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Jackie' 영화를 보았습니다.
얼마 전 그의 딸 캐롤라인 케네디와 함께 한 기억도 있어, 끝무렵이어 한 시간너머 먼 곳에서만 상영하는데 지하철 몇 번을 갈아타고 찾아갔습니다. 언젠가 오래 전 재클린 비세, 이름도 같은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케네디가 간 후 오나시스와 결혼한 재키의 사생활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의 '재키'는 케네디의 달라스 죽음과 장례식 치루기까지의 시간을 기자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작품성을 평할 생각은 없고 제가 궁금했던 것을 보아 좋았습니다.
1963년의 급작스런 케네디의 죽음을 지상을 통해서만 보았었는데 영화에 펼쳐지는 처참한 죽음의 장면과 남편을 보듬어 안았던 피묻은 핑크 수트로 기내에 서서 존슨의 대통령 선서를 바라다 보는 그 심정, 급작스레 남편을 잃었을 뿐아니라 3년을 복원하느라 애쓴 백악관과 자신의 퍼스트 레이디 '왕좌'까지 다 날아간 순간의 처절한 충격을 보았습니다.
가신 아버지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저를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미네소타 미시건 시카고 뉴욕 보스톤을 일일이 데려다 주시고 끝에 워싱톤의 죠지타운 대학에 떨어뜨려 주고는 서울로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워싱톤의 죠지타운이 제일 마음에 들었길래 망정이지 아니라면 혼자 다른 도시로 갈 엄두도 나지않던 때였습니다.
죠지타운은 워싱톤 시내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백악관이 가깝고 거기서 포토맥 강에 걸친 Key Bridge 다리 하나만 건너면 주가 바뀌어 버지니아가 됩니다. 미국의 젊은 역사가 올 해로 241년이라면 죠지타운 마을의 역사는 그보다 긴 400여 년으로, 역사와 지성과 아름다운 문화가 살아있는 곳입니다.
거기에 유서깊은 죠지타운 대학이 있는데 클린톤이 그 학부를 나와 대통령이 되고 첫 행사로 그 캠퍼스에서 세계의 외교사절단을 맞은 것이 해외토픽이 되기도 했습니다. 카톨릭 대학으로 그 중에서도 학구파인 제수잇Jesuit 교단이어 제수잇 신부 교수가 꽤 됬습니다.
제가 택한 사회언어학 교수가 제수잇 파인 사라Sara 신부였는데 칼칼한 목소리의 그가 한번은 재키의 음성이 쌕쌕 쇠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포드가 대통령이었고 케네디는 한참 전이었는데 그만큼 미국인들 뇌리에 케네디 시대가 각인되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특히 재키는 만인의 가슴에 인상깊이 남아 있고, 당시 흑백 TV에 그녀가 처음으로 백악관을 두루 안내하며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 소리가 궁금했으나 지금처럼 유투브 시대도 아니어 못 듣다가 수 십년이 지난 이제 '재키' 영화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하나 궁금했던 것은 재키가 캐밀롯 Camelot을 케네디와 연결해서 언급했던 것입니다.
재키가 퍼스트 레이디 역을 물러나자 세계의 언론은 다투어 인터뷰 요청을 하였는데 얼마 후 재키가 고른 것은 라이프 잡지였습니다. 첫 마디가 인상적입니다. '기사 편집은 내가 하겠다' 기자가 쓰는 것은 맘에 안든다는 것으로 제멋대로 붙치고 빼고 왜곡된 기사를 대한 경험이 많았다는 뜻이겠고 무엇보다 자신이 기자를 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비애와 그것과는 별개로 남편을 역사에 '이상'으로 남기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보입니다. 그를 어떻게 기억되게 하고 싶은가? 기자 질문에 '잊혀지지 않길 바래요. 짧았지만 찬란한 그 순간을 (one brief shining moment ) ~ 캐밀롯이 있었음을 ~ '
그것은 백악관에서 남편과 함께 밤마다 레코드로 듣던 뮤지컬 '캐밀롯'의 기억이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케네디가 상징했던 무언가를 뚜렷이 각인시키길 원했던 재키의 결정은 오늘날 케네디 가문의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장 강력한 도구인 'Storytelling'을 만들어 낸 그의 선택은 시대를 앞선 행동이었습니다.
그 신화로 케네디 가문의 로맨틱하고 지적이고 독특한 매력이 품어나오게 된 것입니다.
