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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란 1945년 오키나와 제도를 둘러싸고 1945년 3월 26일부터 시작되어 6월 23일까지 벌어진 태평양 전쟁 최후의 대규모 지상전을 말한다. 일본 본토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위한 항공, 보급 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이 작전의 연합군측 명칭은 Operation Iceberg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는 해안선에서의 저항은 포기하고, 내륙에서 장기전을 벌이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오키나와 남부 의 슈리(首里)시 북쪽에서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으며, 주변 바다에서도 가미카제 공격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 항공 부대와 연합군 함대간의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미군은 상륙 2개월 후인 1945년 5월말에 슈리를 점령했으며 일본군은 남부로 일단 후퇴했지만 6월 하순까지는 조직적인 전투력을 거의 잃었다. 일본군 패잔병 소탕은 태평양 전쟁 종전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투로 발생한 일본측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88,136명이며, 이중 오키나와 출신이 122,228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도 94,000명에 달한다. 미군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2,520명이며 부상자는 72,000명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이 전투에서 소총탄 2,716,691발, 포탄 60,018발과 수류탄 392,304발, 로켓 20,359발, 기관총탄 300,000발을 사용하였다.
- 일본측의 전략 -
일본군 오키나와 수비대의 주력이던 제 32군은 1944년 3월 사이판에 위치한 제 31군의 예비군으로 도쿄의 대본영내에서 창설되었다. 사령관으로는 와타나베 마사오(渡辺正夫)중장이 임명되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32군이 일본제국 육군 부대들 중에서 최후의 전투를 담당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이판의 악화되는 전황으로 미루어 미국의 창끝이 조만간 오키나와, 대만 혹은 일본 본토로 돌려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도 있었으나 오로지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만 모든 정신력을 집중하던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그 런 근심을 고려할 여유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낼만큼 간이 큰자도 없었다.
오키나와의 일본군 사령부 - 1945년 2월 32군 사령부가 현지에 도착한 것은 1944년 3월 29일이었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정확하게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기 딱 1년전이었다.
초창기 32군은 대만의 제 10 방면군 예하부대로서 일단은 전선군으로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대본영은 오키나와섬을 항공작전을 위한 일종의 불침항모로 여겼기 때문에, 수비대의 임무도 야전군으로서의 성격보다는 비행장 건설에 치중하는 일종의 공병대에 가까웠다. 따라서 장교들은 32군으로 전속되는 것을 일종의 좌천으로 여겼다. 1944년 5월에는 마리아나 방위선이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32군은 대만의 제 10방면군에서 일본 본토를 담당하는 서부군에 편입되었다. 결국 우수한 장교들은 더더욱 32군에 전속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철벽이라고 장담하던 마리아나 전선은 44년 6월 중순 이후 급격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본영은 32군을 제 10방면군으로 재편입시키고 작전군으로서의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서둘러 전력증강에 나섰다. 그러나 증원 1호로 보내지던 독립 혼성 제 44 여단 병력을 실은 수송선 야마환(富山丸)이 미군 잠수함의 어뢰를 맞아 격침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수송선에 콩나물시루처럼 실려있던 병사들은 좁은 비상구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오키나와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연합군 잠수함들에 포위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대본영은 추가로 증파되는 독립혼성 제 15연대 병력을 공중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파견군 전원을 비행기로 수송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제 28사단과 9사단을 수송하는 데는 야마토와 무사시를 중심으로 한 대함대가 호위전력으로 동원되었다.
32군은 제 9사단을 비롯한 3개 사단과 1개 여단, 제 5포병사령부로 증강되었고 사령관도 우시지마 미츠루(牛島満)중장으로 변경되었다. 牛島満포병 병과의 권위자로 알려진 제 5 포병사령부의 타카시(和田孝助)중장은 만약 적이 상륙할 경우 포병과 연합한 정예 3개 사단 전력이면 즉각 바다로 내쫓아버릴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이시카(石垣)섬에도 1개 사단이 증강되었다.
최종적으로 오키나와의 육군 수비대 병력은 86,400명이 되었다. 이밖에도 해군 육전대 10,000명, 학도대 등이 20,000명으로 총 116,4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육군의 병력 중에 서도 현지에서 급히 조달된 예비역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체 병력중에는 2만명 가령이 현지에서 소집된 17세부터 45세까지의 사람들이었다.
