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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1월2일 월요일
[(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도회] 영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요한 2,22-28
† 복음 요한 1,19-28
◈ 오늘의 묵상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두 분의 성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 안에서의 우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신
분들입니다. 두 분 모두 학문과 덕행에 출중하셨으며 은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관상하며 그분과의
일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한 분은 체사레아의 주교로서,
다른 한 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서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진리를 수호하셨습니다. 두 분은 마치 하나의 영혼처럼 일치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전하셨습니다.
두 분의 성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느슨해질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교와 삶으로 보여 주십니다. 신앙의 위기를 느끼고
세상의 유혹이 거셀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두
분은 사도들로부터 들은 진리를 간직하고 후대에 물려주셨습니다.
두 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고 고백한
분들이었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하려고 주님 앞에 머물며, “나는
누구인가?” 하고 화두를 던져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를 느낄 때나
이단으로 신앙이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이미 교리 교육에서 배운
진리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되새겨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올바른 길을 걷는 신앙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조언을 들음으로써
우리는 많은 선한 것들과 하느님의 진리를 새롭게 우리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신 겸손입니다.
2016년 가해 1월2일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2-28
복음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9-28
어떤 형제님께서 지인의 소개로 분위기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선을
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에 둘은 호텔 정식을
주문했지요. 식사를 하면서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스피커에서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옵니다. 클래식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 형제님이었지만, 유일하게 아는 비발디의 ‘사계’가
나오니 얼마나 반갑던 지요. 아는 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묻습니다.
“이 곡이 무슨 곡인지 아세요?”
그러자 자매님께서는 음식을 천천히 씹고 음미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이 고기요? 맛을 보니까 소고기인데요.”
하긴 ‘곡’이나 ‘고기’나 발음이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음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르지요. 이렇게 자기의 주관심사에 따라서 들리는
말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관심사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주관심사라면 주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많은 부와 높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얻는데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 더 높은
가치를 따르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하게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묻는 유다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자기를 이 세상에 들어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게 여기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십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대사제 즈카르야였고 그의 출생에 관련된 일도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한 마디만 해도 사람들은
구름같이 모여들면서 열정적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베푸는 세례에 관해 겸손하게 말하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모습이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는 주님 안에서
머무는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 안에서 철저하게 머물고 있습니까?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신 겸손입니다. 겸손을
통해서만 내가 아닌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며, 이로써
주님 안에서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라. 그러면 최선의 것이
돌아올 것이다(M.A. 베레).
성 대 바실리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자(최천호)
사람들은 무수한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 인연 속에 고운 사랑도
엮어가지만 그 인연 속에 미움도 엮어지는 게 있다.
고운 사람이 있는 반면 미운 사람도 있고, 반기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외면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고운 인연도 있지만 피하고 싶은
악연도 있다.
우린 사람을 만날 때 반가운 사람일 때는 행복함이 충족해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만날 때는 그다지 반갑지 않아 무료함이
몰려온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도
있다.
과연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있는가. 과연 나는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주었는가. 한번 만나면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한번 만나고 난 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진솔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나는 분명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야
말로 다시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한번 만나고 나서 좋은
감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불행에 속할
것이다.
언제든 만나면 반가운 사람으로, 고마운 사람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언제든 만나고 헤어져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자.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일까요? 이제 절대 만나기 싫은 사람일까요?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될 때 이 세상 안에서 그만큼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보세요. 그만큼 더 나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영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월2일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1,19-28
“처음부터 들은 것을 간직하면,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1요한 2,24)
영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
하느님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지만 때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영적 성장의 세 단계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1독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1요한 2,24-25)
영적 성장을 위한 첫 걸음은 ‘경청’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면
나로부터 떠나야 하지요. 내 사고의 틀과 굳어진 습관, 신념, 경험과
가치관으로부터 떠나지 않고는 그분께 향할 수 없고 말씀이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를 떠난다는 것은 회개하여 하느님 중심이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영적 성장의
첫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들은 바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구석에
처박아놓고 살면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요. 따라서
깊이 되새겨 자신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 있도록 내 혼과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야 합니다. 간직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늘
의식할 때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형될 수 있는 건 당연하겠지요.
