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거북선은 태인허씨 허기 장군에서 비롯했나 ?
이순신은 정여립 태인세력을 포섭하러 정읍현감이 됐다 http://blog.daum.net/nongaak/7090600 거북선은 망국 가야부족의 해상군함 거북교회당 )
이허겸은 허사문 태인허씨 둘째아들 태인허씨 탄생굴 '허왕보굴'
이순신이 정읍현감시대 태인현감 자리를 고의로 비워두고 이순신이 겸임하도록 한 이유가 무었일까 전라도 서해 왜적을 격퇴한 정여립의 무술은 이순신 전투승리와 같이 뛰어 났다 정여립의 마을은 금산사 남쪽 상두산 구리실 마을이다 태산태수 영역으로 태인(태산)군 소속 야서현 이였으나 정여립 사건으로 금구로 붙여진 것으로 본다 조광조를 살리려는 안당을 역모누명으로 귀족이 된 안당의 종 송사련 아들 송익필이 이율곡의 친구로서 안당의 제자 정여립의 출세를 막기 위해서 아비와 같은 역모조작으로 정여립을 모함하여 3000명의 선비를 숙청하고 마지막 이발을 죽이는 날 이순신을 급히 정읍현감에 발령 한다
태인허씨 탄생굴 '허왕보굴' 앞에 진시황제가 탄 돌조각 5두마차가 이처럼 대기하고 있다
이런 진시황제 5두마차를 위의 허장군 탄생 대기하는 마차와 비교한다
그 이유가 이순신은 태인허씨 호족 후손 허겸을 시조 이양겸의 조상이라고 전 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정여립과 친교가 있어서 이율곡의 성씨 덕수이씨라서 생존했다 최무선 정여립 이순신이 호남서해 왜적침투를 격퇴한 전투병법이 거의 같다 이순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신이 아니고 당나라 안록산 반군 진압의 지원군부터 고려 강화도 항몽 해군전투에서 그 노하우 기능이 가야족 허씨 들이 비결을 문서 책으로 전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태인 허씨 족으로 가야인 당나라 지원군 허기장군 해상전투가 가문에 노하우 거북선 제조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은 태인허씨 해상 김수로왕 토탬종교 교회신당으로 군함을 겸하였다 거북선은 태인허씨 수천년 해상전투 무기임이 증명된다 그 이유는 가야족 태인 허씨는 백제로 망명하여 독립운동하다 백제가 망하여 흑치상치와 같이 남해 다도해 서해 해상 해적으로 떠돌아 해상왕국이였다 그러다가 당나라 양귀비시대 당현종이 안록산의 난으로 패하여 장사현 장가게 근처로 피난하여 목숨을 보존했다 이때에 신라사신 허기가 양자강을 타고 찾아가서 구원했다 그로부터 안록산의 난이 평정되어 허기는 당현종이 자기성씨 왕족 이씨 성을 하사하여 이씨로 사용하다가 당나라가 망하고 후백제 고려에서 허씨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고려현종이 나주로 피난가다 태인 왕림마을에서 유숙하는 날 밤에 태인허씨 세력이 태인에서 고려현종 왕비 3을 태인허씨 외손녀로 바꾼다
허기장군이 당나라 반군 안록산을 토벌하고 노획한 당나라 도공이 만든 가야토기가 부안, 정읍, 강진, 고려자기로 발전했다 작은 가야토기를 황제급 토기로 만든 허장군 노예들이 고려청자로 이자겸 개인소유물이였다
그리고 인천이씨 고려 왕비시대가 무신시대 까지 이어온다 대륙을 통일한 몽고제국이 고려를 점령 못한 큰 이유가 가야족 허기 장보고 김원웅 최치원 최무선등 모두 가야족 전통 해상군이다 최치원 까지도 문창(고군산)태수 아들로 서해를 장악한 가야족 세력이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신라사신 이기’라고 썼는데 태인허씨 이자겸 이씨 세력의 고려시대가 되니 신라사신으로 위장했다 덕수이씨 이순신 가문의 성씨 시조가 이율곡 가문과 달리 원래 이돈수 아들 이양준로 내려오고 그 선대를 조상을 이허겸 이라고 전해내려 왔다는 기록이 있다 거북선은 조선 태종시대 인천에서 가까운 임진에서 태종왕이 직접 왜선과 훈련전하는 것을 보았고 세종때에는 탁신 이라는 사람이 거북선의 제조구조를 거론하엿는데 ‘탁신’은 광주사람이라고 하나 태인의 토성으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있다 