오키나와섬 방어전략에 대해서는 32군사령부 내에서도 의견이 둘로 나뉘어졌다. 지구전을 주장하는 야하라(失原) 참모파는 북부의 산악지대에서 농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 젊고 혈기왕성한 소장 참모들은 섬 남쪽의 평원지대에서 전투할 것을 주장하였다. 대본영에서는 오키나와가 어디까지나 본토 방위의 도구로서만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하여 비 행장이 집중되어 있는 섬 남쪽에서 전투를 하도록 요구하였다. 결국 주전장은 남부 평원지대로 결정되었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 거의 필연적인 일로 여겨지게 되자 제 32군사령부는 노약자들을 북부의 산악 지대로 피난시키려 했다. 약간의 사람들은 식량과 가재도구를 챙겨 피난을 떠났지만, 중남부에는 여전히 수십만의 주민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1944년 9월 중순 진지구축에 여념이 없던 오키나와 수비대에 비행장을 구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2군사령부는 이 지시에 격노했다. 미군의 상륙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구축한지 한달밖에 안되는 진지 축성을 중단한다는 것은 작전에 큰 장애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32군 병력은 진지를 떠나 오키나와 북비행장과 중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바위를 허물고 구멍을 메우는 필사적인 작업이 계속되었다. 중대장들은 손에 채찍을 들고 작업을 독촉했다. 쓰러진 병사는 발로 채여 일어났으며 오른손이 다치면 왼손으로 야전삽을 들 어야했다. 결국 비행장 공사는 10월 초에 완성되었으나 병사들의 사기 와 체력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 일본 수비대 전투서열
- 육군제32군사령부( 第 32 軍司令部 ) 사령관( 司令官 ):우시지마 미츠루( 牛島満中将 )중장 참모장 이사무 초( 長勇 ) 중장 고급 참모 히로미치 야하라( 八原博通 )
대좌 참모(후방 담당) 키무라 마사하루( 木村正治 )중좌 참모(항공 담당) 나오미치( 神直道 )소좌
참모(정보 담당) 薬丸兼致 소좌 참모 (통신 담당) 미야케 타다오( 三宅忠雄 )
소좌 참모(작전 담당) 나가노 히데오( 長野英夫 )소좌
제24사단 사단장:아메노미야 타츠미나( 雨宮巽 ) 중장
- 보병 제 22, 32, 89 연대 야전중포병( 野戦重砲兵 ) 제 42연대
- 배속 제62사단 사단장:후지오카 타케오( 藤岡武雄 ) 중장
- 보병 제 63, 64 여단 가야지대( 賀谷支隊 ) 지대장:賀谷與吉 중좌
- 보병 제 63여단의 1개 대대 기간 독립 혼성 제44여단 여단장:스즈키 시게지( 鈴木繁二 ) 소장 - 제 2 보병대, 독립 혼성 제15연대 제5포병단 사령부 사령관:와다( 和田孝助 )중장
야전 중포병 제42연 대를 제외한 모든 포병대 지휘
야전 중포병 제1연대 96식 15리유탄포×12문 야전 중포 제23연대96식 15리유탄포×24문 중포병 제7연대 중포병 제8연대 중포병 제100대대 15cm캐논포×8문 전차 제27연대 전차 제 2사단의 사단 수색대를 개편하여 1944년 7월에 제 32군으로 편입. 이 외에도 미야코(宮古)섬에 제 28사단 및 독립 혼성 제59, 60 여단. 이시가키(石垣)섬에 독립 혼성 제45여단, 다이토지마(大東島) 수비대 (제 28사단의 일부), 아마미( 奄美 ) 수비대(독립 혼성 제 64여단)등의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음.해군 오키나와 방면 근거지대사령관:오타 미노루( 大田実 )소장 선임참모 마에카 친이치로( 前川親一郎 )대좌
난세이제도( 南西諸島 )항공대 사령:타노마치( 棚町整 )대좌 제 951 항공대 파견대 사령:하타지로( 羽田次郎 )
- 연합군의 전략 -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하여 향후 일본 본토와 중국을 침공하는 데 있어 전진기지로 사용하려 하였다.
1944년 8월경까지 연합군 수뇌부는 오키나와보다 대만을 먼저 공략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단 대만을 거점으로 확보한 후에 중국이나 오키나와 어느 쪽으로든 진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대만 공략 작전에 대 해서는 구체적인 검토가 진행되어 이미 상륙 부대 사령관에 미육군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 Jr)중장이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레이테 침공 작전이 9월 중순으로 예정보다 앞당겨지자, 필리핀에서의 해군기지 확보도 더 빨라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는 대만을 거치지 않는 전략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미육군도 필리핀의 루손섬만 점령하면 대만은 저절로 무력화될 것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니미츠의 견해에 동조했다.