재키의 공이지요. 아내를 잘 맞아야 된다는 생각이 새삼 드는 순간입니다. 그를 인터뷰한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자 최대의 찬사를 보내며 '세계는 당신의 기품과 위엄을 기억할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 자체를 기억할 것'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베테랑 기자에게 누군가 후에 재키를 세 단어로 표현해 보라고 하니
"Woman of Class" 라고 했던 생각이 납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표현입니다.
지난 번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을 참석하고 몇 분 일행은 곧바로 가시는데 오래 살던 워싱톤에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저는 며칠을 남았습니다. 가 볼 곳은 많았으나 그리던 죠지타운에 네 번을 갔습니다.
대학 캠퍼스는 그대로이나 많은 새 건물이 생겼습니다. 포토맥 강이 내려다 보이는 매일 앉던 도서관의 내 자리를 보고, 대강당에서 당시 부통령이던 록펠러의 강연후 서로 악수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고색창연한 메인 빌딩을 바라보고, Sara 신부와 공부하던 Edmund Walsh 건물에 들어가 조용히 앉아 보았습니다. 남들이 보면 그저 건물이요 그저 메인 빌딩이요 한 그루의 나무일지 모르나 제 눈에는 수 많은 기억과 추억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듯 합니다.
밖으로 나오면 열채로 이어진 몇 백년된 타운 하우스들이 동화속 이야기처럼 펼쳐집니다. 오래된 붉은 벽돌의 보도를 밟으면 푸른 청춘과 연결되어 마음이 녹고 푸근해 집니다. 6월이면 온 마을에 허니써클 연노랑 꽃내음이 퍼집니다. 첨 도착하여 외국인 학생을 자원해 받은, 일꾼이 셋이나 되는 할머니 집에 2달을 묵었던 벽돌집이 보이고 남학생이 쫓아오던 골목도 보입니다.
거기엔 젊은 상원의원 시절의 케네디와 재키, 클린톤, 상원의원과 한때 결혼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집들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그때 인기가 대통령보다 드높던 키신저 집의 쓰레기통 메모를 매일 뒤져 기사로 쓰던 기자도 있었습니다. 당시 5만불 하던 집이 지금은 2백만불부터 시작된다고 하니 비싼 학비대신 그 집을 샀어야 하는 건데~ 쓸데 없는 생각이스쳐 갑니다.
큰 길가 위스콘신 애베뉴로 나오면 수 많은 상점과 레스토랑, 갤러리, 금빛 돔의 은행이 보입니다. 거기에 학생때 메인 디쉬는 못시키고 Onion Soup과 따라나오는 빵을 먹던 레스토랑 Martin's가 있습니다. 이번에 거기에 3번을 가 디너를 했습니다. 메인 디쉬도 시켰습니다. 같은 주인이었고 8불 정도의 오니온 수프는 여전히 맛있고 반갑게 맞으며 미국의 수도답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워싱톤에서도 그 곳은 특히 여기저기 성조기가 보이고 천정을 덮은 커다란 성조기에는 9 11 사태로 목숨 잃은 이의 이름이 죄다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곳은 트루만 케네디 닉슨 존슨 클린톤 부시 등 역대 대통령들이 단골로 찾은 곳이기도 합니다. 작은 부스에는 부스 1 부스 2 라고 번호가 매겨져 두 블럭 거리에 살던 젊은 상원의원 케네디는 Sunday마다 그 옆 Holy Trinity 교회를 다하면 그 곳의 부스 1에서 스피치 원고를 썼습니다. 1961년의 대통령 취임사도 거기에서 썼다고 합니다. 노란 종이 노트 Yellow legal pad 에 쓰는 것을 직원과 손님들이 보았다고 합니다.
부스 2는 닉슨이 상원의원 부통령일 적에 즐겨 앉던 곳이고 부스 3은 재키가 케네디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부스입니다. 1953년 6월 Jacqueline Lee Bouvier는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대관식에 Washington Times Herald의 기자로 취재를 하고 돌아온 직후 그 곳에서 청혼을 받았고 그 후 그것은 'Proposal Booth' '청혼 부스' 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아담한 공간에 그런 깊이의 역사와 낭만이 숨을 쉽니다.
'재키' 영화를 보며 거기에 등장하진 않았으나 얼마 전 죠지타운에서 보고 온 'The Proposal Booth' 와 이 글을 끄적여 본 Booth 1 이 떠오릅니다.
세계가 흠모하고 우러러보던 그런 신화와 로맨티시즘이 미국에 새 대통령이 들어서고는 사라져가는 듯 보이는 것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몹시 안타까울 뿐입니다.
기억하라 모든 캐밀롯의 이야기를
일찍이 희미한 영광이 있었다고
캐밀롯의 그 영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