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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묵상글 (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 다시 정신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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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다시 정신을!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방탕, 이기심....
분파, 질투, 만취,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오늘 갈라티아서는 육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저를 보면 육의 행실들이 골고루 얼마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얼마간 제게 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 불행하다고 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추한 모습 곧 육에 이끌리는 모습을 얼마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입니까?
육에 이끌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양다리 걸치기입니까?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영적 식별이 필요하고,
거듭거듭 정신을 차리는 일깨움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라고
사도 바오로가 얘기하듯 우리의 육을 욕정과 욕망과 함께 확실하게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늘 성령을 따라 살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을 십자가 영원히 못 박지 않은/못한 사람은
매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깨어있지 않으면
세상 것들에 정신이 팔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정신/Spirit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정신은 들락날락하는 것이고
그래서 정신을 차리면 정신이 내 안에 있기도 하지만
무엇에 정신이 나가거나 팔리면 정신이 내 안에 없기도 합니다.
꽃을 보겠습니다.
꽃은 아름답고 전혀 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꽃에 취하고 빠집니다.
그러는 순간 하느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고
꽃과 반대되는 추한 것들은 보기 싫습니다.
그런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꽃만 찾아가고
성당에도 가지 않고 병든 노모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는 꽃을 볼 때 즉시
하느님을 같이 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봅니다.
‘꽃이 예쁘게 피었네!’ 하고 말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예쁜 꽃을 주셨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음식도 유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네! 하며 즐기기만 하면
그 순간, 우리는 식도락가로서 식도락을 즐길 뿐이고,
음식은 양식이 되지 못하며 식사는 성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깨어있으면
음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은총이요,
우리를 살리는 영적 양식이며 성사가 되겠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였다면
거듭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깨어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다시 정신 차리고 하느님께 깨어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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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이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지만, 한때 이것에 민감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학창 시절, 이성에 관한 관심이 생기면서 남들 하는 것을 나도 따라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유행’입니다.
요즘에도 사람들은 유형을 따릅니다. 그런데 요즘의 유행은 예전과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경제 잡지 ‘브랜드 아인스’는 소비 상품에 관한 기사를 다루면서 ‘거창하게 떠벌리는 것은 유행이 지났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가치 있다고 간주되는 것은 ‘강제성이 없는 것’, ‘신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랜드의 로고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눈에 띄지 않거나 아예 없는 것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전에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이었다면, 이제 눈에 띌 듯 말 듯한 소박하고 간결한 것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전에는 자기 PR이 중요하다면서 자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제는 나서지 않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성실한 사람이 인기라고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겸손을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은 엄청나게 시대를 앞서간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의 유행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이 겸손이라는 ‘유행’은 따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윗자리에 앉아 인사받기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형식주의와 섬김보다 명예를 우선시하는 그들의 태도를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를 향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짐을 지울 줄만 알고 정작 자기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면서 꾸짖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의 자리 자체에 대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 것을 겉으로 보이기에 온 힘을 쏟았다는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자기 구원을 위한 ‘열심’이 아닌, 보이기 위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의 삶을 살지 못했기에 그들은 결국 주님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런 말을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 중 어떤 사람이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범위는 이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회개를 위해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보이기 위한 열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주님 마음에 드는 보이지 않는 열심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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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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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여섯 가지 ‘불행선언’을 통하여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와 율법 교사들에 대한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이는 십일조의 율법준수를 부정하거나 율법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된 율법준수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 따르면, 주요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더 세분화하여 뗄 나무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할 만큼 율법준수에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열성은 좋지만, 그릇된 열성은 오히려 위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위에 서 있는 열성이어야 합니다.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사람들이 그들에게 윗자리를 내어주고 먼저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권적 우월의식과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했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윗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존경받기보다 존경하고, 인사받기보다 인사하고, 섬기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으면서 무덤인 줄을 모른다.”(루카 11,44)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마치 표시하지 않은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마치 선인 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된 선일 것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들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6)
율법 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는 못했던 것입니다(마태 23,3).