새로운 일본 본토 공습의 거점을 필요로 하던 미육군 항공대도 대만 대신 오키나와를 공략할 것을 제안하여 1944년 10월 5일에 최종적으로 오키나와 침공 작전이 결정되었다. 계획에 따르면 10월 20일에 레이테 상륙, 12월 20일에 루손 상륙, 다음해인 1945년 1월 20일에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이어서 3월 1일에 오키나와 상륙이 예정되어 있었다.
버크너 중장은 대만 침공군의 사령관에서 오키나와 상륙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무가 변경되었다. 레이테섬에 상륙한 연합군은, 사전에 일본군의 반격 전력을 분쇄하기 위해 오키나와섬과 대만을 공습했다. 10월 10일에는 미군 기동부대가 오키나와에 대규모 공격을 퍼부어 일본군 항공기와 함선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1945년 3월, 연합군은 예정보다 약간 늦게 루손섬 공략과 이오지마 공략을 거의 완료했다.
이때는 이미 일본 본토 상륙계획인 다운폴 작전의 입안이 이루어지고 있던 상태라, 오키나와는 큐슈 상륙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활용되기로 용도가 정해져 있었다. 결국 당초 계획보다 정확히한 한달 늦게 오키나와 공략을 목표로 한 아이스버그 작전이 발동되었다.
- 오키나와 공습 -
오키나와 전투는 실질적으로 1944년 10월 10일의 대공습으로 막을 올렸다.
공습이 있기 하루전인 10월 9일에는 일본군 제 32군 참모장의 총 지휘하에 사령부의 연습이 있었다. 여기에는 지휘관들과 시마다(島田) 오키나와 지사를 비롯해 수많은 명사들이 참석했다. 이미 제 32군의 진영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이제는 미군의 상륙만 기다릴 뿐이다. 필승의 신념에 불타는 아군은 적을 격멸하는 것만 남았을 뿐이다.
격렬한 연설에 청중들은 자신도 모르게 대일본제국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날밤 흥청거리는 연회가 열렸고 호텔에는 밤새도록 전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다음날 앞바다에 태양이 떠오를 무렵, 아침해를 등에 지고 미군기 편대가 오키나와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공격대에 대응할 사이도 없이 벌어진 전광석화같은 폭격으로 비행장과 기지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오키나와에도 레이더는 배치되어 있었지만 성능이 극히 열악하여 적기를 포착했을 때는 이미 공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공격에 참가한 미군기는 150여대 정도였다. 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무리는 북비행장을 공격하고 다른 하나는 나하항을 폭격하였다.
공습은 아침 6시에 시작되어 한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나하항에 정박중이던 수송선 다섯척이 침몰했고 시가지는 화재에 휩싸였다. 비행장에 널려있던 군수품과 식량들도 모두 불타버렸다. 수비대가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곧 이어 제 2, 3파의 폭격이 이어졌다.
결국 이날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하여 7백명이 사망하였고 포탄 수천발과 소총탄 120만발, 전군의 식량 1개월분, 모든 항공기, 비행장 시설 태반이 날아가버렸다. 이튿날인 10월 11일에는 수백대의 일본군 비행기가 오키나와 상공을 통과해 남쪽으로 날아갔다. 이들은 대만 앞바다에 출몰한 미기동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큐슈에서 날아온 항공대였다.
이후에도 공습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병사들은 적 항공기가 하늘에 떠있는 낮에는 두더쥐처럼 지하진지를 구축했고, 밤에는 비행장 보수작업에 출동했다. 그러나 오키나와 수비대가 괴멸될 때까지 비행장은 일본 항공대에 의해 사용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설을 제대로 써먹은 것은 오히려 점령군인 미군 항공대였던 것이다.
10월 9일을 마지막으로 오키나와에는 더이상 수송선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일본군은 곧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어 병사들의 식사도 하루에 두끼로 줄여졌다. 과로에 시달리며 칼로리 섭취까지 부족한 일본군에는 환자가 속출했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군기도 이완되었다. 오키나와 민간인들은 이전까지 쌀과 감자를 각각 절반씩 섞어 식사를 했었으나, 식량이 궁핍해지자 감자만을 먹게 되었다.
