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집주변에서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낯선 움직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평소와는 달리 집을 든들 때마다 예민해졌고 조심스러워졌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게 되고 계단을 오르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침 일찍 퇴근을 하는 참에 기필코 흔적을 찾아내어 그 불안의 실체를 밝히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계단 구석구석, 지하주차장, 창문 너머까지 세심하게 훑어가면서 4층까지 오르는 동안은 특이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끝에서 무언가 희미한 소리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곳은 볕이 하루 종일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라 나는 가끔씩 식탁의자를 들고 올라와 책을 보기도 하고 옥상으로 내다보이는 먼 산의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는 장소였다. 숨을 고르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 이르기도 전이 그 자리에 딱 멈춰 서고 말았다.
놈이 그곳에 있었다. 정확히 그놈들이었다. 남의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한 그들은 무례했고 불쾌했다. 결정적으로 위험했고 위협적이었다. 다행히 놈들은 나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한 듯 자신들의 일인지 놀이인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이지를 생각했다. 일단 상대는 여럿이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내가 좀 더 유리할 것이고, 놈들의 기선을 먼저 제압하고 나면 물리치기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휴대폰으로 놈들의 사진을 찍었다. 대비 없이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 위험할 수 있는 상대였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놈의 생김새는 더 흉악했고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얼굴은 날카롭게 보이는 뾰족한 역삼각형이고 몸통만큼이나 긴 날개에 배와 가슴에는 갈새고가 황색의 줄무늬가 교차하고 가늘고 긴 다리에도 줄무늬가 뚜렷했다. 머리에는 안테나같이 생긴 예민해 보이는 더듬이가 달려있고 날갯짓을 할 때마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기나 생김새는 말벌인데 말벌도 종류가 많았다. 놈이 어떤 종인가보다는 놈들을 건물에서 쫓아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시급했다.
나는 살그머니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집안의 창들을 꼭꼭 닫고 혹여 집안에 놈들의 흔적이 있는지를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도 집안에는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비닐 우의를 입고 마스크를 하고 긴 고무장갑을 끼고 양손에 모기 살충제인 스프레이 통을 들고 집을 나섰다. 놈들은 네 마리였다. 잠시도 쉬지 않고 공중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춤을 추듯 날고 있었다. 스프레이의 분사구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쌍권총을 쏘듯 놈들을 향해 무차별 살포를 해댔다. 놀란 놈들은 버둥거리며 더 세차게 날갯짓을 해대며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놈들은 파리나 모기처럼 쉽게 지쳐 떨어지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사정거리를 벗어나려 더 버둥거렸다. 나는 놈들이 달아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을 뿌려댔다.
그때 온 건물이 떠나가도록 경고음이 둘렸다. 뒤를 이어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녹음된 멘트가 뒤따라 들렸다. "화재발생" "화재발생" 또 싸이렌이 울리고 2층 3층에서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모기약이 화재감지기에 연기로 감지된 모양이다. 그 사이에 두 마리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내가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사이 두 마리는 도망치고 없었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던 3층의 새댁과 2층 원룸의 총각이 내가 있는 곳으로 뛰어올라왔다.
"말벌 때문에요…" 라고 하는 나의 말에 놀란 것도 잠시, 내 행색을 보는 순간 그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느라 애쓰는 것 같았다. 비닐 우의에 마스크에 고무장갑에다 모기약 두 통을 양손에 쥐고 있고, 화재 경보는 여전히 울리고 있고. 당황해하는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3층 새댁이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2층 총각이 말벌에 쏘이기라도 하면 큰일 날 뻔했다며 아직 버둥거리는 말벌 두 마리를 발로 꾹 눌러 밟았다.
최근에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갔다가 마벌을 여러 번 봤다는 새댁의 뒤를 따라 흩어져서 옥상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기…" 3층 새댁이 가리킨 곳에는 배구공 반을 잘라 놓은 듯한 모양의 커다란 벌집이 매달려 있었다. 놈들은 물탱크가 있는 난간의 아랫부분에 집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수십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놈들은 벌집 주변을 분주히 드나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어느 정도의 말벌들이 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건물 안에서 마주친 몇 안 되는 놈들은 더 나은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었거나, 열린 창틈으로 들어와 몰래 놀고 있다가 봉변을 당한 건지도 모른다. 가끔 바람결에 들리던 기분 나쁜 웅성거림이 많은 벌들이 내는 소리였다는 걸 그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말벌집의 크기와 숫자에 겁을 먹고 옥상 문을 닫고 일단 후퇴했다. 오가면서 어쩌다 마주쳐도 눈인사 정도만 하고 다니던 이웃들이 공동의 적 앞에서 스스럼없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2층 총각이 119에 전화를 하고 3층 새댁은 유치원에서 오는 아이를 데리러 갔다.
5분쯤 지나자 소방차가 싸이렌을 울리며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두 분의 소방관이 사다리를 메고 커다란 장비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소방관들의 시선은 벌집보다 먼저 나를 향했고, 그 순간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겸연쩍게 따라 웃기는 했지만 어디로 숨고 싶었다.
"아이고, 말벌 집 여러 개는 족히 따실 복장입니다. 허허허… 하지만 다음부터는 위험하니까 직접 퇴치한다고 그러지 마시고 바로 신고부터 하십시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네"라고 대답을 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내려와 우의와 장갑을 벗어던지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겼다. 십 분쯤 지나자 옥상 문이 열리고 바닥에는 새까맣게 그을린 말벌들의 사체와 벌집의 부서진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다. 3층 새댁이 어느새 시원한 오미자차를 소방관과 우리 것까지 챙겨 왔다. 음료를 마시며 소방관은 사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집주변을 자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이곳은 말벌이 집짓기 좋은 조건인 곳이라 다시 집을 지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소방관이 내려가고 이웃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쓸어 담아 놓은 벌집의 잔해와 그을려서 오그라진 말벌의 사체를 보면서 조금 미안하고 가여운 마음이 잠시 들기도 했다. 조건이 좋은 살만한 곳에다 집을 짓고 가족과 밥을 해먹고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 어디 사람에게만 중요한 일이겠나.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면 동물이든 날짐승에게든 선택하고 싶은 좋은 장소이겠지. 하지만, 인간과 말벌은 같은 공간 안에서 공존할 수 없기에 무력을 써서 그들의 집을 무너뜨리고 죽이거나 쫓아냄으로써 우리의 집과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합심해서 말벌들을 쫓아내고 난 후에, 그동안 인사도 대화도 없이 스쳤던 이웃들이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따스하고 선선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서 행복한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또 '4층 우의 아줌마'라는 우스꽝스런 별명도 하나 늘었다.
(이윤경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