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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기사들
행 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행 5:12-16 / [사도들이 행한 기적] 사도들은 솔로몬의 행각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많이 베풀었다. 13)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을 극진히 존경하면서도 감히 그들 속에 가담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14) 주님을 믿는 남녀 신도의 수는 점점 더 불어났다. 15) 사람들은 병자들을 침상이나 요에 눕힌 채 거리로 메고 나왔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그들에게 덮이기를 바라서였다. 16) 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도 병자들과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도 모두 다 고침을 받았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보여줍니다.
능력과 연합(12)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 초대교회는 부흥의 채비를 갖춥니다. 교회 부흥의 동력은 사도들의 손을 통해 나타난 많은 표적과 기사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앞서 성도들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행 4:30). 또한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난 이유는 사도들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 혹은 귀신들린 자들에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부흥의 채비는 온 성도의 연합입니다. 이는 교회 내부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반드시 다툼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를 이루었고, 이러한 연합이 폭발적인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남녀의 큰 무리(13-14)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되게 살아갔습니다. 이를 본 일반인들은 자신들과 구별된 성도들의 높은 영적 수준을 인정하였으며, 그들의 진실한 삶을 보고 그들의 도덕성을 칭송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와 성도의 순수함은 숫자적인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성도들의 진실한 삶을 통해 주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들도 주께로 나왔습니다. 본서의 저자 누가는 새 신자를 ‘교회에 가입되는 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교회가 철저하게 주님 중심의 공동체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교회의 최고의 매력은 오직 주님 자신입니다.
다 나음을 얻으니라(15-16) 사도들의 손을 통한 치유의 역사는 폭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메고 나와 침대나 요 위에 뉘였습니다.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일 경우 나을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림자 자체에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그림자는 임재를 암시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지나갈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으로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치유의 영역이 점점 넓어져갔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살던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름의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으며, 모두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적용: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연합이 잘 안되는 이유와 현대 기독교에서 치유의 사역을 일으킬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복음의 폭발적인 성장을 낳습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성결교의 4중 복음입니다. 신유는 사람들을 중생의 자리로 모여들게 하며, 중생은 모여든 자들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결케 하고, 성결케 된 자들은 재림의 잔치에 합류할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언제나 복음의 폭발적 성장을 낳았지만, 현시대 신유의 자리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의 권세와 능력 또한 여전히 동일하시지만 복음의 폭발적인 성장은 멈춰진지 오래입니다.
< 설 교 >
위기 뒤에 오는 축복
양인순 목사
사람은 누구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입니다. 요즘같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하기 쉽습니다. 건강의 위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찾아온 질병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직장의 위기가 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갑작스런 회사의 부도로 하루아침에 실직을 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열한 경쟁구조 속에서 한순간 방심하면 평생 쌓아온 회사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요즘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을 합니다. 교회 주변에도 수많은 가게들이 새롭게 시작했다가 금방 문을 닫습니다. 지금 잘 된다고 현실에 안주하면 언제 위기에 직면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영적침체라는 신앙의 위기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제가 이번 금요일에 부산에 내려가야 합니다. 동남노회 시찰에 약 35개의 교회가 있는데 한 교회가 교회분열이라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큰 교회만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공격을 합니다. 성도 숫자가 현재 12명입니다. 부임 당시에는 30여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원로목사를 지지하는 분과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분들로 나뉘어서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노회 수습위원들과 함께 부산까지 내려갑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파도와 같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그 사람의 능력이요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위기를 대하는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면 좌절하거나 낙심합니다. 남을 원망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위기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문제 자체에 매달려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입니다. 한자어로 위기(危機, crisis)는 '기회(chance)'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누가 능력 있는 사람인가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위기 속에서 그 사람의 지혜가 빛이 납니다. 위기 속에서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이 드러납니다. 위기를 새로운 도약과 발전의 기회로 삼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한참 초대교회가 부흥하고 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고도 남편과 아내가 같은 날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아나니아는 거짓말쟁이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삽비라는 성령을 속임으로 가장 추한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린 아름다운 헌신의 부부를 하나님께서 이토록 강하게 징계를 하셨을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자신의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헌신의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와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난 주 성지비전센터 봉헌시에 십일조 한 번 더 드리자는 광고에 많은 분들이 동참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녀들이 마음껏 예배드리고, 비전을 키울 수 있는 훌륭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판 돈 전부를 다 드리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그토록 가혹한 징벌을 내리셨을까요? 아닙니다. 바나바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했을지라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그 마음과 정성은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막상 재산을 팔고 나니 재물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판 돈의 일부를 감추고 드렸습니다.
