그래서 기도의 영으로 가르치고, 헌신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뛰어난 설교가’요 ‘곤경 중의 전구자’로 인정합니다. 지금 치면 대학자가 강단에만 서지 않고 서민들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 뜻이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너무도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것인데 여러분에겐 어떻습니까? 내가 뜻하지 않은 그러나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을 안토니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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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
<능가함의 믿음!>
오늘 복음(마태 5,20ㄴ-26)은 '예수님과 율법'에 관한 끝 말씀과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 '화해의 모습'을 제시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무랄데 없이 하느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남에게도 가르쳤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어제도 함께 나누었지만, 율법을 형식적, 외향적, 문자적으로만 지키는데에 머물지 말고,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켜야 할 율법(계명)의 범위를 확장시키십니다. 곧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마태 5,21)는 율법을 뛰어넘어, '살인죄의 뿌리인 내면의 분노와 화'까지도 금지시키십니다. 그리고 원한 관계에 있는 형제자매들과의 화해를 통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사랑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용서와 화해없이, 하느님 사랑의 행위로 미사에 참례하고 또 성체를 받아모시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직접 화해하고, 아니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씻어낸 다음에 성체를 받아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칸의 위대한 성인이신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의 뛰어난 설교로 이태리 파도바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로 인도된 일화로 널리 알려진 성인입니다.
'뛰어난 언변과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설교를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믿는 '능가함의 믿음'을 드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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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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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먼저 형제와의
화해를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빚어내시는
화해의
나날들입니다.
화해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을
실천하는
기쁨입니다.
형제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화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화해를 통한
새로운 기쁨을
주십니다.
화해의 칼날은
먼저 우리자신의
이기심과 섭섭함
미움과 두려움을
잘라냅니다.
아픔을
건너뛰지 않는
화해의 여정이며
기꺼이 우리의
상처까지
내려놓는
화해의
봉헌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화해를 시작합니다.
의로움의 길과
화해의 길은
같습니다.
화해의 여정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삶입니다.
진정한
형제가 되는 길은
예물을 내려놓고
먼저 그 형제와
마음과 마음으로
간절히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평화이며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바쳐야 할
예물의 지향과
화해의 방향점이
우리의
묶인 마음에서
나오게 하는
하느님의 자비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화해를 청하며
화해를 나누는
생명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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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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