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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효도
퇴근시간이 가까워서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전화벨 소리를 듣자마자 수화기를 들었다.
누군가와 약속된 전화도 아니건만 재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교감 김대철입니다.
-아, 그러세요,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 -네, 말씀하세요.
-저는 팔십 세 되는 학부모입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50리 길 떨어진 산골에서 살고 있어요.
귀교 2학년 학생의 할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학교 운영을 잘하시고 교장, 교감 선생님이
훌륭하시다는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나는 또 무슨 시비조의 전화구나 하는 예감이 언뜻 들었다. 네, 네 소리만 하였다.
목소리가 비교적 예의가 있어 보였다. 안심은 되었다. 요즘 들어 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요구 사항이나 불만, 자기 자녀 위주의 전화가 많았다.
-더구나 귀교는 효를 생활의 기본으로 잘 가르치신다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학교가 어떻게 2학기 중간고사를 추석 전, 귀향 막바지 날까지 봅니까.
몇 백 리 떨어진 시골이 고향이고 연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귀향을 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가 도무지 안 갑니다.
-금년에는 추석 연휴가 긴데 왜 시골엘 못 갑니까, 추석이 월요일이라서 토요일 오후부터
내려가시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교감 선생님은 댁이 어디신지는 몰라도 시골이 먼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험을 금요일에 끝내든지 아니면 추석 지내고 시험을 보면 아무런 일이 없을 텐데,
왜 하필 토요일에 시험을 끝냅니까. 듣고 보니 그것도 옳은 말이었다.
금요일에 시험이 끝나도록 일정을 잡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세심한 생각이 들지 못하였다.
학교 운영위원회 심의 때에도 왜 모두 그런 생각을 못하였을까. 학부모 한 사람이라도
이의를 제기했다면 조정을 할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지금 와서 변경할 수도없는 일이다.
-충분히 추석을 배려해서 그렇게 일정을 잡은 건데, 말씀을 듣고 보니 할아버지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왜 못합니까? 나도 공직에서 정년한 사람이지만 다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밤늦게 도착하실 수밖에 없겠네요.
-밤늦게라도 오고갈 수 있다면 왜 이런 말씀을 드립니까. 효를 중시한다는 학교가 왜그럽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마는, 학생 애비는 우리 집의 4대 독자입니다.
손자라고 늦게 하나 두었는데, 이번에 그 애들 식구는 볼 수가 없어요. 핏줄이라고
그 애 식구들뿐입니다. 2학년 반장 김철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전교에서
성적이 1,2등이라고 합니다. -아, 그럼 철이 할아버지세요. -네, 그렇습니다.
철이 어머니는 학교 운영위원회의 한 사람이라 중간고사 일정 심의할 때도 참석하였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하였다. -추석 때 학부모님 귀향엔 지장이 없겠지요?
내가 미심쩍어 묻기도 하였다. 그때 철이 어머니의 말이 기억에 새로웠다.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예요, 또 시골엘 못 갈 형편이면 갈 수도 없는거니 잘 되었어요.
시험 끝나고 아이들이 놀 수 있으니 잘 되었어요. 전원이 찬성이었다.
그 후로 철이 어머니는 학교에 자주 왔다. 추석 연휴가 길어서 좋다느니, 어디 멀리라도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느니, 아빠와 함께 좋은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농담 삼아 한 말이
떠오른다. 시골 할아버지와 철이 어머니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내 손자 녀석은 5대 독자가 되는 겁니다. 한 달 전부터 비행기 표도 못 구하고,
광주까지 고속버스 표도 못 구했답니다. 이러니 어떻게 그 애들 식구를 볼 수가 있습니까.
추석 때는 성묘를 하며 조상만 받드는 것이 아니고 자손들이 시골 고향 집에 모여 앉아
얼굴도 마주 보며 가족끼리 즐거워하는 것인데, 내 나이 팔십이고, 할머니는 한 살 위이니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금년 추석에 못 보면 영영 못 볼 생각이 들기도 하여 이렇게 전화로
길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작년에도 애비의 직장 야근 때문에 못 왔어요.