사실,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 길잡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주님!
제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을 믿으면서도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불의와 부패 속에서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도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뜻을 행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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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꾸중을 감당하라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3,19).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6) 라는 예수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중하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달게 받아들이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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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사필귀정(事必歸正)’도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어둠이 빛을 가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모든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을 차갑게 만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을 뜨겁게 만들어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주변을 보면 활활 타오르는 불을 꺼버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불행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재물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궁핍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건강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몸이 아프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외로우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이웃을 돕지 않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잘난 척하고, 교만한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의 불을 꺼버리려는 사람입니다.
주변을 보면 꺼져가는 불도 다시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이유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재물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건강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할지라도, 굶주릴지라도,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의 불을 뜨겁게 살리는 사람입니다.
‘花無十日紅이고 權不十年’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곧 사라지고 마는 것들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돈 때문에 소중한 가족을 등한시하기도 하고, 권력 때문에 우정을 팔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蘭香千里 德香萬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난의 향기는 멀리 가야 천리이지만 사람의 덕은 만리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희생, 사랑, 나눔, 봉사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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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께서는 사회 기득권인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에게 시원하게 일침을 가하십니다.
오늘 주님 말씀의 시작은 바로 ‘십일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박하와 운향과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너희는 불행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보이는 것에 대한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의로움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보이는 십일조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혹시 하느님께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 중 일부를, 그것도 아까워하며 봉헌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보이지 않는 십일조는 어떤가요? 보이지 않기에 모른척하고 지나가나요? 의로움과 사랑의 실천은 신심 강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혹은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행하는 사치라고 생각하시나요?
만약 우리 마음이 이렇다면 우리도 바리사이와 큰 차이 없지 않을까요?
보이는 십일조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보이는 은총을 다시금 보이는 감사로 되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십일조는 더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은 그 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십일조는 그 차이가 없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고, 말씀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행하는 의로움을 실천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십일조가 하늘의 보화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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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쿡 찜질방
찜질방 좋아하실까요?
저는 가끔 찜질방에 들르곤 합니다.
식혜나 달걀만을 위해 들르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바랍니다.
찜질방은 우리나라 대표 시설입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관광오면 찜질방에 방문해서 그 문화를 즐긴다고 합니다.
저도 찜질방에서 외국 사람들을 자주 봤습니다.
미국 여행 중 찜질방에 가게 되었습니다. 분명 미국인데 시설은 한국의 여느 찜질방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찜질하는 사람들이 모두 외국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분명 한국 찜질방인데 한국 찜질방이 아니었습니다. 식혜도 맥반석 달걀도 모두 같았는데…. 꼭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노란 머리 외국인과 함께 누워 땀을 흘리고 있는 제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우리 삶에 가끔 이런 기이하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추억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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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의 인도에 따른 영적인 삶
“자유와 사랑”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요한8,12)
오늘로서 제1독서 갈라디아서는 끝납니다. 육과 영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오늘의 내용이 참 풍부합니다. 육적인 삶이냐 영적인 삶이냐 우리의 선택이 참 중요합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랑의 삶을 원한다면 성령의 인도에 따른 삶을 선택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독서에서 생략된 부분이 아까워 인용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를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하신 계명입니다.”
제 멋대로의 자유가 아니라 섬김의 사랑을 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인도에 따른 영적 삶이 목표하는바 참으로 자유로운 섬김의 사랑에 있음을 봅니다. 또 여기서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육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어 바오로 사도는 육적인 삶에 따른 육의 행실을 적나라하게 제시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흡사 오늘 현대인들의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로 가득한 부정적 내적 현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결론이 참 명쾌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지상천국의 삶입니다. 참 좋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행실(works)’이 아닌 ‘열매들(fruits)’이요, 인간이 ‘성취(achievement)’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gifts)’입니다. 이런 성령의 열매는 ‘덕(vertue)’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에게 선사되는 ‘생명력(vitality)’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택은 분명해졌으니 성령의 인도에 따른 영적인 삶이요 이어지는 결론 말씀이 우리의 결심을 확고히 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 갑시다.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시비하지 말고, 서로 시기하지 맙시다.”
