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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 14] 대승불교의 성격과 주체 / 정병조
대승불교의 역사적 성격
대승은 인도말 마하야나를 옮겨 적은 것이다. 마하(maha)란 '광대무변한', '매우 큰' 따위의 의미를, 야나(yana)는 '수레','~을 타고 옮겨가는 물건'이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대승, 즉 마하야나란 큰 수레', 또는 '위대한 수레'라는 의미를 갖춘 말이다. 역사적으로 대승불교의 운동이 언제부터 일어났느냐 하는 것은 분명히 확정지을 수 없는 면이 있다. 우선 대승불교가 일어난 곳이 불분명하다. 대체로 남인도 부근에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 하게 그 지점이 어디이고, 어느 인물에 의해 주도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던 부파불교와 관련된 잘못된 것들에 대한 지적들이, 마치 강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듯이,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또 대승불교가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어떤 학자는 부파불교가 한창 전성을 이루던 기원전 4~3 세기 무렵에는 이미 전인도를 풍미하고 있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기원 전후의 시기가 되어 서야 확정적인 운동으로 결정 지워졌다는 설이 있다. 또 대승불교의 지론적인 완성자, 특히 반야불교의 핵심이라 할 중관철학을 이룩한 용수보살이 출현한 기원후 3세기 중반 정도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설도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 운동 자체가 특정 인물이나 특정 지역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기보다는 전반적인 그 시대의 흐름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볼 때, 그 사상적인 기원은 기원전 4~3세 기경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러면 대승불교의 역사적 성격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까지는 일부의 사제에게만 성경이 읽혀졌다는 사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님들의 말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면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점은 각자의 양심에 달린 문제이다. 그렇다면 먼저, 부처님의 말을 읽어야 하고 그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소승적인 분위기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 부파불교시대가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것은 부파불교의 학문성을 들 수 있다. 이 학문불교의 성격은 다시 재론할 것이다. 간략히 언급하자면 불교를 논리적, 이성적으로 완성시켜 보려는 노력이다. 흔히 종교를 감성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는 감성이 필요할 지라도 감성만으로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논리와 합리가 있어야 한다. 만약 논리와 합리성 없는 감성만의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을 면치 못할 것이다. 거꾸로 감성은 없고 냉철한 지성만이 있는 종교, 이것도 불가능하다. 요컨대 감성과 지성이 조화를 이루는 종교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문 적인 불교의 전통이 배제되고 온통 가슴만의 종교를 강조하다가 보면 바로 이것이 맹신이 되고 광신이 되는 것 이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특히 구사론을 중심으로 해서, 그 당시의 불교인들이 사물을 '75법'이라 하여 세밀 하게 분석한다. 그 분석을 토대로 해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는 철저한 학문불교의 전통을 만들어 나갔던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
첫째, 대승불교 교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대승 운동가들이 최초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부파불교도들이 빠져 있었던 법유아무의 사상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없고,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무상 속에서 호흡하는 우리들의 실존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나'라고 하는 존재의 무상성은 강조하면서도 자연 만물의 영원성을 입중하려고 하는 논의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입장이다.
특히, 초기의 대승불교도들에게 직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부파불교 가운데서도 설일체유부, 경량부 등의 교리였다.
둘째로, 대승불교에서는 이타행이 결여된, 즉 자신의 수 도에만 몰두하고 있는 부파불교의 수행자들에 대한 통렬 한 비판이 일게 된다. 불교란 무엇인가? 해석자에 따라서 여러 가지 관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불교의 목표는 인격의 완성과 더불어 사회의 정화라고 생각한다. 인격의 완성은 '자성성'이라고 표현되며, 사회의 정화 내지는 불국정토의 구현은 '이익중생'이라는 말로 대변한다.
그러나 이 양자를 조화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다. 사실 자신의 공부에 몰두하다 보면, 불행한 이웃을 외면하기가 십상이고, 또 불행한 이웃 속에 파묻히어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다 보면, 자신의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자리와 이타가 하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조화시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파불교시대에는 자리적인 면, 즉 자신의 수행만이 강조되었다고 대승불교인들은 주장한 것이다. 그 결과, 불교의 질적인 변환이라고나 할까,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불행한 이웃,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승불교도들은 자신들을 크고 위대한 수레라고 주장하면서 여타의 기성종단, 특히 부파불교의 그릇된 수행의식을 가진 이들 을 소승불교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대승과 소승 사이의 가장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는 업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만약에 대승불교에서 주장한 것처럼 업에 실체가 없다면, 그 실체가 없는 업이 어떻게 윤회를 일으키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또한 업에 실체가 있다고 인정된다면, 모든 것이 무상한데도 불구하고 업만은 무상하지 않다고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밖에 부처님이 과연 한 사람뿐일까, 아니면 여러 사람 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승불교는 모든 인격 속에 부 처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본질적 으로 다불의 사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파불교 도들은 이점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입장, 즉 부처님은 한 사람뿐이라는 입장을 대변하는 불교의 경론으로서 미린다팡하 또는 미란타왕문경라는 경전이 있다. 이 책은 사실 경전이기보다는 희랍의 왕, 메난드로스와 인도의 지성을 대표하는 나가세나스님 사 이의 논쟁을 기술해 놓은 것이다. 그 내용은 무아, 공, 무 상, 열반, 윤회 등의 불교적인 중심 개념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희랍의 지성을 설복하는 것이다.