나는 정말 야근때문에 못 갔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네, 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죽을 때까지도 핏줄을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 더구나 추석 때면 더욱
그리울 텐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분명 철이 엄마는 아들 시험을 핑계 대고
시골에 갈 수 없다면서 어디론가 여행을 갈 것 같았다.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명절 때 여행 가면 재미있으니, 교감선생님도 한번 가보시라고.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추석 때 자식들 얼굴을 못 보게 되어 서운한 마음에 길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감사합니다.
수화기를 놓고 나는 왠지 허탈하기만 하였다. 그래, 금요일에 시험이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 할아버지는 어쩌면 추석 전에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노인들은 유난히 가족이나
먼 핏줄까지 자꾸 생각하면, 얼마 안 가서 돌아가신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추석의 둥근달
만큼이나 저 할아버지 가슴에는 텅 빈 허전함만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핏줄과 가족의
정이 한곳에 모이는 날이 추석과 설날이 아니던가.
80여 년의 긴 생애에 마지막 추석일지도 모르는 철이 할아버지, 둥근달만 하염없이 바라볼
쓸쓸한 철이 할아버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직원들이 퇴근한 사무실은 넓기만 하였다.
철이 할아버지의 한은 어쩌면 나에게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책상 서랍을 잠그고 사무실을 나왔다. 소주 한 잔에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문득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병은 차도가 어떠하실까, 가보지고, 문안 전화도
그동안 못하였다. 이래저래 마음은 무거웠다.
일찍 집으로 가자. 집 근처 똥돼지 술집 간판을 보면서 집으로 향하였다.
입추가 지나 절기로는 가을이건만 늦더위는 기승을 부렸다.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틀었다.
저녁밥을 먹고 거실에 누웠다. 자손들이 많아도 자식 노릇 제대로 못하는 우리 형제들이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말이 없으신 어머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 이렇게 무능하고 무력한가.
밤 아홉 시 반쯤 TV를 껐다. 뉴스도 별다른 것이 없었다, 잠을 청하였다. 선풍기 바람도
후덥지근한 밤더위를 이기지 못하였다. 억지로 잠을 청하였다. 온몸이 땀에 젖는다.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또 무슨 전화일까. 따르릉, 따르릉···.
다급한 전화벨 소리였다. 이 밤중에 누가 전화를, 혹시 어머님이? 85세의 노환이라 언제
돌아가실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밤중에 전화만 오면 가슴이 철렁하고 놀라는 것이다.
수화기를 들었다. 바로 밑에 있는 동생 대호였다. 술 취한 목소리였다.
-형님이세요, 아작 안 주무셨네, 지금 바로 나오세요, 큰형님도 같이 있어요,
형님 댁 바로 밑에 있는 제주도 똥돼지 집예요.
-어떻게 이 밤중에 여기까지, 우리 집으로 오지 않고···.
영등포에 살고 있는 대원이 형님과 같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알았어.
술집은 손님이 많았다. 더위를 술로 잊는 모양이다. 열 개쯤 되는 탁자마다 손님이 꽉 차 있다.
도로변 잔디밭에 간이 탁자까지 손님이 가득하다. 고기 굽는 냄새, 왁자지껄 떠들고 웃는 소리,
한 잔 더 하라고 권하는 소리, 탁자마다 소주병이 즐비하다. 형
님과 동생은 송판으로 만든 이동식 마루에 앉아 있었다. -이리 와. 형님이 먼저 보고 손짓하였다.
-창동에 오셨으면 저의 집으로 오셔야지.술상 옆으로 다가앉았다.
-너의 집보다 이곳이 더 시원할 거다. 형님도 술이 거나하게 취하였다. -자, 한 잔 받어.
-술 취하신 것 같은데···. -빨리 받어!
형이 잔 가득히 소주를 따랐다. 고기를 뒤집으며 동생이 빨리 드시라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시원한 소주가 뱃속을 적셨다. 한꺼번에 더위가 씻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술잔이 오고 갔다. 돼지 갈비는 먹는 것보다 타는 것이 많았다. 동생이 술을 권하였다.
-형님, 한 잔. 술을 가득 따랐다. 나는 잔을 받아 상 위에 놓았다. 형이 손에 든 잔을
단숨에 마시고 또 나에게 권하였다. -내 단도직입으로 말한다.나는 긴장하였다.
-시골에 있는 막내동성, 대석이 말이다. 그놈 참 못된 놈이다. 나는 술을 반쯤 마시고
형님을 쳐다보았다. -그놈이, 어머니를 형들이 서울에서 번갈아 가며 모시라는 거야.