굶주린 군인들이 민가에 난입하여 귀중한 식량인 감자를 약탈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열악한 상황을 견디다 못한 32군 사령부는 자급자족을 위해 감자농사를 장려했는데, 애석하게도 미군기의 공습 때문에 심어만 둔채로 충분한 손질을 할수가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감자 열매가 아니라 감자 잎사귀에 쌀을 드문드문 섞어 밥을 만들어 먹게 되었다.
오키나와 일본군 수뇌부 - 가운데가 우시지마 사령관
참담한 상황에 우시지마 32군 사령관은 시종 말이 없었다. 그는 참모장의 의견을 항상 그대로 채택하였고, 자신의 의견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전문가인 나의 부하가 온 정성을 다해 만든 일에 잘못이 있을리 없다. 부하를 신뢰하는 것이 사령관으로서 해야할 유일한 일이다.
미국의 칼끝은 우선 필리핀으로 향했다. 오키나와 공습이 있은지 2주일후에 필리핀의 레이테 앞바다로 미군 대부대가 집결하였다. 일본군 대본영의 모든 관심은 필리핀으로 쏠렸다. 11월 13일에 대본영은 대만 주둔 부대를 레이테로 증원하고, 오키나와 수비대에 최정예사단 하나를 차출하여 대만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필리핀 다음은 오키나와일 가능성이 컸으므로 이 조치는 언발에 오줌누는 식의 임시적처방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은 원대한 전략적 구상을 할만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부대중 정예사단이라면 9사단과 24사단이 있었다. 9사단은 전통이 오래되고 훈련도 충분하였으나 포병 전력이 부실하였다. 24사단은 신설사단으로서 훈련은 부족하나 포병전력이 충실하였다. 32군은 자신들의 열악한 포병전력을 감안하여 9사단을 대만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야마토와 무사시 등의 초거대 전함이 다시 동원되어 이들을 대만까지 실어 날랐다.
이 조치로 32군은 실질적인 보유병력의 1/3을 잃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방어 계획을 소극적인 지연 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본영은 제 84사단의 증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가, 직후에 번복하는 행태를 보여 32군과 대본영 사이에는 불신이 싹트게 되었다.
Task Force 58
- 규슈 항공전 -
3월 17일 새벽 도쿄의 연합함대 작전실에 한통의 극비 전보가 전달되었다.
미기동부대는 3월 17일 오전 1시 전후로 출항하였음. 현재로서는 목적지를 알수 없지만 큐슈 방면으로 내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음. 대본영은 즉각 육해군에 엄중한 경계태세를 펴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미군 기동부대를 맞아 어떤 방식의 대처를 할지를 놓고 대본영과 연합함대, 작전부대간에 의견대립이 벌어졌다. 대본영의 기본 방침은 오키나와를 포함하여 본토 이외에서의 요격 작전은 外洋작전이다. 설사 외양작전에서 미군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하더라도 미군은 반드시 본토 상륙을 감행할 것이다. 그때 전력을 다해 적을 섬멸할 것이며 아무리 본토 주변이라 하더라도 기동부대에 무모한 공격을 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 병력을 최후의 순간까지 아끼라. 연합함대 사령부의 기본 방침은 최후의 기회에 큰 전과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선제 공격이 필요하다. 사이판과 이오지마의 예를 보더라도 적 기동부대야말로 승패를 나누는 열쇠이다. 그러나 상륙병력을 동반하지 않은 기동부대에 대해서 모든 전력을 쏟아붓는 적극적인 총공격은 지양하고 되도록 병력을 아끼도록 한다. 이런 탁상공론에 대해 작전 부대인 제 5 항공함대는 정면으로 반발하였다.
상륙부대를 동반하지 않은 기동부대라 하더라도 총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었다. 기지에 앉아서 항공기의 손실을 입는 것보다 먼저 주먹을 뻗어 선제공격에 나서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측이 의견대립으로 시끄러운 동안 항공모함 12척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기동부대는 큐슈 인근 해상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마크 미쳐( Marc A. Mitscher) 중장 지휘하의 제 58 기동부대는 1945년 3월 18일 이후 큐슈, 시코쿠 등지의 비행장이나 함대에 대해 1,400대에 달하는 함재기를 동원하여 대공습을 시작하였다.