끝으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안정을 위한 정착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물리적으로
배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사랑이신 주님의 그 사랑의 역동적인 움직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활동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주님의 영(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그 영의 이끄심에 따라 내 중심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것이지요. 그 움직임은 ‘내어줌’과 ‘함께함’, ‘되돌림’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끌어안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나를 떠난 경청, 말씀을 간직함, 주님 안에 머무름을 통하여 우리의
영성은 심화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될 때 이 사회도 변화되고 밝아지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런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그 말씀을 깊이 간직하였기에
주제파악을 철저히 한 증거자였습니다. 그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고
그의 세례운동은 당시 유다 백성의 종교지도자들과 헤로데의 눈에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서슴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요한 1,20),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7)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오늘 기념하는 성인들처럼 정직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원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기”(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때문입니다.
오늘 영적 성장을 위해 나를 떠나 주님을 품고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복한 사랑의 카페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노경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2016년 가해 1월2일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 1,19-28
노경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존경하는 현기영 선생님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를 열심히 밑줄
쳐가며 읽고 있습니다. 노인들만이 아니라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에 중독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필독서인
듯합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가슴을 파고드는지
모릅니다.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면, 노여움만 쌓여간다.
특히 이름과 명예에 연연해온 사람은 이름의 노예가 되어 두 번의
죽음을 겪게 된다. 자기 이름이 잊히는 것 때문에 ‘죽음 같은 쓴
맛’을 겪고, 뒤이어서 육체적 죽음을 맞이한다.”
“노경에 접어들면서 나는 이전과는 좀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노경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적지 않은데 그중 제일 큰 것이
포기하는 즐거움이다. 이전 것들에 너무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고
흔쾌히 포기해버리는 것, 욕망의 크기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포기하는
대신 얻는 것이 자유이다. 허리를 굽혀 앉은뱅이 노랑제비꽃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자유, 드넓은 초원에 가슴을 맞댈 수 있는 자유를
꿈꾼다.”
소설가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은 우리 수도자들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소설가가 추구하는 포기의 삶, 그로 인한 대자유의 삶에서
또한 세례자 요한이 남긴 삶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남긴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정직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구약시대 마지막 대예언자로서의 매력적인 모습, 대
영성가로서의 모습에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분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자꾸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복음 1장 19절)
만일 제가 세례자 요한 입장이었다면, 적당히 둘러쳤을 것입니다.
“그건 왜 자꾸 물으시오? 지금 이 순간 그게 뭐 그리 대수요?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요.”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한 점 숨김없이,
조금도 가감 없이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복음 1장 20절)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복음 1장 23절)
그리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기 뒤에 서 계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자신은 극도로 낮추고 그분은 완전히 높이 올립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복음 1장 26~27절)
참으로 놀라운 세례자 요한의 겸손입니다. 경탄할만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의식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그리고 하느님 앞에 참으로
솔직했습니다. 스스로를 조금도 과대포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때가 되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하느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소개하고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참 나가 아닌 나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부족하고 죄인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한데, 이런 저런 가면을
쓴다든지 가식의 옷을 무겁게 걸치고 다닐 때도 많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교훈과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깨어있기 위해 자주 광야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시선을 오로지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
극단적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
예수님의 때를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이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16년 가해 1월2일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 1,19-28
교구청은 오늘 시무미사를 시작으로 2017년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2017년은 ‘닭의 해’입니다. 닭은 부지런해서 아침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벽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암탉이 병아리들을 돌보듯이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려고
한다.’고 하셨던 것처럼 가족을 사랑합니다. 닭은 베드로 사도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회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새해에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먼저 생각하고,
돌보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하여서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지인의 집에 갔었습니다. 이사를 하셨고, 집 축성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지인께서는 식탁의 벽에 군에서 보내온 아드님의 편지를
걸어놓으셨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부모님께 감사한 것들’입니다.
아들은 100가지의 감사한 것들을 빼곡하게 적어서 보내왔습니다.
그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미남으로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입니다. 새해에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지금은 원주교구 교구장으로 가신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의 축일입니다. 늘 우직하셨고, 사제들을 위한 사목을 하셨고,
신자들을 사랑하셨던 주교님을 생각합니다. 주교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시길 바라며,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본질은 성경에 있으니 성서를 늘
가까이 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사람의 본질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는 ‘식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을 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을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17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수원]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월2일: 세례자 요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로마를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도 그리스도로 생각하여 많은 군중이 그들을
따랐던 것이다. 예수님 수난기에 나오는 ‘바랍바’도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례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고 대부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명멸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물론 세례자
요한에게도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고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그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적으로 자신의 위엄과 힘을 군중들의 힘을 빌어 나타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따를 수 있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하고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너희의 주 하느님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고 한 예언자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하였을
때,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오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이 미사 중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솔직함과 겸손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주임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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