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
이동순
서역이란 말에는
향긋한 무화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하미과의 단내도 물씬 풍기고
백양나무 가로수 길을 달려가는 노새의 방울 소리도 들린다
그 노새가 끄는 수레에 올라탄
일가족의 도란거리는 이야기도 들린다
서역이란 말에는
아득한 모래벌판을 성큼성큼 걸어오는
황사바람의 냄새가 난다
그 사이로 악기 반주에 맞추어 휘도는 호선무와
구릿빛 얼굴로 바라보던 위구르 사내의
동그란 모자가 보인다
서역이란 말에는
땅 속에서 파내었다는 비단 조각, 거시서 보았던
천 년 전 물결무늬가 먼저 떠오르고
그 비슷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상추처럼 웃던
쿠차의 한 처녀가 생각난다
잠시 스쳐간 그녀 내 전생의 사랑이었으리
-출처 : 시집『마음의 사막』(문학동네, 2005)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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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 의식의 해방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
-이동순의 시「서역」을 읽고
이동순 시인의 시학은 투명한 응시와 관조로 점철된다고 볼 수 있다. 수천 년에 걸쳐 누적된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켜켜이 시간을 쌓고 깎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내공이 깊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한번 들어가선 다시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는 타클라마칸. 이 시집에는 시인이 타클라마칸을 다녀와서 서역에 관한 자신의 관심을 집약시킨 아름다운 시가 수두룩하다.
서역의 온갖 과일은 향기로우며, 거친 길을 가는 수레에 올라탄 가족들이 도란거리는 모습은 단란하기 그지없다. 사나운 모래바람도 성큼성큼 걸어오는 아저씨처럼 유순하고 너그럽다. 그리고 천 년 전에 죽은 자의 옷 조각에서 천 년 전의 자잘한 물결무늬를 떠올린다. 이러한 현상과 상상은 서역이라는 황량한 장소를 행복과 애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어찌 보면 서역은 시인의 의식을 해방시키고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하는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에서 타클라마칸과 몽골 시편들이 다수 들어 있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인은 서역에서 만난 풍경과 거기서 얻은 정제된 상상력이 시의 형식 바깥으로 넘치게 놔두지 않는다.
위의 시는 ‘(냄새가) 난다’, ‘(소리가) 들린다’, ‘(무엇이) 보인다’, ‘(누가) 생각난다’는 네 개의 단순한 서술어로 구성된 문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후각과 청각, 그리고 시각적 이미지가 행복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지극히 간결하고 투명한 문체, 일상을 관조하는 들뜨지 않는 어조는 시적 형식이 아니라 이제 시인의 세계관이 투영된, 또 다른 시적 모색의 소산처럼 여겨진다. 모든 수사는 욕망을 확대하고자 할 때 이용되는데, 이 시집에서 보여 주는 수사의 절제력이 인간의 단순한 삶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시인 안도현 님이 쓰고 詩하늘이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