아래의 이순신 가문의 시조 이양준이 활동하는 시대 1237년에 이의방의 고향을 금구군으로 승격시켜준다 이양준 장군이 큰 공으로 최충헌 세력이 이의방(정붕부난 주모자 태인허씨 족)의 고향 땅 금산사 지역으로 원래 태인군 야서현 이였는데 정중부 난으로 강등하여 금구현으로 붙였는데 이해에 군으로 승격시킨 이유가 이양준의 공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은 김수로왕 토탬 거북종교 교회당이다 태인허씨 동북아 세력의 고유무기 이허겸의 후손 이순신이 활용 이허겸은 태인허씨 시조 허사문의 둘째아들 허겸, 인천이씨 시조가되어서 이허겸, 추밀공 이양준(樞密公 이陽俊) 고려사 기록행적 추밀공은 1202년(고려 신종5)에 출생, 1221년(고종 8) 겨울 나이 20세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가 판의조승(判儀曺丞: 종8품)이 되었으며, 1224년 산원(算員: 정8품 무관직)을 거쳐 1227년 식목도감(式目都監)의 녹사가 되었다. 1228년(고종 15) 6월에 도병마사(都兵馬使)의 녹사(綠事)가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다시 산원이 되고, 1230년 별장(別將 :정7품)이 되었으며, 이듬해 낭장(郎將: 정6품)을 거쳐 1230년 전주판관(全州判官:정6품)이 되었다. 1234년(고종21) 6월 합천부사(陜川府使)로 옮겼다가 12월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전보되었으며, 1236년 다시 낭장이 되고 1238년 삼사판관(三司判官: 정5품)을 겸직하였다. 그 후 1240년 이부원외랑(吏部員外廊:정6품)으로 옮겼고, 이듬해 용호군(龍虎軍) 중랑장이 되었다가 어사잡단(御使雜端: 정5품)으로 승진하였다. 1243년(고종30) 정월에 신호군(神虎軍) 중랑장이 되고, 뒤에 조산대부(朝散大夫:정6품)로 가자(加資)되어 흥위위 보승장군(興威威 保勝將軍)이 되었다. 돌아가신 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정3품)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되었다. 시조이양준 배위(配位)는 권씨(權氏)로서 중랑장 권극평(克平)의 따님이다. 고려는 태조왕건 2대에 나주출신 혜종이 계승하였는데 3대 정종 4대 광종으로 충주유씨 왕비 소생 왕손이 박술희를 죽이고 구테타를 이르켜 내려오다가 경주 김씨 김치향이 세력을 잡다가 경상도 합천출신 왕건후궁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합천 소생 공주가 태인허씨 허사문의 부인으로 태인에서 이허겸을 낳아 인천이씨 이허겸으로 분성하였다 그러므로 태인허씨 계 이의방을 정중부가 죽이고 정중부를 태인 허씨 허승이 경대승과 복수하여 정중부를 죽였다 그러나 경대승이 허승을 죽여서 태인허씨 인천이씨 족은 바다에 숨어 돌아 다니다가 강화도 해군세력시대 선박기능이 뛰어나 몽고와 항전에서 공을 세웠다 양천허씨(陽川許氏)와 문화유씨(文化柳氏) 이율곡 이씨의 족보에도 같은 내용이라서 . 그후부터 이제 율곡 족보에 전하는 중랑장(이돈수)을 시조로 삼아서 세계도(世界圖)를 작성하였다 한다 '1230년 전주판관(全州判官:정6품)이 되었다. 1234년(고종21) 6월 합천부사(陜川府使)로 옮겼다가 12월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전보되었으며‘ 라는 기록으로보아 이양준이 최충헌 강화도 정부시대 전주 합천 상주의 호족으로 최의 강화도 세력시대 갑자기 이의방 고향 금구현을 승격시키고 이의방 허씨 세력 이양준을 크게 등용한 것 같다 조선 이성계는 이의방 의 동생 이한의 후손 조선 비석은 거북 제사그릇은 가야토기이다
아래는 인천이씨 홈페이지에 올려진 기사 내용 전문이다 택당 이식은 홍길동전을 허균이 지었다는 유일한 기록을 남긴 이순신 가문의 족보를 만든 사람으로 시조 이양준(陽俊)이 이허겸의 후손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제목: 율곡선생과 충무공 이순신은 시조공 휘 허겸의 후손?