-예! 나는 깜짝 놀랐다. -병들어 꼼짝 못하시는 어머니를 어떻게? -내 말 들어봐. 잔 빨리 줘.
난 잔을 비우고 형에게 잔을 건넸다. 술병을 기울였다. 술이 없었다.
-아주머니, 소주 두 병만 더. 형이 소리쳤다. 다시 술을 따랐다.
-글쎄, 그놈이 말이다, 나보고, 형님이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가라는 거다. -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만 왜 병든 어머니를 모시느냐 이거다. 형들은 어머니 자식이 아니냐,
바쁜 농사철 지날 때 까지만이라도 서울로 모셔 가라는 거다. -부모를 모르는 못된 놈이다.
어떻게그런 말을. 동생이 거들고 나섰다. -이걸 어쩌면 좋으냔 말이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4개월 정도 입원하였다가 퇴원을 하였다.
장기 치료가 되니 집에서 약을 타다가 치료를 하기로 하였다. 걷지를 못하고 겨우 앉기만 하였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말이 나온 거요?
-내가 어머니 간병하러 며칠 전에 시골에 갔었다.
-형님이 시골에 갔을 때···.
동생이 대신 말을 받았다. 술잔을 비우고 나서 말을 이었다.
-형님이 시골에 가셨을 때, 방마다 창문이 낡고 찢어져 보기가 흉해서 방문을 떼 놓고
칠을 하고 창호지를 사다가 문을 새로 바르려니까, 지금은 바빠서 그런 거 할 겨를이 없으니,
그럴 시간이 있으면 어머니나 모시고 서울로 가라는 거다. 형님이 어이없어서 대문 밖으로 나가는
대석이를 불렀대. 그런데 그놈은 못 들은 척하고 느티나무 밑으로 가는 걸
쫒아가서 붙들고 다시 물었대. 너 아까 한 말이 뭐냐고 다그쳤대, 그
러니깐 그놈이 망설이지도 않고, 나만 왜 병든 어머니를 모시느냐, 형님들한테 어머니가 아니냐,
한 달에 한 번씩 형들이 돌아가면서 모셔다가 병간호를 할 수 있잖으냐고 말을 하더라는 거요.
-병들어 꼼짝 못하는 어머니를 어떻게 이 집 저 집으로 모셔, 건강하실 때도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데··· 차라리 빨리 죽으라는 거지.
형이 술을 마시고 빈 잔을 탕하고 상위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유산으로 내게 주신 논 밭 만여 평을 다 그애에게 넘겨줬는데
어떻게 그놈이 그런 말을 하느냐 이거다. 이렇게 나오면 그 땅을 모두 다 다시 내가 찾아야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유산을 자손들에게 분배하였다. 절반 이상은 형님 앞으로,
나머지를 가지고 4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나는 동생이 사업에 쪼들려 빚더미에 있을 때,
양보를 해달라고 해서 넘겨주고, 그나마 동생은 그 논을 막내동생에게 팔아서 빚 일부를 갚고,
나는 땅 한 평도 없다. 그 후 형은 농사를 직접 지을 수도 없고, 또 부모를 모시고
고향을 지키고 있으니 네 앞으로 다 넘겨준다고 해서, 막내 동생에게 넘겨 준 것이다.
-할 수 없다. 땅을 다 찾아서 그걸 팔아다가 어머니를 모실 수밖에, 유산 다 빼앗기고
어머니를 모실 형편은 못 된다. 어머니를 안 모신다니 땅 뺏긴 거나 다름없다.
유산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른 동생들도 빚 때문에 막내동생에게 팔아 버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팔아 넘기느니, 네가 고생되더라도 다 사라고 설득하였던 것이다.
-이젠 도리가 없다. 어머니 안 모신다는데 그 땅 그놈에게 줄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놈은 고향에서도 못 살아, 어떻게 병든 어머니를 유산도 없는 서울 형들에게
내쫓아 버리고 고향에서 살 수 있니? 고향에서 못 산다 못 살아. 불효막심한 놈인데.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뇨?
-오해? 그런 말하지 마. 형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대단한 결심이 엿보였다.
그날 밤, 형도 취하고 나도 취하고 동생도 취했다. 더위도 몰랐다.