그중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 경전 속에서 부처님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주장을 나가세나스님이 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말한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고, 달이 하나이듯이, 이 우주 속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둘이라고 하면, 이미 그것은 가장 위대한 것이라 말 할 수 없다. 부처님이라는 인격은 지고하다. 이 세상에서 그 위대성을 능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부처님은 한 분 뿐이다. 만약에 부처님이 여러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여럿을 추종하는 각 무리들이 생겨서 분파와 대립이 생겨날 것이다. 따라서 부파를 지양하기 위해서라도 부처님은 오직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논쟁을 펴고 있다.
나중에 대승불교가 일세를 풍미하게 되면서 많은 형이상학적 논쟁이 야기되었다. 예컨대, 돈오점수와 같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소승불교인 선종과 교종에 있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한 논쟁가운데 제 기된 문제이다. 이렇게 불교교단 내부에는 학문적으로 불교를 굳건하게 만들어 주는 많은 논의들이 있었으며, 부파와 대승 사이에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여러 논 쟁들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그들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들어낸다. 이 보살의 사상성에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보살정신을 현양시킴으로써 이타행의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또한 가지 대승불교의 역사적 성격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대승불교 운동이 왜 남인도를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먼저 인도의 지리적인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인도의 중북부 지역은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유럽과 중국을 잇는 이른바 실크로드의 연변에 있기 때문에 고래 로부터 많은 이민족의 침입들이 있었다. 특히 인도의 북부 지역에는 아랍 열강의 침입이 잦았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가 확립된 7세기 이후부터는 호전적인 기질의 회교도들에 의해서 인도의 중북부 지역이 심한 곤란을 당하고 있었다. 기원후 8세기 이후가 되면 인도 중북부는 회 교도와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남인도의 경우에는 그 사정이 다르다. 특히 데칸 고원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남까지는 아무리 강인한 침략자라 할지라도 지리적인 이유로 내려오기가 어렵고 또 매우 더운 기후 때문에 비교적 정치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창시되어진 불교는 원래 그 근거지를 중북부에 두고 있었 다. 중북부 인도, 즉 개지스 강의 중류에서 형성된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반면, 대승불교의 물결은 거꾸로 남인도에서부터 시작되어 서서히 북쪽으로 전파되었다고 하는 점이 이채롭다. 아마도 그것은 위와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배경 때문에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역시 대승불교의 위대한 역사와 사상은 풍성한 경제력 그리고 신심 있는 여러 신도들에 의해서 주도가 되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출가 중심의 불교에 대한 맹렬한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시대가 흐를수록 뜻있는 승속이 모두 참여함으로써 출가와 재가의 구분에 상관없이 부처님 가르침의 올바른 정신을 회복하자는 진실한 불교의 재부흥 운동으로 확립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제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들어서면, 서서히 인도 대륙은 대승불교의 물결 속에 휩싸이게 된다. 대승불교의 핵심, 보살사상 보살은 원래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는 인도 말을 그대로 음사한 용어이다.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트바 (sativa)란 '~을 가지고 있는 존재', '중생', '유정' 등의 의미이다. 그래서 잔문 불전에서는 간혹 '각유정"이라 하여 그 뜻을 취하여 옮긴 경우도 있다.
그것은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은 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보디사트바라는 용어는 불교의 시초에서부터 사용되었던 어휘이다. 이 말이 처음 불교경전에 쓰여 진 것은 본생담이라는 가르침 속에 나온다. 본생담은 부처님 전생 이야기를 모아 놓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본생담에 나오는 보디사트바, 즉 보살이라는 말은 전생의 구도자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여 지고 있다.
예컨대 어느 때, 이러이러한 이름을 가진 보살이 이러이러한 고통을 받았는데, 그때에도 보살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얘기의 끝에는 바로 그 보살이 금생의 부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살이라는 용어는 전생의 구도자를 통합적으로 지칭 하는 어휘로 썼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등장하며 이 보살이라는 어휘 자체를 빌려오지만 거기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단순히 전생의 구도자를 지칭하는 살로써가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전형으로써 이 말을 변화시켰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 한자어로 흔히 쓰는 글귀가 있다. 보살은 어떤 분인가? '자미득도하더라도 선도타'한다. 즉, 자신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나, 다른 이들을 깨달음의 길로 건네 주는 역할을 한다. 또 '상구보리 하화중생한다. 즉,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불행한 이웃들을 교화하는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기본적인 이상이라고 묘사된다.