Marc Andrew Mitscher
일본군도 제 5 항공함대를 중심으로 거센 반격에 나섰다. 가미카제를 포함한 일본 항공기의 공격으로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 등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도 가미카제 69기를 포함하여 258대의 항공기의 손실을 입었다.
미군측의 항공기 손해는 29대에 불과했다. 다음날인 3월19일에도 미국 기동부대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역시 가미카제를 출격시켜 항공모함 프랭클린과 와스프를 대파하고 에섹스를 침몰시켰다. 특히 이날 전함 프랭클린호에서는 미해군 역사상 가장 많은 832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3척의 항공모함 모두 침몰은 가까스로 모면했다. 또한 같은날 제 343 해군항공대 소속의 일본전투기 60 대가 F6F 헬캣 전투기 50기를 격추시키고 자신들은 16기 손실에 그쳤다는 전과를 보고했다.
이것은 일본 해군항공대의 마지막 대전과로 알려 졌지만, 실제 미군측의 손실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3월 20일, 미 58기동부대는 보급을 위해 남서쪽으로 물러갔다.
3월21일, 58 기동부대는 도이미사키(都井岬沖)해로 이동하였으며 일본은 비장의 카드로 숨겨두었던 인간유도탄(사쿠라바나) 15기를 탑재한 해군항공대 소속의 1식육공 18기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이들은 모두 미군 함재기에 의해 격추되었다. 이날의 전투에서는 일본측은 16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호위 전투기도 22기나 격추당했다.
제 5항공함대는 금일의 공격으로 항공모함 5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함종미상 1척등을 격파했다고 전과를 집계하였다. 물론 실제 미군의 피해는 그보다 훨씬 적었다.
사흘간 벌어진 규슈 항공전의 결과 제 58 기동부대는 다소의 손해를 입긴 했지만, 영국의 제 59 기동부대가 합류하여 손실분 이상의 전력이 추가로 벌충되었다.
- 텐고작전(天号作戦 ) -
1945년 2월 말, 대본영은 오키나와 수비를 위한 텐고작전을 공표하였다.
- 참가병력 : 제 6 항공군(큐슈), 제 8 항공사단(대만), 제 3 항공군(상 하이), 제 5 항공함대(큐슈) - 전투방식 : 전력 특공으로 함.
특히 이 방침을 강행하기 위해 육해군을 합친 비행기 300대를 오키나와 본도의 각 비행장에 투입한다. 전개 완료 시기는 4월 말이 될 것임.
- 공격목표 : 육군은 수송선, 해군은 미군 기동부대를 공격함.
이 작전은 동원 가능한 항공전력을 모두 긁어모아 일거에 적 기동함대를 격멸한다는 간단명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항공전력의 전개가 시작되지도 않은 1945년 3월 20일, 오키나와 침공의 가능성이 극도로 높아졌다고 판단한 대본영은 텐고작전(天号作戦 )을 발령하였다.
현지의 제 32군도 3월 24일 최고 경계령인 갑호배치를 발령했다.
3월 23일, 드디어 오키나와 근해에 미해군 제 58 기동부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오키나와의 수비대 진지와 비행장에 맹폭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윽고 레이테 방면에서 출발한 미 수송선단이 북상중이라는 첩보가 일본군사령부에 접수되었다.
다음날인 3월 24일, 제 59 기동부대의 전함 5척 등은 오키나와 본도 남부에 대한 함포 사격을 실시하며 상륙 예정지점의 소해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외에도 일본군의 반격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은 B-29 폭격기를 동원하여 시모노세키 해협에 다수의 기뢰를 살포하였다.
오키나와 해상에는 함정 1,500척, 수송선 450척과 548,000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미함대는 낮에만 포격을 퍼붓고 밤이 되면 가미카제를 염려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32군 사령부는 미군의 상륙 지점이 어디인가에 대해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군사령부가 최초로 상정한 예상 지점은 오키나와 본도 중부의 가데나만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함대는 가데나만 부근과 남부 미나도가와 부근으로 나뉘어 있었고, 수송선도 남쪽에 있었다.
따라서 참모부의 의견도 둘로 갈라졌다. 결국 32군은 두곳 모두를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연합군의 교란작전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간 것이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항공세력이 전무한 32군은 가데나만의 미군 함대 배후에 大수송 선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연합함대는 오키나와 방위계획인 아마이치(天一)호 작전을 발동하여 제 3 항공함대 등을 규슈 방면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동시에 전함 야마토(大和)를 중심으로한 제1 유격부대, 인간어뢰 가이텐(回天) 특공대에도 출격준비를 명령했다.
