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일대 동아시아 연구소장
일미 교수께 부치는 법문》
●계율을 지범개차하는 올바른 길
어제 은사 스님으로부터 일미 교수의 기사를 받고
거의 40여 년 전이 다 되는 옛날 신림동 자취방에서
20여 년 연상의 사형인 나와 함께 한방에서
은사스님께 어렵게 학비를 타가며 대학을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며
한 인간으로서 고난의 삶을 극복하고 마침내
청운의 꿈을 이룬 일미교수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글을 은사스님께 올리고 이곳 불자님들과도 함께
축하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현재 타종단의 스님 신분이고
불교학을 전공하는 학자인 일미교수로 인하여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엄격한 계율을 오늘날에 어떻게
지범개차(持犯開遮:계율을 지키코 범하고, 열고 닫고)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가를 불자님들과 더불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출가하여 참선납자로서 자기 근본 진여자성을
밝히는 견성성불이 궁극적 목표요, 중생제도의 올바른
길임을 알지만 근기 상 모두가 그 길을 갈 수 없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차선책이지만 건화문중(교화문,방편문)에서
제 각기 재능과 역량을 살려 부처님 법을 빛내는
길도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국왕의 명으로 처첩을 여러 명 거느리고도 금강경
등의 한역경전 대부분을 번역하신 구마라집 삼장이나
대당국 현장법사의 수제자로서 중국 법상종의 시조인
자은대사는 천자의 명으로 항상 수레 세 대에,
책 한 수레, 술과 고기 한 수레, 미모의 여인들 한 수레를
실코 다녔다 하여 삼거대사(三車大師)라 불린
특별한 사례들도 있듯이
일미교수도 그러한 수행과 업적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저 구마라집 삼장과 자은 대사의 일생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구마라집 삼장(344~413) 의 부친은 인도 구자국의
재상이었고 모친은 구자국왕의 누이동생 즉 공주였습니다.
그는 7살에 출가하여 인도 북쪽 계빈국에서 소승불교를,
소륵국에서 대승불교를, 어머니 나라인 구자국에서
계율을 배워서 경 율 논 삼장에 능통한
삼장법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마라집 삼장은 당시 세상에서 부처님
십대제자 중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의 화신이라 불리기도
하고 불교사상 부처님 다음으로 일컫는 제 2의 석가라
존경받는 용수보살의 화신으로 불릴 정도로 대총명과
반야지혜를 실지 깨달은 위대한 스님이었습니다.
<1>이와 같이 그의 명성이 얼마나 위대하였으면
당시 관중에서 세력을 떨치던 전진왕 부견이 장군 여광을
시켜 구자국을 정벌하고 구마라집을 데려오도록 하여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인재 쟁탈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때가 구마라집 삼장 나이 40세(AD384) 때였으며,
그 결과 모국인 구자국은 여광에게 패망하고 여광과 함께
전진으로 가던 중 전진왕 부견이 요장에게 살해되고
여광이 후량을 세우자 거기서 나집은 16~17년을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2>그러나 후진 시대 요흥이 후량으로 부터 구마라집을
빼앗아 오고자 또 한 번의 전쟁을 일으켜 후량을 토벌한
후 구마라집을 국사로서 예우를 하고 중국 장안으로
맞아들인 때가 401년 12월 20일이었으니 구마라집
나이 56세 때였습니다.
그후 소요원의 서명각과 장안의 대사에서
74부 384권의 대승경전과 대승논서를 번역하여
중국 역경사상 신기원을 이룩하였으며,
그는 또한 소위 나집문하 사철(四哲)로 유명한
승조, 도생,도융, 승예법사 등의 영재와 그 외 3천여
명의 제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총명과 반야지혜가 겸비한 불세출의 역량을
가진 구마라집 삼장을 그 당시 국왕들은 서로 모시기
위하여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을 두 번이나 했던 것은
그만큼 통치자로서 훌륭한 선지식 스님을 자기 나라에
모실 때 천하가 태평하고 국운이 장구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구마라집 같은 천년에 하나 날까말까 하는
영재를 더욱 번성시키고자 <구자왕>은 왕명으로
자기 딸을 나집의 처로 맞이하게 하여
혈통을 잇게 하였고 장안에서는 <요흥>이 왕명으로
나집에게 미녀 10명을 거느리게 하여 후사를
번성케 하였다는 행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끝으로 구마라집 삼장이 70세에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말하기를 "내가 평생 부처님 말씀을
번역한 경전에 한 글자라도 그릇됨이 없다면
나를 화장해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하였는데
과연 화장 후에 구마라집 삼장의 혀는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고 합니다.