여기까지도 사람인지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온전히 드려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형편과 처지를 생각해 보면 욕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그렇게 죽을 만큼 범죄행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잣대를 우리에게 들이댄다면 누가 온전히 이 자리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탄이 틈을 타자 재물에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벌써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탄은 거짓의 영으로 미혹합니다.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끝까지 거짓으로 속입니다. 결국 그들은 가장 고귀한 헌신의 자리에서 사탄이 틈을 타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순간 베드로를 속임입니다. 성령을 속임입니다. 이것이 가장 불행한 비극을 맞이한 단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초대교회 공동체가 순결하고, 거룩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성도들의 마음에 순간순간 틈을 탑니다. 거짓을 불어 넣어 하나님보다 재물을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일벌백계하심으로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가 되어야함을 단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초대교회 공동체는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야! 이것 겁나서 예수 못 믿겠다’고 물러서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반응을 기록한 11절을 보십시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
거룩한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 공동체를 크게 요동치게 하는 위기의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처신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일을 할 때마다 엄청난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중심으로 초대교회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짧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내공이 쌓인 것입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사모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초대교회는 더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더 많은 기적이 나타납니다. 교회의 능력은 바로 거룩함과 순결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가 깨끗해지고 순결해지면 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거룩함이 바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일어난 것처럼 성지교회의 영적 리더십들이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목회자들의 손을 통하여, 장로님들과 안수집사, 권사들의 손을 통하여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위기 뒤에 초대교회에 임한 축복은 진짜와 가짜 신앙이 구별되었습니다. 은혜가 없는 교회에서는 적당히 믿는 사람들이 더 큰 소리를 칩니다. 교회의 여론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영입니다. 거룩한 빛 앞에 가짜와 어둠은 모두 드러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시체로 젊은이들의 손에 매여 나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엄습합니다. 그것을 본 믿는 자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가짜는 모두 떠나가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듭니다. 가짜는 더 이상 함께 할 없습니다. 성령을 속이고 살았던 자들은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거룩함의 회복을 통해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자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솔로몬 행각에 모여서 더 열심히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의 삶을 나눌 수 없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상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구분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과 적당히 주를 믿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주님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분명한 기준이 있기를 바랍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생활 가운데 있다면 이 시간 분명한 선을 그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어둠이 있다면 이 시간 다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나쁜 습관과 버릇들을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운전면허를 따고 초보 운전자일 때 일입니다. 저녁에 종로에 있는 파고다 학원을 가는데 실수로 당시 청계고가도로로 들어섰습니다. 가변차선으로 운행되는데다 차선이 좁았습니다.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무사히 고가도로를 내려와서 유턴을 하려고 하는데 경찰이 차를 세웠습니다. 떠는 목소리로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물었더니 경찰이 말합니다. ‘밤에는 전조등을 켜고 다니십시오.’ 초보이다 보니 밤에는 헤드 라이트를 켜야한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도 가로등이나 다른 차량의 빛에 의해 시내를 달리는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캄캄한 시골길을 간다면 불을 켜지 않고 어떻게 밤길을 달려갈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도 남의 불빛에 의지해서 그냥 지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내의 불빛에 의지해서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친구의 불빛에 의지해서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의 불빛에 의지해서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안에 성령의 불을 켜야 합니다. 언제까지 남의 불빛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내 인생에 캄캄한 어둠의 위기가 엄습할 때 불을 켜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 신앙의 등불이 켜져 있다면 더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아직도 희미하거나 꺼져가고 있다면 이 시간 다시 밝히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인생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내가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만약 뜻하지 않은 질병이나 사고로 내 인생이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적당히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 할 때보다 마지막 때가 더 가까워졌습니다. 이제는 머뭇거릴 때가 아닙니다. 해가 높이 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슬픈 것을 짧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늦게 깨닫기 때문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남겨진 시간으로도 충분합니다. 손에 쥐며 빠져나가는 모래같은 것을 움켜쥐고 살면 그 인생은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항상 변하는 것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않는 복음의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하루를 살아도 의미있는 삶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감사와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더 늦기 전에 새롭게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나가십시오. 그것이 바로 위기를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삶으로 달려가는 비결입니다.