성령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갈라디아서 제1독서는 오늘 복음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는 자유로운 사랑의 영적 삶을 대변한다면 꾸짖음의 대상이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육적 삶을 대변합니다.
육적 삶의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불행한 삶입니다. 어제 안팎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지탄 받은 데 이어, 오늘은 십일조는 충실하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소홀히 하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삶을, 또 윗자리를,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실속없는 외적 허영의 삶을 살아가는 참 어리석은 삶이 지탄의 대상입니다. 또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은 진실치 못한 삶 역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이어 삶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율법교사들도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안팎에서 법지상주의의 육적 삶의 부정적 경우들을 수없이 목격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무지한 육적 삶에 대한 답은 주님의 가르침에 따른, 성령의 인도에 따른 영적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에 따른 참 좋은 영적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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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보다 너>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나
살기보다
너
살게 하기를
나
빛나기보다
너
빛나게 하기를
나
가지기보다
너
가지게 하기를
나
기쁘기보다
너
기쁘게 하기를
나
아프지 않기보다
너
아프게 하지 않기를
나
슬프지 않기보다
너
슬프게 하지 않기를
나
더럽지 않기보다
너
더럽히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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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2-44)
사람들을 속이는 바리사이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십니다(참조: 마태 23,6; 마르 12,39; 루카 20,46). 율법에 도통한 율법 교사들도 ‘드러나지 않는 무덤’ 같다는 비난을 듣습니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지요(마태 23,27 참조). 자기는 시늉도 못하면서 남들에게 그리하라고 시키는 교사가 아주 많습니다, 성경 어디엔가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시편 5,10) 이라고 기 록되어 있거니와, 그들은 무덤입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에게 헤살을 놓는 자는 언제나 여러분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버리십시오. 정말로,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면, 여러분이 어디로 달아나든지, 거기에는 여러분을 가로막는 헤살꾼이 버티고 서서 여러분을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이 참된 자각, 곧 겸손은 “모든 선의 뿌리다. 그것은 선한 사람들을 따라다닌다. 이 참된 겸손 속에서, 진리인 하느님은 우리 자신의 참모습과 하나가 된다. 겸손한 사람과 하느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우리가 실로 우리 자신의 깊이를 알기만 한다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사이가 없을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신적인 존재다. 신적인 존재는 겸손한 사람이다. 소위 검손이라는 덕은 신성의 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성의 터에는 겸손이라는 덕이 섬어져 있다.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하느님 안에서만 존재한다. 겸손은 하느님을 빨아들이는 진공 청소기와 같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신성의 가장 높은 부분은 겸손의 심연에 자리 잡은 가장 낮은 것에 굴복한다 ... 어떤 사람이 진실로 겸손하다면,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신성을 포기하고 그것을 완전히 버리거나, 아니면 몸소 그 사람 속으로 송두리째 들어갈 것임에 틀림없다.(259)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8절: 신학과 대학
스콜라학과 그 대표자들:
그리하여 하나의 “근대적”인 철학적 • 신학적 방법이 발생하였고, 그것은 특히 신생 탁발 수도회들에서 큰 공명을 얻었다. 도미니코회는 대 알베르토(+1280), 토마스 아퀴나스(+1274), 에크하르트(+1328), 프란치스코회는 할레의 알렉산데르(+1245), 보나벤투라(+124), 스코투스(+1308) 등 전성기 스콜라학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들을 배출하였다.