2) 다음에 자은대사(632~682, 법명은
규기窺基, 법상종의 시조)는
당나라 태종의 맹장인 을지경덕 장군의 아들로서
십 세에 전술책을 짓는 것을 보고 당시 현장법사가
큰 재목임을 알고 부모에게 출가를 권유하여 제자로
삼았으며 후일 현장법사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현장법사를 도와서 역경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고 그 때마다 천자에게 대승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비 내리듯이 강론을 잘하니 이에 감동한 천자는
옥락지를 하사하였으며, 천자를 알현할 때도
예를 갖추지 않도록 하고, 출입할 때는 경론과, 술과
안주, 미인을 실은 수레 세 대가 항상 따르도록
명하였습니다.
당 고종이 모후를 위하여 대자은사(寺)를 창건하였고,
그의 이름을 자은법사라 하고 또한 대화엄종주삼거법사
(大華嚴宗主三車法師)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불교 율종의 개조인
남산의 도선율사는 천인(天人)들이 감탄하고
내려와서 매일 공양을 올릴 정도로 계행이 청정한
유명한 스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도선율사는 평소 자은법사를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행을 철저히 지키지 않는 승려로
의심하고 있었고, 반대로 자은법사는
도선율사를 소승이라 얕보면서도 그가 날마다
천공을 받는다는 말에 자기도 한번 천공을 먹어보고자
도선율사를 찾아가서 종일 담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양 때가 지나서 종일토록 기다려도
천인의 공양은 보이지 않다가 자은법사가 돌아간
뒤에야 천인의 공양이 왔습니다.
이에 화가 난 도선율사가 천인에게 어찌 때맞추어
공양을 가져오지 않는가 하고 꾸짖자 천인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게을러서가 아니고 오늘 스님과 이야기 하신
대승보살의이마에서 나오는 백호광명이 온 누리에
가득하여 제가 감히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천인의 이 말을 듣고 도선율사는 그 후로 자은대사를
대승보살의 화현으로 알고 지극히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구마라집 삼장과 자은대사와 도선율사의
일화로 볼 때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이란
소근기인 초심 수행자에게는 생명과 같이
중요한 것이지만,
이미 일체법의 자성이 비어서 걸림이 없음을
관조하는 대승근기나
본래 청정한 진여자성의 마음거울이 일체법과
둘이 아닌 도리를 투철히 증득한 최상승 근기로
성숙한 사람에게는
마치 어린 시절 입던 옷이 장성한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것과 같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의 작은 옷이 어린 시절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커서는 필요 없는 데 커서도
어린아이의 옷을 걸치고 다니라고 고집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우스운 일이요,
그렇다고 다 큰 사람이 자기가 커서 어린아이 옷이
필요 없다고, 어린아이에게도 똑 같이 어린아이 옷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것 또한 전혀 방편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율을 항상 불자들에게 강조하여
설하면서도 스스로는 계율에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게 지범개차하는 경지를 보여주신 것이
저 《진정극문 선사의 게송》이라 할 것입니다.
事事無礙 (사사무애)
모든 일마다 걸림 없으니
如意自在 (여의자재)
마음대로 자재하도다.
手把豬頭 (수파저두)
손으로는 돼지 머리를 들고서
口誦淨戒 (구송정계)
입으로는 청정한 계율을 설하며
趁出婬坊 (진출음방)
기생집에 다니면서
未還酒債 (미환주채)
술 값을 갚지 못하여
十字街頭 (십자가두)
십자 거리로 쫓겨나
解開布袋 (해개포대)
걸망을 풀어 헤쳤도다.
이러한 부처님법의 궁극적 경지인 진정 극문선사의
사사사무애 법문을 원오극근 선사가 일찍이
호법론을 저술한 송대의 유명한 재상 무진거사
장상영에게 설해주자 참으로 아름다운 법문이라
감탄을 하였으니,
여기에는 본래 청정한 진여자성의 마음거울이
일체법과 둘이 아닌 궁극적 도리가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이러한 사사무애 경지를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저 운문선사에게 어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니 선사께서
"마른 똥막대기니라."답하신
간시궐(乾屎橛) 화두와,
동산 선사께 어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
입니까?" 물으니 선사가 답하되 "삼 세근이니라"
하신 마삼근(麻三斤)등의 화두를 확철히 깨쳐야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이러한 화두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를 한다
해도 그것은 허망한 분별사량의 그림자로써
자기 근본 진여자성의 마음거울에 입각한
소식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 간절히 설해주신 계율을 함부로 허물지
않고 지키는 것만이 금생에 진여자성을 깨닫지는
못해도, 최소한 죽어서 삼악도(지옥,아귀,축생)에는
가지 않고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길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아주 어린 유치원생이 부모님과
유치원 선생님의 평소 간곡히 당부한 말씀을 듣지 않고
자동차가 빈번하게 다니는 큰 길에서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도 제멋대로 마구 길을 건너가는 것과
같아서 그 위험한 결과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565(2021)년 8월 27일
백화산 졸납 법현합장
첫댓글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위 글에 나오는 무진 장상영거사님은 참선공부를
열심히 해서 <덕산탁발> 화두를 타파하여
古佛로 불리는 원오극근 선사로 부터
인가를 받은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