오키나와 수비대는 이날 그동안 애지중지 아껴두었던 15대의 비행기를 출격시켰다. 오키나와 주둔군 항공전력의 전부였던 이들은 날이 어둑해질 무렵 미함대에 가미카제 공격을 감행하여 대형함 두척을 격침시켰다. 이것이 제32군의 최초의 전과가 되었다.
3월 27일, 가데나만 정면에 머물던 미군 함대는 게라마(慶良間) 제도의 자마미(座間味)섬으로 상륙을 시작하였다. 자마미의 일본군 수비대는 적 상륙을 보고한 후, 곧 연락이 끊겼다.
카미야마의 미군 155mm 포대
3월31일, 미군은 게이세지마(慶伊瀬島)에 상륙하였으며, 카미야마섬 (神山島)에 重砲 24문을 전개하여 오키나와 본도로 포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슈리에 위치한 일본군 사령부에서는 가미야마섬의 미군진지 모습이 육안으로 관찰될 정도였다.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일본군도 다급히 응사를 명령했지만, 수비대의 열악한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은 카미야마섬까지 도달하지도 못했다.
4월1일,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규모의 함포사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수백척에 달하는 미군 수송선들의 앞쪽이 활짝 열렸다.
수송선에서 빠져나온 상륙용 주정들은 파도를 헤치고 가데나만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주정의 수는 점점 불어나 잠시후 만 전체를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여기에는 육군 2개 사단과 해병 2개 사단이 타고 있었다. 첫날 교두보를 확보한 미군은 다음날인 4월 2일부터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하였다.
전차들이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보병이 따랐다. 배후에서는 미함대가 맹렬한 함포사격을 퍼부으며 지상군을 엄호했다.
미군의 첫 번째 목표는 북비행장( 読谷村)과 중비행장(嘉手納町)의 확보였다. 북비행장은 1개 대대 규모의 일본군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압도적인 미군전력과 맞서 5일간 용전분투한 후 괴멸되었다. 대본영과 해군은 항공작전을 위해 북비행장을 탈환하라고 몇번에 걸쳐 현지로 명령을 내렸다. 32군 내부에서도 반격할 것인가, 이대로 자중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4월 4일에는 32 군 참모장의 주도하에 공세 작전을 펼친다는 안이 결정되었지만 본도 남동부에 새로운 연합군 상륙부대가 접근중이라는 첩보에 의해 실행이 중지되었다. 이 움직 임은 미 제 2 해병사단의 교란작전으로서 실제로는 상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5일까지 오키나와 중부의 동쪽 해안 일대까지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따라서 일본군 수비대 전력은 오키나와 본도 남북으로 나누어졌다.
미군은 나름대로 취합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주력은 구니가시라 방면의 산악지대에 배치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상륙군 병력 중에 가장 정예인 제 1, 6 해병사단은 실제로는 거의 수비 병력이 없는 구니가시라 방면으로 향했고, 남부는 육군 제 7, 96, 77 보병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해병사단은 거의 무인지경인 구니가시라를 질풍같이 석권하고 다시 북단에 있는 이에지마를 공략했다. 이들은 그쪽에 일본군 주력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남하를 개시하여 4월 20일 육군병력과 합세하였다.
- 기쿠스이 작전(菊水作戦 ) -
오키나와 지상전의 전황이 점차 악화되자 연합함대 사령부는 산발적인 항공공격을 멈추고 모든 항공력과 잔존 수상함대를 총집결시켜 일거에 대가미카제 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기쿠스이 작전이었다.1945년 4월 6일, 일본측은 드디어 대반격에 나섰다. 해군항공대에서는 약 390기, 육군항공대에서는 약130기의 항공기가 투입되었다. 전함 야마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10여척의 수상함대도 제1 유격부대라 명명되어 오키나와로 출격했다. 이날 가미카제 항공기의 공격으로 연합군 함정 6척이 격침되었지만, 일본측 항공기도 200기 이상이나 격추되었고 야마토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미군 함재기의 공격에 의해 격침되었다.
대폭발을 일으키며 칠몰하는 전함 야마토기쿠스이 작전과 발맞추어 오키나와 수비대도 총반격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남동부에 새로운 미군 상륙부대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접수되어 출격을 중지했다.