며칠이 지나서 형은 서울에 있는 동생들을 다시 불렀다. 부부가 같이 참석하라는 것이다.
종로에 있는 허술한 대중식당이었다. 초저녁부터 손님은 붐볐다.
형수만 불참이고 나머지 동생들은 전원 참석하였다. 7명이 부부 동반으로 앉았다.
갈비를 구워 가며 소주잔을 돌렸다. 병든 어머니를 어떻게 할 거냐, 시골 막내 동생을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긴급 대책회의였다. 좌상이산 형이 말을 꺼냈다.
-시골에 있는 대철이는 어머니를 형들이 번갈아 가며 모셔다가 병간호와 치료비를 맡으라고 하니,
이걸 어쩌면 좋아요? 제수들과 상의를 하고자 오시라 한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말을 이었다.
-먼저 제수님들께 차례로 물을게요, 나는 아시다시피 어린 손자가 둘이고 집사람이 오랜 전부터
병객이어서 모실 수 없으나 둘째 제수는 어때요?
형은 내 옆에 있는 아내에게 먼저 물었다.
-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유산이 없어서 어머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닌 줄은
잘 알아요. 그러나 저는 지금 종합진찰을 받는 중이에요.
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어요. 그래서 모실 수가 없어요 아주버님, 죄송합니다.
아내는 자기 뜻을 준비나 한 것처럼 서슴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형은 내 아내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술잔을 비웠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 그 다음 제수에게 물었다. 제수도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저는 몸이 아픈 것이 아니나, 아주버님들께서 잘 아시는 거와 같이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외판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잘 안돼요. 제 남편도 사업은 안 되고 은행 빚만 늘어나니,
제가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어머님을 모실 수가 없어요.
-다음 제수는? 형은 난감한 표정으로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넷째 제수도 거침없이 말하였다.
-아빠는 직장에서 구조조정으로 나온 후 하는 것 없이 있고, 저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게 돌아오니 식구들 밥도 제대로 못해 주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어머님을 모
실 수가 있어야죠. 도저히 모실 수가 없어요. 좌석은 침울한 분위기였다.
-자, 그러면 예상했던 대로 형제들의 뜻을 알았어요. 술이나 우선 마시고 또 이야기합시다.
고기가 다 탔네요.제수들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집기도 하고 불판 가로 내놓기도 하였다.
-형님, 술 드세요. 나는 형에게 술잔을 권하고 술을 따랐다. 동생들은 나에게 술을 권하였다.
-그러면 어쩌면 좋은가. 나도 해결할 묘책이 없었다. 할 수 없다.
내가 준 땅을 찾아서 내가 모실 수밖에, 돈 없이 어머니를 모실 수도 없잖으냐,
그 땅을 팔아서 서울 어느 변두리에 조그마한 아파트 하나 사서 모실 수밖에 없다.
내가 밥하고 빨래하면서 어머님을 모셔야겠다.”
“그게 쉬운 일인가요? 현실성이 없어요. 내가 말을 받아 안 된다고 하였다.
-현실성이 있건 없건 다른 방법이 없잖아?
시골 동생이 땅을 내놓을 리도 없고 또 당장 팔 수도 없는 일이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할,
참으로 남간한 일이었다.
-막상 땅을 팔아서 어머님을 서울로 모셔 오면 시골 동생 입장은 말이 아니죠,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병든 어머님 모시기 싫어서 큰형에게 물려받은 땅 내놓고
어머님을 버렸다고 할 게 뻔하죠. 그러면 그 애는 시골에서 살지도 못하죠.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런 거 무서운 놈이 그런 말을 하겠니? 사회적으로 매장되어도 좋다는 거지,
또 매장되어야 되고.
-그 애가 고향에서 못 살면 우리가 고향에 못 가요. 동생이 쫓겨난 고향엘 형들이 어떻게 갑니까?
-그래도 할 수 없다. 형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불효막심한 놈이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셋째 동생이 말을 받았다.
-큰형님 땅 물려받았을 땐 어머님 모시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당장 형님 말씀대로 땅 팔어서
서울로 모십시다. 그 방법밖에 없어요.
-다시 한 번 그 애의 마음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어요. 넷째 동생이 말하였다.
-나보고 분명히 말하였어. 서울로 형님들이 모셔다가 몇 개월씩 교대로 모시라고,
또 뭘 확인할 게 있어.
