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 아이의 화려한 귀향
민문자
열 살 아이는 6.25 전쟁에 아버지와 큰형을 잃었다
어머니는 1951년 1·4후퇴 당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하다 김천 아포에 머무르게 되었디
그곳 유지이신 면장 어르신이 마련해 준 방 한 칸 피난살이
그 얼마나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던가 “피난민, 피난민!”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많이 하고 싶었지만
부잣집 소나 돌보며 혼자 놀아야 했다
이 년 후부터는 키도 크고 담력도 자랐던가
반장이라고 도시락 반을 남겨주던 친구들
아포 초등학교, 중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김천농업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 백부님 소식 받고
서울로 상경 후 고학으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
건설회사에 입사하고 중견 건설회사 경리과장이 된 후
서른 살 노총각으로 결혼해 삼 남매 자식을 두고
늘 배고플 때 밥 먹여주던 제2 고향을 그리워했었지
그 후 1980년대 건설회사 대표로 항상 바쁜 중에도
마음은 늘 동창들의 애경사에 희로애락 정 나누고
1987년쯤이던가 아포초등학교에 컬라TV도 기증했네.
이제 과수원 농부 떡방앗간 주인 석수장이 하늘나라 가고
구봉산 바라보는 친구들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으려나
며칠 전 이번 주 금요일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고 싶다고
아들에게 의논했네 “예, 제가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단풍 곱게 물드는 만추에 며느리가 사다 준 멋진 스웨터 입고
운전사 아들 며느리 대동하고 옆자리에는 마누라를 태우고
경부고속도로를 씽씽 달려 국사봉 아래 아포로 달려갔지
부부 시인이 된 문촌文村과 소정小晶 이야기가 담긴
시집 두 권과 치약을 준비해 가지고 갔었지
풍광 좋은 아포 생오리 집에 백발의 동창생 여덟 명
살아남아 허옇게 함박웃음 지으며 반기는 늙은 아이들
내년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2024.11.08)
첫댓글 아, 감동이네요.
참 멋지게 잘 살아오셨습니다.
형제 간의 각별한 정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제 건강 챙기며 자식들 효도 받으시고
유유자적 즐겁게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예, 그런대로 최선을 다하며 후분이 좋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