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
지난 일월, '씨네 21'에서 영화 '깃'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때 그것이 부산에 오면 꼭 가서 보리라 벼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이월 초의 어느 날이었던가,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우편물이 내게로 왔다. 거기 영화 '깃'에 대한 홍보지가 들어 있었다. 기다린 만큼의 잔잔한 흥분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 그렇다. 내가 본 영화 '깃'은 바로 그 '기다림'에 관한 영화였다.
출연배우의 실명을 그대로 작중인물의 고유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영화 '깃'. 현성(장현성, 감우성을 닮은...감우성이 훨 잘생겼긴 하지만, 얼굴이랑 분위기가 비슷하다)은 영화감독이다. 십 년 전, 첫사랑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우도'라는 섬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그들은 십 년 전이었던 1994년 9월 5일 '우도'의 한 모텔에 묵었었고, 십 년 뒤인 2004년 9월 5일 다시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 일찍 '우도'로 가고 있는 현성...과연 내일이면 첫사랑이 그곳으로 와서 그들이 재회할 수 있을까?
십 년 전, 사랑했던 그녀와 함께 머물렀던 '비양도 모텔'은 리모델링되어 변해 있고, 그곳엔 재수생 소연(이소연)이 가출한 숙모로 인해 말을 잃어버린 삼촌과 같이 살고 있다.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모든 것이 그대로이길 바란다는 건 참으로 허욕이며 어리석은 생각이다. 헤어진 여인의 흔적을 따라 섬으로 찾아든 남자...그 날의 첫 손님, 그 때처럼 204호에 짐을 풀고, 모래사장 한 귀퉁일 파헤쳐 십 년 전에 묻어논 첫사랑과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찾아낸다.
2004년 9월 5일, 십 년째 되는 날이다. 첫사랑, 그녀가 올까... 날씨는 흐려져 폭풍우가 몰아치는데...첫사랑 대신 '피아노'가 온다. 그녀가 치던 피아노가 택배로 배달된 것이다. 발송인이 표기되지 않았으므로 마음으로 수령할 수 없는 피아노 한 대...모텔 마당 한가운데 비를 맞고 서 있다. 쓸쓸한 아름다움이다. (그 장면 보며 왜 영화 '피아노'가 떠올랐을까. 뉴질랜드 해안가에 세워진 홀리 헌터의 피아노...그녀의 어린 딸이 피아노곡에 맞춰 춤을 추던 그 장면, 그 음악...아, 잊을 수 없다...)
그걸 바라보며 현성은 중얼거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뿐,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라고...(그러나 난 절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기다림'의 지긋지긋함에 대해 치를 떨었던 적이 있기에...서서히 지쳐가는 어리석음을 이젠 경험하고 싶지 않아졌다.)
"사랑은,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할말이 없는 법이예요..."
(그래, 맞아...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야 해...매일 만나야 해...눈에서 멀어지면 가슴으로부터도 식어가는 것...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틈만 나면 눈 맞추어야 해......)
첫사랑은 오지 않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와주지 않는다.
재수생 소연은 참 밝고 꾸밈없고 발랄하지만 그 이면엔 어두운 그늘이 언뜻언뜻 보인다. 엄마의 죽음과 연관돼 보인다.(맨 아래 사진, 현성과 같이 돌을 쌓는 장면에서의 저 자리는 소연 어머니의 무덤이다...) 탱고를 추려고 무용과엘 가고 싶어 하는 소연. 혼자서는 추기 힘든 탱고를 같이 춰보고 싶다며 현성에게 부탁한다. 소연이 현성에게 스텝을 가르쳐 주고 모텔 마당 장작불 앞에서 함께 탱고를 추는 그들... 이쁜 그림이었다......
몇날 며칠이 지나도 와주지 않는 현성의 첫사랑. 그러나 차마 '우도'를 떠나지 못하고 그 섬의 곳곳을 어슬렁거리는 현성. 태풍이 지나간 뒤의 어느 맑은 날, 피아노를 청소하던 소연이 피아노 뚜껑을 열자 그 속에 들어있는 한 통의 편지. 첫사랑이 쓴 편지였다. 현성이 섬을 떠나기 전 날, 소연이 그것을 현성에게 준다. 그는 그 편질 그 자리에서 바로 읽지 않는다. 대신 소연에게 약속 하나를 제안한다. "대학에 붙으면 일 년 뒤 우리 종묘공원에서 만날까요?" 누구랑 약속하길 좋아하는 남자...첫사랑을 기다리는 사이, 둘이 정이 들어버린 거다. '기다림의 공유' 덕분에 친해져 버린 거다. '새로운 시작'의 기분좋은 예감......
현성이 섬을 떠나는 날, 이미 배를 타버려 막 배가 뜨려는데 삼촌이 태워준 스쿠터를 타고 뒤따라온 소연이 현성에게 외친다. "아저씨~ 우리 일 년 뒤 9월 9일 종묘공원에서 꼭 만나요~ 대학 꼭 붙을 게요~"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먹먹하고 무거웠는데 이 장면에서 터뜨려버렸다. 눈물 몇 방울 미소와 함께 볼 위로 굴렀다. (참고로 그들은 극 중에서 띠동갑이다.ㅍㅎㅎ)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독일남자와 결혼한 현성의 첫사랑은 유방암에 결려 투병중이며 지그문트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고, 남편이 그녀에게 너무 헌신적으로 잘해준다는 것...그래서 '우도'로 오지 못하는 대신 그녀가 치던 피아노를 보냈다는 것...현성은 이렇게 마지막으로 중얼거린다. '그녀가 독일남자와 결혼한 걸 알고 2002 월드컵 때 독일을 응원하지 않았다. 2006 월드컵에선 독일을 응원할 수 있을 것 같다.' ㅋㅋ
일 년이 지났다. 2005년 9월 9일이 된 거다. 종묘공원에 현성이 서 있다. 소연을 기다리고 있다. 소연이 와줄까? 당연히 온다. 일 년 전엔 생머리였던 그녀가 퍼머머리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약간은 촌스러우면서 애띤 여대생의 모습을 하고 환하게 등장하며 영화는 끝난다. 또 하나의 '깃털'처럼 가벼운(부정적으로만 보진 마시라) 사랑, 가볍고 가벼워 날아갈 듯한 사랑 이 시작된 것이다. 해피 엔딩인 것이다.
영화 "깃" 은 수채화라기 보다는 '수묵화' 같은 영화 로 내겐 보였다. '밝고 빛나는 씬' 보다는 '어둡고 우울한 씬'이 더 다가왔었다는 얘기다. ................
영화이야기 하나 올리네요... 저도 안 본 영화 " 깃" 이네요.ㅎㅎ
즐거운 주말,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9. 23. 順.
|
첫댓글 금방 영화 한 편을 봤어요. 감사합니다.
'깃'영화...............청춘시절이 떠오르겠네요^^*
"영화 "깃" 은 수채화라기 보다는 '수묵화' 같은 영화 로 내겐 보였다. '밝고 빛나는 씬' 보다는 '어둡고한 씬'이 더 다가왔었다는 얘기다. ................ 영화이야기 하나 올리네요... 저도 안 본 영화 " 깃" 이네요. 거운 주말,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감사합니다요 *^^*더욱 건강 다복하시기 바랍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