-강아지도 아니고, 어떻게 병든 어머님을 이 집 저 집으로 모시라는 거야. 참 못된 놈이네.
셋째 동생이 화를 참지 못하였다.
-만약 땅을 내놓겠다면 병원으로 다시 모십시다. 그 병원에서 차도가 많이 있었으니.
그동안 어머님은 시골 읍에 있는 한 의대 부속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양방 병원에서는
노환이시니 집에서 간호하는 것이 좋겠다며 치료를 거부하였다, 그러던 걸 한방 병원에 가보았더니
치료가 가능하니 입원을 하라고 하였다. 4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하니 병이 많이 호전되었다.
통원 치료도 가능하다 하였다. 그동안 병간호는 형이 혼자 맡아 하였다. 겨우 주말이면
다른 형제들이 하룻밤씩 교대를 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간병인을 계속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병원 측에서는 퇴원 무렵 물리치료 기구를 사라고 하였다. 집에서 수시로 걷기 연습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리를 못써 반신불수가 된다고 하였다. 앉은뱅이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간호할 자신을 가지라고 하였다. 약은 2주일에 한 번씩 와서 타가고 검사를 꼭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병원에서보다 더 잘 보살피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퇴원비도 막내동생은 한푼을 내지 않았다. 서울 형제들이 얼마씩 나누어서 치료비를 내고
퇴원을 하였다. 퇴원할 때 병원 수위가 농담 삼아 말하였다.
형제 많은 집에 부모가 한 분 입원하면 퇴원할 때는 거의가 다 대판 사움이 벌어진다는 거다.
퇴원 전날 밤 병원 휴게실 한구석에서나, 병원 마당, 또는 주차장 구석에서, 네가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 내가 병간호 많이 했으니 돈을 덜 내야 한다. 공평하게 내야 한다는 등
낯부끄러운 일이 많은데 귀댁에서는 의가 좋아 보기가 좋다고 하였다. 자기가 형제가 없어
형제 많은 집이 부러웠지만 부모가 입원하고 퇴원할 때는 형제 많은 것이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입원 당시 물리치료기를 짚고서 제법 걷기 연습을 잘하였다.
남들이 부러워하였고 당신께서도 좋아하였다. 퇴원 후 집에 와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아들 며느리는 논으로 밭으로 나가 집이 텅 비었으니 누구 하나 부축해 줄 사람이 없었다,
며칠 간 걷기 연습을 못하였다. 이제는 그만 걷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에 바쁜 애들을 불러서 나 걷기 연습을 해달라고 일일이 소리쳐 불러댈 수도 없었다. 그
래서 아예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는 앉은뱅이가 되고 만 것이다.
겨우 혼자 눕고 앉을 수는 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소대변이라도 받아내게 되었더라면
차라리 죽은 것이 나았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
러나 저러나 발리 죽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으니 사는 것이 구차스럽게만
생각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자고 깨면 약은 제때 제 시간에 꼭 먹었고, 저 지붕 넘어 푸른 하늘을 하루라도
더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이대로 죽기는 서운하였다. 좀더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치솟기도 하였다.
살 만큼은 살았는데, 아니다, 자식들 더 잘되는 것 보며 병 없이 살고 싶었다. 좀 더 살아야지.
형제들은 밤 깊도록 취했어도 뾰족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리 없다. 땅을 팔아야지, 안 내놓겠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빼앗아 팔아야지,
동네 망신스러워도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 집이나 이렇게 망할 줄은 몰랐다.
상상도 못하게 허물어지고 마는 집안이구나.
형의 말에 모두들 침통해하였다. -땅을 팔아 주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갑자기 넷째 동생이 말하였다. 남편의 말을 받아 제수가 이어 갔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도 직장을 그만두고 모시겠습니다.
땅을 팔면 시세껏 못 받아도 일억 원은 넘을 거다, 일억 원이면 큰 돈이다.
그 돈이면 치료비, 언젠가의 장례비, 그런 것이 충분하고 남은 돈으로 조그마한 가게나
다른 생활 방도도 찾을 수 있는 돈이었다.
-팔아만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실 겁니다. 제수가 다시 확언을 하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 재산을 시골에 묵힐 필요가 없습니다. 동생이 또 말을 받았다.