이 작전은 4월 6일과 7일에 걸쳐 벌어진 1호로부터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는 순간의 10호까지 10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참가한 일본군 항공기는 가미카제 2,393기를 포함하여 총 7,812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 작전으로 미국 함정을 400대나 격파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침몰된 것이 36척이고 손상된 것이 386척이었다. 특히 항공모함과 전함, 순양함 중에는 격침된 선박이 전혀 없었다.
- 슈리(首里) 전투 -
한편 오키나와에서 남부로 향하던 미 육군부대는 해병대처럼 속공을 하는 대신 비행장을 정비하고 공격준비를 대단히 신중히 하며 진격하여 이동 속도가 대단히 느렸다. 이들은 하루에 고작 100미터 정도의 전선 확보에 만족했다.
반면 일본군은 밤만 되면 특유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여 어떤날은 출격한 5개 대대중 3개 대대가 전멸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 32군의 수비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미군은 상륙한지 20 일이 지나도록 고작 2k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게다가 방어선의 중심에 위치한 일본군 62사단은 거의 미동도 안하고 진지를 견고히 지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전선은 북부로 이동했던 해병대 병력이 남부로 돌아오며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4개사단의 미군병력이 일본군 62사단을 압박하였다. 열흘간 맹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62사단은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32군 사령부는 급히 독립보병 12대대와 보병 22연대를 증원하여 전선을 안정시켰다. 이에 미국은 새로운 꾀를 내어 가데나만에 머물던 함대를 섬의 동쪽해안인 나까시로만으로 이동시켜 62사단의 다른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때 일본군의 수비망은 붕괴직전에 이르렀으나, 시의적절하게 충원된 증원병력으로 어찌어찌 다시 고착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군 수비대의 모든 신경이 62사단에 집중되어 있는 사이 파국은 엉 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62사단의 우익이던 제 64여단은 측면공격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에서 남하하는 미군부대에 대한 경계가 약화되었으며, 이 기회를 틈탄 미군은 지체없이 빈틈을 찔러 맹공을 퍼 부었다. 32군 사령부는 이 방면에 급히 독립 22대대를 파견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미군이 뚫은 돌파구는 갈수록 더 커져갔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62사단의 붕괴는 말할것도 없고, 32군 전체가 위기에 빠질 것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일본군 수뇌부는 전력을 긁어모아 대반격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공격일은 5월 4일로 결정되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그날은 비가 올 것이 예상되었다. 그렇다면 미군은 진창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작전의 성공확률이 더 높아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일본군은 품고 있었다.
5월 3일 밤에는 군사령부에 각부대의 지휘관이 모여 승리를 기원하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장군들은 내일의 전투를 잊은듯 술을 마시고 웃고 춤을 추었다.
5월 4일 오전 4시 50분, 일본군의 대포들이 모두 불을 뿜기 시작했다. 제 24사단과 전차 제 27연대 등은 후텐마(普天間)까지 탈환할 것을 목표로 삼고 공격에 나섰다.
공병 제 23, 26연대와 해상정진 제26, 29전대는 작은 배로 해상을 우회하여 상대 배후로 역상륙을 시도하였다. 항공대 또한 기쿠수이 5호와 6호를 잇달아 발령하며 총공격에 나섰다.
불타는 일본군 상륙정 그러나 저녁때가 되어 사령부에 들어오기 시작한 전황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중앙도 우익도 모두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한채 맹렬한 포격에 노출되어 막대한 병력을 잃고 간신히 전선을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공격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하루에 3만발의 포탄을 쏘는 미군과 300발 밖에 허용되지 않는 일본군의 물량 차이는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반격작전은 첫날 이미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다음날까지 지속되었다.
어떤 부대는 부분적으로 육탄돌격을 감행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총공격을 한시바삐 종료하지 않는다면 32군이 괴멸할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였다. 어떤 지휘관은 이번 공격을 기화로 전원 돌격하여 장렬히 옥쇄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우시지마 사령관은 남방의 시마지리 반도로 퇴각하여 저항을 하기로 결심하고 작전의 중단을 명령했다.이 공격에서 24사단 같은 경우는 전력이 1/3로 줄어들었다. 남은 병력 중에도 1/3은 부상을 당했다. 미군 배후로 역상륙을 감행했던 선박 공병들은 전멸했다. 한줌뿐이던 전차 전력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포병대의 탄약 재고도 바닥이 드러났다.