알베르토는 슈바벤 사람으로 1223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고, 전반적으로 박식한 사람이었는데, 보편적 박사, 대(大) 알베르토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퀼른과 파리에서 가르쳤다. 파리에서(1243∼1247)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알베르토가 1248년에 수도원 대학원의 창설을 위하여 퀼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을 때 토마스도 그를 따라 그곳으로 갔다(1248∼1252). 알베르토는 물론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적, 다시 말해 철학적 • 신학적 방법을 체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적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에 있어서 그의 위대한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를 훨씬 능가하였다. 토마스는 1226/1227년 나폴리 부근의 로카 세카(Rocca Secca)에서 출생하였고, 12444년에 가족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1245∼1252년에 알베르토의 강의를 듣고, 그의 도움으로 결실을 맺었다. 토마스는 파리(1252∼1259)에서 1256년 부터는 대학 교수로서 로마(1259∼1269)에서 , 그리고 다시 파리(1269∼1272)와 나폴리(1272∼1274)에서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적 • 신학적 토대에서 그리스도교 최고의 총괄적인 서술인 「신학대전」 등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중세 시기의 가장 천재적인 신학자였다. 또한 위대한 신비학자이며 성인이자 천사적 박사였다.(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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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인생의 복福도 그리고 화禍도 다 하늘이 내리며, 福 담을 그릇에는 복이 담기고, 禍 담을 그릇에는 화가 담기기 마련이라고 봅니다. 명심보감의 「성유심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운 표현이 있습니다. 『복福 담을 그릇과 화禍 담길 그릇이 뚜렷이 대비됩니다. 맑고 검소한 그릇에 복이 담기고, 스스로를 낮추어 한발 물러서면 덕을 쌓습니다. 부글거리거나 출렁거리지 않는 고요하고 안정된 눈에 가야 할 길이 보이고 화목하고 따뜻한 곳에 생명이 자랍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화를 당합니다. 경솔하고 거만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옹졸하고 어질지 못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복과 화, 죽음과 생명, 불행과 행복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그릇에 각기 다른 결실을 담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화를 선택하느냐, 죽음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생명을 선택하느냐 하는 그 사이에서 인간 실존과 생애가 전개된다고 봅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저 역시도 때론 함께 사는 형제들을 꾸중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꾸중을듣는 형제의 마음은 많이 불편했겠죠. 저도 역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불편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호되게 바리사이들의 여러 처신에 대해서 꾸중하시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차례나 공개적으로 “불행하여라!”(11,42.43.44)라고, 꾸중을 듣는 바라사이들은 여간 불편하고 힘들었겠죠. 하지만 꾸중하는 사람이 있고, 그 꾸중에 안타까운 마음이 내포되어 있음을 안다면 이는 마치 몸에 좋은 약은 쓴 것처럼 좋은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꾸중을 듣고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었다면 불행이 아닌 참으로 행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꾸중하지는 않습니다. 잠언에 보면,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3,12)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꾸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불편했지만, 그들이 마음을 바꿔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진심어린 꾸중이며 권고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아니꼽게 여겼고 트집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았고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당에서는 윗자리에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줄 모르기 때문이다.”(11,42.43.44)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첫째, 바리사이들은 십일조의 규정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정작, 율법의 핵심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나무는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본질인 율법의 정신이 빠진 규정에만 얽매였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도록 일깨우신 것입니다. 둘째로, 바리사이들은 언제나 몸에 밴 특권의식으로 남보다 더 높은 자리와 어디서나 사람들로부터 존중받고 싶은 과시욕이 강함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당신이 몸소 실천하셨던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도록 권고하시고 그렇게 사셨으며,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삶을 살도록 질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바리사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위선,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처신을 꾸중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에게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11,46)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론 바리사이들의 처신도 마땅히 꾸중 받을 태도와 행위이지만, 율법 교사들의 행위가 더 질타와 질책을 받을 행위라고 봅니다. 바리사이들의 그런 행위가 상대적으로 타인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들의 행위는 타인에게 많은 어려움과 피해를 그리고 삶의 질을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힘들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의 사랑어린 꾸중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변화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꾸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사실 불편하지만, 행복한 일입니다. 꾸짖거든 말하는 이의 진심과 사랑을 되새기면서,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12,15) 이런 점에서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의 불행은 삶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처신이었지만, 더 큰 불행은 예수님의 충고를 그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음에 있습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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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어쩜 우리도 또 다른 현대판 바리사이 /
박윤식 [big-llight] 2024-10-15 ㅣNo.176806
주일 미사에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면 고해성사 감이라는 걸 우리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런데 이 점을 너무너무 강조하다보니, 적잖은 이들이 종교적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살다가 주일 미사에 빠지게 되면 고해소에 가서 이 내용만 죄의 전부인양 덜렁 들춘다. 또한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으면 판공 때까지 내내 성사를 보지 않는다나. 마치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면 달리 고백할 죄 없고 주일 미사 빠진 그것만이 오직 내가 범했던 유일한 죄인 듯이.