-저도 사업이 안 되어서 놀고 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든지 모실 수 있습니다. 형
님은 손수 밥하고 빨래하면서 어머니 병간호하게 되지만, 우리는 부부가 가정에서 편히
모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시오.
-그런 조건이라면 누구든 못 모시나요.
아내도 맞장구를 쳤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서로 못 모시겠다는 형제들이 일억 정도가
생기면 어려움 없이 모실 수 있다는 거다. 돈이 생기면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못 모실
어머니였다, 나는 술을 거듭거듭 마셨다. 머릿속에 정리가 안 되었다. 결국은 돈이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구나, 돈 있으면 효자고 돈 없으면 불효자가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과연 떳떳하고 바른 것인가, 유산 없으면 어머님도 남남인가, 만약 어머니가
아들 하나만 두었다면, 가난하고 어려운 아들 하나만 두었다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형제들이 서로 핑계를 대고 회피를 하고 못 모실 입장만 내세우다가도 돈이 생긴다면
서로 모시겠다는 것이 과연 바르고 떳떳한 것인가.
-형님, 남은 술이나 드시고 오늘은 이만 일어나죠. 며칠 더 생각해봐요.
내가 잔을 비우고 형에게 권했다. 그러자 말없이 형도 술잔을 비웠다.
-제가 곧 시골에 갔다 올게요. 가서 동생 속뜻을 알아보고, 어머니 병세도 살펴보고 올게요.
형제들은 결말 없이 자리를 뜨고 말았다.
얼마 후 나는 고향엘 갔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착잡하였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과 하늘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죄인의 몸으로 고향엘 가는 느낌이었다. 부모, 형제, 핏줄이란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후회스럽고, 미워질 때, 천륜이란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을 때,
이런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망설였다.
그래도 고향 집에서 어머님과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시장으로 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생선과 꽃게와 소고기, 동생과 제수가 좋아하는
찬거리를 하나하나 생각해서 샀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머니도 싫어하는데
형제 싫은 것은 더 말할 게 없을 테다. 이젠 밥 한 끼 먹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서로 만나는 것조차 서먹거렸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은행나무 밑을 지나 시골집에 도착하였다. 넓은 마당은 적막하였다. 큰 기침을 하고 대문을 열었다.
뜰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기 두서너 시간 전에 아내가 제수에게 전화를 했건만 밖에서
인기척을 해도 집안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순간, 제수나 동생이 반기지를 않는구나 하고 직감했다. 어머니께서 누워 있을 안방 문을
먼저 열기 전에 반쯤 열린 부엌문을 열었다. 부엌 싱크대에서 제수는 저녁밥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왔어요.
제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제수는 못 들은 체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게 어쩐 일이란 말인가. 인사를 받지도 않고 본체만체하다니! 나는 부엌문을 조용히 닫고
안방 문을 열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응? 연락도 없이 갑자기 웬일이냐?
어머니는 요 위에 혼자 누워 계시다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나는 급히 달려들어 어머니를 부축하려 하였다.
-그만둬라, 내 혼자 일어나 볼게. 어머니는 스스로 일어나는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래 봐요, 천천히 힘을 내 앉아 봐요. 어머니는 겨우 일어나 앉았다.
-바쁠 텐데, 어떻게 왔니? 아내가 어머니 손을 잡고 앉았다.
-자주 뵙지도 않고 전화도 못 드렸어요. -전화해야 내가 받을 수도 없다. 식사는?”
-죽지 않으려고 많이 먹는다. -잘 잡수셔야 돼요. -왜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말씀 마세요, 건강하셔야죠. -산 목숨이 욕된 것 같다. 아내는 부엌으로 나갔다.
다른 때 같으면 서로 반갑게 웃으며 주고받는 이야기가 마루, 안방까지 들려왔었다.
오늘은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가끔 싱크대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심상치 않았다. 모처럼 만난 동서 간에도 소 닭 보듯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말도 주고받지 않고 어떻게 저녁밥 준비를 한단 말인가.
평소 잘 따르고 이야기도 많이 했던 아내와 제수였다.
어머니는 안방에서 온갖 힘을 다 내어 마루로 나와 앉았다. 운동 삼아 밥을 먹을 때는
꼭 마무로 나온다는 것이다. 살려는 의지가 엿보여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렇게 앉은뱅이로 살아서 뭐하니, 죽을 목숨이 죽지도 않고, 너희들보니 그래도 반갑구나.
