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배우 업적 기려 세워… 60년간 국립극단 지켜
"작품 가려도 배역 안 가려" "연극은 엄숙·솔직한 예술"
"배우의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잖아요. 이렇게 극장이 만들어져 그 이름과 정신이 남을 수 있으니 영광이고 자랑스럽지요."(장민호)
"장 선생이 없었다면 외로움에 지쳐 연극을 놓아버렸을지도 몰라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지. 부디 건강해서 오래 무대에 섰으면 좋겠어요."(백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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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나리 공연으로 시작된 현판식에서 두 배우는 무대에 올라 모놀로그(독백)를 들려줬다. 백성희(왼쪽)는 '달집', 장민호(오른쪽)는 '파우스트'의 한 대목을 골랐다. 활기는 적었지만 원숙한 맛이 우러났다. 두 배우는 오는 3월 이 극장에서 연극 '3월의 눈'(가제)을 함께 공연한다. /국립극단 제공
27일 오후 서울역 옆 서계동 옛 기무사 수송대 자리에 들어선 열린문화공간에서 '백성희장민호 극장' 현판식이 있었다. 장민호(86)·백성희(85)씨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두 원로배우는 빨간 페인트로 칠한 건물에 새겨진 '백성희장민호 극장'이라는 흰 글씨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260석 소극장이지만 배우의 이름을 딴 국공립극장이 생기기는 처음이다. 외국과 달리, 원로 명배우의 이름을 따 업적을 기리는 국립극장이 국내엔 하나도 없다는 지적에 따라 만들어졌다. 열린문화공간에는 이 극장 외에도 국립극단, 다목적 스튜디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국 등이 있다.
장민호·백성희씨는 '태극기 휘날리며' '봄날은 간다' 등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1950년부터 60년 동안 국립극단을 지킨 '무대지기'였다. 연극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사추기'의 아버지 역으로 유명한 장씨는 "깊은 우물에 조약돌을 던졌을 때 '펑' 하며 울리는 소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내 연기론"이라고 했다. 연극 '달집'에서 40대 초반에 70대 노파를 연기했고, '장화 신은 고양이'에선 50대 후반에 18세 소녀로 변신하는 등 '천(千)의 얼굴'로 통한 백씨는 "작품은 가려도 배역은 가리지 않았다. '나한테 오기만 해! 넌 내 거야!' 하는 심정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56년 전인 1954년 주한미군을 위로 방문한 마릴린 먼로와 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데뷔로 치면 1944년 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로 출발한 백성희씨가 선배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백씨는 한동안 현대적이고 지성적인 역할을 도맡다가 1964년 '만선'에서 구포댁을 맡아 연기의 폭을 넓혔다. 백씨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금저울 같은 캐릭터 분석이 없으면 길을 잃어버린다"며 "ㄱ·ㄴ도 모르면서 말부터 쏟아내려는 배우들을 볼 때마다 객석에 앉아 있기 불편하다"고 했다.
황해도 신천이 고향인 장민호씨는 1945년 월남해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10월 배우 겸 연출가 이해랑이 이끌던 국립극단에 입단했고 '파우스트' '대수양(大首陽)' '성웅 이순신' 등 200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장씨는 "연극은 커튼콜 박수 소리와 더불어 소멸하지만 그래서 더 엄숙하고 솔직한 예술"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