가끔씩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지금보다는 더 잘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한다. 어쩜 믿음의 길을 쉽게 가는 방법은 없겠냐는 거다. 성당 안 가자니 그렇고, 가자니 역시나 재미가 없단다. 기쁨이어야 할 믿음이 괜히 멍에란다. 끌려가는 신앙이기에 그렇다. 물질의 십일조 못지않게 사랑의 십일조도 중요하다. 그러니 하루 중 몇 시간은 떼어 놓자. 일주일에 하루만은 주님시간으로 남겨두자. 시간의 십일조도 중요하니까. 이런 앞서 가는 믿음으로, 바꾸면 어떨까?
“불행하여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녕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 실천은 더 해야만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회당에서는 윗자리와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또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다! 너희는 짐만 지우고, 정작 너희의 손가락 하나라도 대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약 육천 명이었다나. 바리사이의 어원은 ‘분리하다’에서 유래되었다. 실제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시키고자 애를 썼다.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에서, 둘째는 율법을 잘 모르는 대중으로부터. 왜 그랬을까? 율법만이라도 잘 지키면 지킬수록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잘못 생각했기에.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만 꼭 지키려 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율법 준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반 대중과 만나는 것까지 꺼렸다.
바오로 사도 역시 회심 전에는 바리사이에 속한 율법 교사였다. 아무튼 그들은 율법에만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치중한 나머지 정작 필요한 하느님 사랑에는 소홀함을 드러냈다. 사랑을 강조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깨닫지 못했던 거다. 신앙과 수계 생활은 열심이지만,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바리사이나 다름없다. 겉과 안이 일치하며 정직하고 진솔한 삶만이 존경의 대상이리라.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중성을 지닌 존재일 게다. 심리학에는 모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두려움이 각인된단다. 무의식에 자신이 내쳐질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나. 이것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 한다. 그래서 본디 자기 모습이 아닌 게, 무의식적인 자기로 각인이 되어 점점 자신의 진정성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잊는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바리사이들의 그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주님의 그 꾸짖음을 지금 나에 대한 꾸짖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거울삼아 우리 모습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 누구나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지만 실천이 없으면 힘이 안 실린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기에. 교회 일은 관리자가 되기보다 언제나 봉사자가 되어야 할 게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관리만을 하려는 어쩜 또 다른 현대판 바리사이가 아닐까? 정직한 소수가 다수의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데, 그런 이가 바로 우리였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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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결코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결코 쉽지도 않다는 것이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어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워진 사람은 “자기 육[이나] 그 욕정과 욕망”(갈라 5,24)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길로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직 해방되지 않았고 아직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불륜이나 방탕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면, 적개심이나 시기가 일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이기심을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율법에 매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저 방종한 상태에 있을 뿐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없거나, 어떤 상황 때문에 기뻐할 수 없거나, 다른 무엇 때문에 평화를 잃는다면 아직도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 육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성령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5,22)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자리하시면 이러한 열매들이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답송에서 말하듯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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