내가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았나 보다. 어머니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런 말씀 마시고 병을 마음으로 이겨내요.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나 때문에 너희들이 고생이다. 아예 형제간에 의를 상해서는 안된다. 긴 병에 효자 없단다.
어머니는 뭔가 자식들의 불편한 관계를 눈치 채신 것 같았다.
전 같으면 여러 형제들이 뻔질나게 서울에서 전화를 했을 것이다. 어머니 어떠시냐,
약은 잘 잡수시느냐, 식사는 많이 드시느냐, 너 농사일에 얼마나 힘이 드느냐,
제수가 고생이 많다는 등 안부 전화를 많이 했었다, 그러던 것이 요새는 전화 한 통화 못하였다.
그렇게 궁금하면 내려와서 확인하든지, 아니면 어머니를 모시고 가든지 할 것이지,
전화로 무엇 때문에 하느냐 하는 막내동생의 질책이 있을까 무서워서였다.
조상 때부터 시골 아무개 네하면 학식이 많고 예절이 바른 집안이고 이웃의 모범이 되는
가풍을 갖고 있다 하여 근방에서 모두 우러러보고 부러워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병든 어머니를
서로 모실 수 없다고, 자식들이 불화하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너희들도 이따금 시골에 와서, 날 잘 모셔라, 어떻게 하라, 이런 소리 절대 마라, 뭐니뭐니해도
집에서 부모 모시는 자식이 제일이다. 집 떠난 자식은 이웃보다 먼 거다.
어머니의 어둔한 말에 나는 아무 말을 못하였다.
-그럼요, 잘하건 못하건 부모 모시는 자식이 제일이죠.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있다가 가거라.
이때 아내가 부엌에서 급히 나왔다. 내 옆 마루에 걸터앉더니, 바로 일어나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예 무슨 일이 부엌에서 있었구나. 모르는 척하고 어머니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밖으로 나갔다. 아내는 저만치 감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왜 그래!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괜히 왔어. 말을 건네도 말을 하나, 찬거리를 주어도 본 체를 하나, 꽃게찌개는
맵지 않게 하라고 했더니 못들은 척하고 고추 가루를 몇 숟가락 듬뿍듬뿍 퍼 넣지를 않나,
숨이 터져 있을 수가 있어야지. 아내는 울먹이고 있었다.
-아무 내색 말고, 저녁이나 먹자, 어머니에게 이런 눈치 보이지 마.
아내를 가까스로 끌고 들어왔다. 식탁은 부엌에 있었다.
동생도, 제수도, 나도, 아내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의 저녁상이 차려졌다. 조그마한 밥상에 뻘건 고춧가루가 뿌려진 꽃게찌개와
몇 가지 간단한 찬이 놓였다, 차라리 찌개는 놓지를 말지, 동생이 상을 한 손으로 들고 나갔다.
마루에 앉은 어머니 앞에 놓았다.
식탁에도 저녁상이 차려졌다. 많이 먹자는 인사도 없고 서로 눈을 맞추지도 않고
각자 숟가락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시장기가 있었지만 밥맛이 없었다.
모래를 씹는 것보다 밥알이 더 거칠었다. 몇 숟가락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수저를 놓았다.
억지로 물만 몇 모금 마셨다. 자리를 떴다. 어머니는 빨간 고춧가루가 있는
꽃게찌개를 상 밑에 놓았다. 다행히 식사는 많이 드셨다.
-벌써 다 먹었니? -예, 많이 먹었어요. 다 드시지 왜 남기셨어요? 많이 먹었다. 먹어야 살지.
-잘하셨어요. 많이 드셔야죠. 아내도 나왔다. 어머니 밥상을 보고 말했다.
-식사를 다 드시지 조금 남기셨어요. -많이 먹었다. 찌개를 맵지 않게 하라구 해도···.
-그렇네요. -이제 방으로 들어가요. 아내가 어머니를 부축하려 하였다.
-아니다. 내가 할게. 이렇게 뭉기고 뭉기고 해서 내가 문지방을 넘어야지, 문지방 넘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이게 내인생살인가 보다.
-그래도 넘으셔야죠. 문지방 넘는 싸움이 내 인생살인지 모르겠다.