이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리와 이타의 수행을 겸비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대승불교의 경전 속에 그러한 보살들이 술하게 많이 등장한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보살을 언급해 보자면 미륵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 매우 많다. 또 그뿐이 아니라 화엄경이나 유마경 등에 등장하는 보살의 명칭들은 휘황찬란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여기서 보살이라고 하는 인물은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상징적인 존재라고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관세음보살은 자비가 으뜸가는 보살이다. 또 보현보살은 비원 대행의 으뜸이며. 문수보살은 지혜가 으뜸이라고 본다. 이처럼 부처님의 두드러진 작용 가운데 하나를 갖추고 있음을 상징한다. 특히, 자리이타의 겸수 수행자로서의 면모가 강하다 간혹 외국의 불교학자들이 서양 종교식으로 생각하여 보살은 중생과 부처의 가교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이해를 나타내는 서적도 없지 않다. 물론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중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해 나타난 모습이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깨우침을 준 자는 관점에서는 가교적일 수 있다. 그러나 보살의 위신력을 통해야만 진실한 진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중간적인 존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수기란 부처님이 설법을 한 뒤에, 뛰어난 제자들에게 그대가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약속, 계약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 것은 성불의 명백한 증명이 된다.
위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보살은 수기보살이다. 이미 부 처가 되기로 약정이 되어 있는 보살이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부처라는 장엄한 인격으로 중생들 앞에 다가섰을 때에는, 그들이 열등한 의식을 갖거나, 부처님의 그 휘황 한 진리의 빛 속에서 그 스스로를 낮추는 비굴심 등이 생겨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모습 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기보살일 경우, 이미 부처님과 동등한 자격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서, 후에 발달된 화엄경의 이론 등에 나타난 관세음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비로자나 부처님 등의 삼성일치설 같은 것이 중국의 화엄종에서 크게 대두된 적이 있다. 이것을 삼성원융관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론적 배경이 될 수 있는 것은 화엄경의 주존불인 비로자나 부처님 자체가 영원한 진리의 빛, 법신이신 부처님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라는 실천행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문수보살 또한 이미 부처의 자격을 획득한 보살이다. 지혜가 으뜸인 모습으로 나타나서 무명의 존재, 무명 속을 헤매는 중생들을 향해서 그 지혜의 빛을 발한다. 따라서 수기보살의 경우에는 이미 부처님과 같은 반열에 있는 보살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미수기보살은 수기를 받지 못하였기에 수기를 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된다는 점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보살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많은 보살들은 대승불교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들 모두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지극한 일심의 발로라고까지 그 해석이 발전하게 된다.
우리 마음속에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보현 보살 등이 모두 들어 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기능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은 그 스스로를 삼독의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자신들 스스로가 삼독의 존재라고 착각 하는 것이 바로 무명이다. 무명이란 끊어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관세음보살도 아니고 미륵보살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명이다. 여기에서 중대한 불교적인 논리의 변이를 본다. 스스로가 관세음보살도 되고 미륵보살도 된다는 의지 속에서 자력적인 것과 타력적인 것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는 위대한 불교의 예지를 읽는다. 물론 불교에서는 음조라는 것을 인정한다. 주변의 인과관계 속에서 가피력을 받지 않았을 때, 도저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면 반드시 불교가 타력위주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불교가 반드시 자력위주라고만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대승불교의 가장 주체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보살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묘한 모색을 제시해 주고 있는 일종의 이상적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은 우리들이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름과 동시에 그와 같은 인격으로 화현되어야 하는 이상향적인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대승경전들에 등장하는 보살들은 역사적인 인물이 라기보다는 그 상징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보살사상에 따라서 초기의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그 스스로 보살임을 자처하게 된다.
그리고 보살이 아닌 다른 수도자들을 성문승, 연각승 등 으로 부른다. 특히 발달된 대승의 이론을 정리한 묘법연화에서는 회삼귀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회삼 즉 세 종류의 수도자들이 일승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위 대한 수레에 올라타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에 따르면 부파불교의 소승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수도자들을 성문승과 연각승의 두 부류로 분류한다. 성문승이란 듣는 그대로만 수행하는 수도자들이다. 우리들 주변에도 성문적인 불교인들이 많다. 그들은 관념적으로는 불교들 선호하지만 실천이 결여되어 있다. 그 반면에 독각적인 불교인은 성문보다 지적으로는 뛰어나다. 왜냐하면 성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이해했는데, 독각은 깨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부처님으로부터 무상의 이치를 배우고 난 다음에는 낙엽이 우수수 지는 것만 보아도 '아, 인생이란 허무하고 무상하구나! '라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다. 그러나 성문이건 연각이건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바로 이타행의 결핍이다. 보살이란 어떤 분인가? 그는 이타행을 현실 속에 실현한다. 바로 이와 같은 보살사상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고경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