이틀간의 공격으로 32군은 14,000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부상자는 무려 5만이 넘었다. 파괴된
일본군 탱크를 살피는 미군 병사
이 전투로 62군의 전력이 거의 괴멸 직전 상황에 몰린 반면 미군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물론 미군도 상당한 사상자를 냈으나 충분한 병력과 보급을 가진 미군에게는 전력 보충에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면서도 일본군은 모든 면에서 미군 전력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슈리 전면의 전투 이후를 미군은 잔적소탕전이라고 불렀다. 미 지휘부는 이미 32군을 조직적인 전력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5월 4일과 5일에 걸친 일본군의 반격이 대실패로 끝났으나 전투가 그대로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마에다 고지의 일본군 보병 제 22연대 일부는 참호 속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32군의 잔여전력도 동굴 속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동굴진지 위에 올라탄 형세로 공격을 퍼부었다.일본군은 밤만 되면 동굴 밖으로 나와 반자이 어택을 감행했다. 낮이 되면 다시 동굴속을 이리저리 교묘하게 이동하며 미군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미군은 결국 마에다고지를 점령했고 5월 18일에는 나하시에 공격을 퍼부었다.일본군 동굴진지를 폭파하는 미군 이제 슈리의 제 32군 사령부는 전선과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일본군은 제 62사단을 후미에 남겨두고 남부로 퇴각을 결정하였다.
- 마부니 전선 -
5월 25일부터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일본군 수뇌부는 비가 계속 내리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날이 흐려야 자신들의 퇴각을 미군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27일 새벽 일본군은 남부의 마부니로 퇴각했다 . 6월 5일 경까지 잔여병력은 모두 마부니 지구로 집결을 완료하였다. 남아있는 병력 3만 중 부상자만 1만을 넘었다.
32군은 이미 전력의 85% 를 상실한 것이다. 자동화기는 1/5로 중화기는 1/10으로 감소했으며, 15밀리 야포는 2문, 유탄포는 16문, 고사포는 10문이 남았다.
그야말로 패잔병의 집단에 불과했다. 일본군이 이미 후방으로 퇴각했음에도 미군의 추격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마부니고지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안에서 미군은 당당히 군수품을 수송선에서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항공기들이 일본군 진지위를 제집 드나들듯이 오가며 폭탄을 퍼부었다.미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6월 8일이었다.
중앙과 측면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미군의 진격은 거침이 없었다. 오오다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 육전대가 먼저 전멸당했다. 곧이어 42사단과 독립 혼성여단, 62 사단이 모두 괴멸 직전의 상황에 몰렸다.
24사단 또한 미군부대의 압박을 받아 방어선 도처에 구멍이 뚤렸다.
6월 15일이 되자 군사령부에는 정확한 전황보고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구사일생으로 연락병이 와서 전황을 보고했으나 그것 역시 전체 전황을 살필수 없는 극히 부분적 정보에 불과했다.
6월 18일, 우시지마 사령관은 드디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제 전선은 마지막이 다가왔으며 통신은 두절되어 더이상 나의 지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앞으로 제군들은 각기 맡은바 진지에서 직속상관의 지휘에 따라 조국을 위해 최후까지 감투하라. 이것이 최후의 명령이다.
제군들의 건투를 빈다. 명령서에 서명한 사령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통제된 제 32군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고립된 일본군 병사들은 무의미한 자살돌격을 반복할 뿐이었다. 6월 18일 밤, 제 32군 사령부의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두자루의 촛불 아래 몇사람 남지않은 사령부 인원들이 약간의 통조림과 탁주로 연회를 벌였다. 사령관이 인사를 하고 참모장이 기세좋게 나체춤을 추었으나 연회는 침울한 분위기였다. 남은 참모들은 한줌의 병력을 이끌고 조만간 마지막 자살공격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군사령관과 참모장은 돌격을 지켜보며 자결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6월 19일 참모들은 군장을 정비하고 사령관에게 최후의 인사를 한 후 돌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50미터도 달리기 이전에 모두 미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6월 21일, 우시지마 사령관은 대본영으로 최후의 무전을 보냈다. 사령부 동굴속의 인원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6월 23일에 사령관의 할복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원래는 잔여병력이 돌격하여 마부니 고지의 정상을 탈환한 후, 그곳에서 분투하는 일본군 병력을 내려다보며 할복한다는 자못 장엄한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격렬한 포격하에 동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식은 동굴 입구에서 거행되었다. 일본 참모장과 사령관은 위스키를 나눠마시고 할복했다. 이로써 오키나와 전투는 완전히 끝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