부엌도 조용하다. 그릇 닦는 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 아무런 소리가 없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TV를 켰다. 칙칙거리고 화면이 어른거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걸 고쳐 놓았으며 좋으련만···. 텔레비가 고장이다. -그렇군요.
고장난 TV처럼 어머니 육신도 망가지고 있었다. 이튿날 일찍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눈물을 손등으로 자꾸만 닦았다.
-이제, 너희들 가면 언제 볼지 모르겠구나. 아이들도 데리고 올 걸 그랬다.
-다음에 데리고 올게요. 자식을 데리고 올 용기가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의 손을 놓고 마루로 내려왔다. 에이, 걸어서 대문 밖까지만 한 번이라도 나가 봤으면
좋겠다. 조급히 생각 마시고 용기를 가지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아내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드렸다.
-그래, 잘들 가거라. 어머니는 여전히 울먹이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도 울컥 울음이 터져 나왔다. 참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를 잘 돌봐 드리라는 인사도 못하고 말았다.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내 부탁이 동생은 듣기가 싫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고향에 갔다 올 때마다 인사로 그런 말을 자주하였다. 그저 단순하고 가볍게 한 말이었다.
듣는 동생은 그 말이 부담이 되고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잘 있으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아내는 말없이 내 앞을 걸었다.
고향과 부모가 이렇게 죄스럽고 힘겹고 바위덩이 보다 무거운 것인 줄을 몰랐다.
고향은 향수나 낭만이나 추억이 아니었다. 무서운 현실일 뿐이었다.
형은 내가 시골에 온 것에 대하여 큰 기대를 하였다. 아무 말도 못하고 갔다 올 거라면
무엇 하러 시골에 갔어? 전화통에 형의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에라, 이 자식들! 며칠 후 동생이 시골에 갔다. 제가 한번 갔다 올게요.
-그래 이번엔 네가 가서 분명히 할 말을 다하고 와라.형은 나에게 실망하고 동생을 믿었다.
그러나 동생도 아무 말도 못하고 왔다는 거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데요.
-에라, 이 자식들! 형제들은 다시 타협점을 찾자고 하였다. “타협점이라니?”
형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타협은 무슨 타협이야?
-아무래도 동생을 설득시켜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우리 형들이 양보하고, 동생을 위해 주도록, 형들이 잘못 했으니 네가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손을 내미는 것이 좋겠네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 어머니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면
아마 살려는 의욕을 포기하고 돌아가실 겁니다.
-글쎄, 그러니까 걱정이지, 담판을 지어야지. 담판을 지어서 막상 땅을 팔았다고 가정해 요.
어떻게 할 겁니까? 그동안 한 말을 또 되풀이하고 있었다.
-형이 모셔도 비극입니다. 형이 집 한 채 사서 손수 밥 지어 먹고, 빨래하면서 병간호하는 거,
그게 말이나 되나요, 형제도 가족도 없는 사람처럼, 어머니도 약을 먹고 하루라도 더 살려고
노력을 하실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내가 시골엘 가야겠다. 결판을 내고 오겠다.
철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들려왔다.
철이 담임선생님이 결석계를 가지고 와서 말하였다. 그렇게 돌아가시고 말았구나.
추석의 둥근달을 쓸쓸히 바라보면서, 혈육을 끝내 못 보고, 그립고 허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구나. 눈이나 감고 돌아가셨을까.
형이 다시 형제들을 급히 불렀다. 시골엘 다녀왔다는 거다.
형제들이 모였다. 막내 동생의 결론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비장한 모습이었다.
글쎄, 그놈이 이런 말을 하였다. 어머니 나이 85세면 사실 만큼은 살았다.
우리 형제들 형편으로 봐서 어머니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
러니 앞으로 병이 악화돼서 입원하게 되면 형들이 결정해 달라는 거다.
입원을 해야 할 건지 말아야 할 건지, 자기는 형들 뜻만 따르겠다는 거다.
막내 동생은 이미 마음속에 어머니를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형제들은 말문이 막혔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출처:권순악
첫댓글 양로원에 맡기는 관행이 보편화 되어 부모든 자식이든 이런 불가피한 일을 이해 하는쪽의 세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친구 부친도 양로원 입원 2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우선 본인이 불가피한 관행을 이해 하셨고 친구 역시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역시 노후의 선택에 마음 굳히는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