덕수이씨의 세계(世系)와 열전(列傳) 택당(澤堂) 이식(李植) 지음
덕수현(德水縣)은 지금은 경기도에 속하여 해풍현(海豊縣)을 합하여 풍덕군(豊德郡)이 되었다. (개성부(開城府)와 접경하고 서울(漢京)과의 거리가 일백 칠십 구 리(里)이다.) 덕수현(德水縣)에 이씨(李氏)가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였으나 선대(先代)로부터 전하여 오는 보첩(譜牒)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나의 고조(高祖)이신 용재(容齋)(곧 이행(李荇)선생이 손수 초(草)하신 세계(世系)와 연보(年譜)에는 추밀공(樞密公) 이양준(陽俊)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출처(出處)가 뚜렷하지 않으며, 율곡(栗谷) 선생댁에 전해오는 세계(世系)에는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敦守)를 시조(始祖)로 하고 추밀공(이양준)은 그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양천허씨(陽川許氏)와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족보에도 같은 내용이다.) 이제 율곡 선생댁에 전하는 이씨세계에 근거하여 중랑장(이돈수)을 시조로 삼아서 세계도(世界圖)를 작성하는데 이용재(容齋이행) 할아버지께서 손수 초(草)하신 연보(年譜)에 의거(依據)하여 추밀공(樞密公)으로부터 열전(列傳)을 만든다. (벼슬 이름을 첫머리에 써 넣을 때 혹은 증직(贈職)을 쓰거나 그대로 원직(元職)만을 쓴 것도 있으니 모두 선대(先代)로부터 호칭(號稱)한 것이고 지금 고친 것은 아니다.) 〔《고려사》(高麗史)의 조충전(趙沖傳)을 살펴보면, 고종(高宗) 4년(1217년) 거란(契丹)이 침입해 왔을 때 조중(趙沖)이 원수(元帥)가 되어 성천(成川, 평안남도 소재)에 이르러 각 도(道)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 按察使) 이적(李勣)이 병사를 이끌고 오다가 적(敵)을 만나서 전진(前進)하지 못하자 장군(將軍) 이돈수(李敦守)와 김계봉(金季鳳)을 파견(派遣)하여 이들 적군을 치고 이적(李勣)을 맞이하려 했으나 적군은 이미 두 길로 나뉘어서 곧바로 우리 중군(中軍)을 공격(攻擊)해 왔다. 이에 아군이 좌우익진(左右翼陣)을 펴서 북을 울리며 전진하니 적군은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져서 도망갔으므로 이돈수(敦守)등은 이적(李勣)과 만났다고 한다. 고종4년 조충(趙沖)을 따라서 거란(契丹)군을 토벌(討伐)하고 중랑장(中郞將)이 된 사실은 의심(疑心)할 바가 없기에 이에 덧붙여 둔다.〕 세계(世系)와 열전(列傳) 제사(題辭)의 서로 다름을 고증(考證)함
태인허씨 족보 시조 허사문 둘째 아들이 허도 이름이 이허겸으로 인천이씨 시조가 된다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지음
돌아가신 아버님(곧 이식(李植))께서 말년에 우리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종계분파도(宗系分派圖)를 만들고 또한 세계(世系)와 열전(列傳)을 손수 초(草)하시고는 그 제사(題辭:책의 첫머리에 적는 글)에 이렇게 적으셨다.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오는 보첩(譜牒)이 조금씩 다르다. 나의 고조부(高祖父)이신 용재(容齋,이행(李荇))선생이 손수 작성한 세계 연보(世系 年譜)에는 이양준(陽俊)을 시조(始祖)로 삼았으나 그 출처(出處)는 밝히지 않았으나, 율곡(栗谷) 선생댁에 전하는 세계(世系)에는 이돈수(敦守)를 시조(始祖)로 삼고, 추밀공(樞密公)은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충무공댁(忠武公宅)에 전하는 세계(世系)에는 신라(新羅) 사람 이허겸(李 許謙)의 후예라고 했으나, 그 중간의 세계(世系)는 밝히지 않은 채 또한 추밀공(이양준)을 시조(始祖)로 삼았다. 대개 우리 나라의 이씨(李氏)는 신라(新羅) 6부(六部)에 사성(賜姓)한 것이 그 비롯함이니 지금의 경주(慶州)지방의 이름 높은 가문(家門)이 그 시초이다. 신라(新羅) 사람 허겸(許謙)의 후예라고 함은 6부(六部)의 첫째 성씨(姓氏)인 이씨(李氏)를 가리킨 듯하나, 다른 증명할 만한 뒷받침이 없으므로, 이제 이율곡(栗谷)선생 댁에 전하는 것을 근거(根據)로 하여 중랑장(中郞將)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도(世系圖)를 만들고, 용재공(容齋公: 이행(李荇))께서 작성한 연보(年譜)에 의거(依據)하여 추밀공(樞密公)으로부터 시작하여 열전(列傳)을 만든다. 선친(先親, 곧 이식(李植))께서 이 열전(列傳)을 초(草)하고 원고(原稿)를 바꾸어 다시 쓰셨으나 교정(校正)은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오경 n |
출처: 한민족소리 찾기. 아리랑은 애국가 원문보기 글쓴이: 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