위기 뒤에 초대교회는 더 성숙해졌습니다. 기적이 나타나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가짜들이 더 이상 발부치지 못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됐습니다. 그 결과 믿지 않는 자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게 됐습니다.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 안에 거룩함이 회복되면 영적 부흥이 임합니다.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숙이 동시에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성지 공동체 안에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위기 뒤에 오는 축복은 바로 치유와 회복입니다. 악한 사탄의 영이 떠나가자 각종 귀신과 질병으로부터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15절에서 16절을 보시면 베드로 사도가 지나갈 때에 사람들은 병든 자들을 침대와 요 위에 누인 상태로 거리고 메고 나갔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그림자가 덮이기만 해도 치유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뜨거운 믿음과 사모함의 결과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이 치료됐습니다. 더러운 귀신에 시달리던 자들이 회복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병들게 만드셨는가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질병 가운데 고통 받게 내버려 두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죽지 않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에덴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잃어버립니다. 에덴에서 추방됩니다. 비록 은혜의 가죽 옷을 입혀주셨지만 인간은 죽음이라는 원초적 고통에 빠집니다. 죽지 않는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고통에 매이게 됩니다. 병과 무관하던 인간이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병으로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병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죄의 결과로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내가 어떤 병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바로 그 특정 병의 원인이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병들지 않아야 할 인간이 병들게 된 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범죄한 결과이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인간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에 빠져 신음하는 인류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죄의 결과로 주어진 질병으로부터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611:1)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러 오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러 오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심으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1/3이 바로 치유사역입니다. 각종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시요 치유자이십니다. 인간의 잘못으로 죄와 질병에 시달리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본문 16절에 ‘나음을 얻다’라는 동사는 ‘쎄라퓨오(therapyuo)’인데, 원래 의미는 ‘섬기다(to serve)’입니다. 질병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섬김에 의한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더럽고 냄새나는 곳을 닦아주시고, 싸매주심으로 치료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음을 입었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육체적 질병이 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평생 병자로 살았습니다. 기적의 선지자 엘리사도 병으로 죽었습니다. 왜 그들의 병은 낫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육체적 약함으로 인해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더 놀라운 축복이요 배려입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주님께서 치유하실 수도 있고, 질병을 지닌 채로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픔을 통해 영적으로 더 건강하게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게 하시는 은혜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병 가운데 있다가 회복되셨다면 더 감사함으로 주신 건강으로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내가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병 가운데 있다면 그것까지도 감사하십시오. 그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더 겸손하게 약함 속에 임하시는 주의 능력을 체험시키시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어떤 방법으로도 든 영적으로 육적으로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2천년 전 베드로와 사도들의 손길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베드로에게 임했던 그 성령님이 이 시간 우리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의 손길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여러분을 터치하시면 질병이 떠나고, 눌림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역사가 임할 줄 믿습니다.
누구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바로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입니다. 그림자라도 덥히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침대를 메고 거리에 나오는 그 믿음을 주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주님의 옷자락에 손만 닺아도 낳을 수 있다는 용기와 믿음의 사람에게 임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에게 바울은 그에게 낫고자 하는 믿음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 믿음이 그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신체 가운데 가장 아픈 곳, 치유받기를 원하는 곳에 조용히 눈을 감고 손을 대십시오. 그리고 병든 나의 영혼과 육체를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어도 주님이 이 시간 임하시면,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안수하시면 깨끗하게 치료됩니다. 회복됩니다. 그 결과는 온전히 주님께 맡기십시오. 사도바울처럼 육체의 질병은 나음을 얻지 못할지라도 그로인해 영혼을 더 강건케 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이 시간 기도할 때 우리의 영과 육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치유의 역사가 임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전능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이끄시는 주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여호와 라파! 우리를 치유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같이 찬송가 471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찬양 드립니다.
1.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 모든 병을 고쳐주마 주 약속 하셨네
내가 지금 굳게 믿고 주님 앞에 구하오니 주여 크신 권능으로 곧 고쳐 주소서
2. 나의 주님 뜻이라면 나를 고쳐 주소서 머리위에 기름 붓고 날 고쳐 주소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간구 하는 나의 몸을 지금 주의 양속대로 곧 고쳐 주소서
3. 주를 위해 살겠으니 나를 고쳐 주소서 내게 속한 모든 것은 다 주의 것이니
성령이여 강림하사 능력 있는 손을 펴서 나의 몸을 어루만져 곧고쳐주소서
4. 나의 병을 고쳐 주심 내가 믿사옵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 찬송하겠네
나를 구원하신 말씀 어디든지 전하오리 나의 병을 고쳐 주심 참 감사합니다
은혜로 충만하면 됩니다
조상호 목사
중세시대 ‘브루노’라고 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깊은 산속에 움막을 만들어놓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한참 기도를 하는데, 개구리들이 개골개골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도저히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움막 창문을 열고 개구리들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놈들아 수도사가 기도하는데 너희들 정말 방해할래? 조용히 해!” 그러자 개구리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조용해졌습니다. 수도사는 킥 웃음을 지으며 “그럼 그렇지”하고는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창문을 닫고 다시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개구리들이 또 개골개골 더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그가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자 조용해졌습니다. 그러나 창문을 닫으면 또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화가 난 그는 하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께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저 개구리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 개구리들, 모가지를 따든지, 입을 꿰매든지 좀 조용히 시켜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부르노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야! 이놈아! 저 개구리를 누가 만들었느냐? 개구리라고 기도할 자격이 없겠느냐? 개구리라고 찬양할 자격이 없겠느냐? 왜 너 혼자 기도하려고 하느냐? 왜 너 혼자 찬양하려고 하느냐? 너 개구리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면 안 되겠느냐?” 그는 자기 혼자 기도하고 자기 혼자 찬양하는 줄 알았는데, 온 산과 들과 밭에 있는 개구리들도 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 그렇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창문을 열고 개구리들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랑하는 개구리 형제 자매 여러분! 그 동안 미안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개구리 형제들이여 마음껏 찬양하십시오!” 그랬더니 개구리들이 신이 났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개골 개골 개골 개골’하면서 마구 울어 재끼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엔소니 드 멜로의 <개구리의 기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내가 변하면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기연주에 따라 울어대는 것도 아니고, 개구리들은 전과 동일하게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루노라는 수도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니까,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문제는 개구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루노라는 수도사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한의학에 보면 얼굴은 내부 장기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기관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장기에 이상이 생기면, 얼굴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마치 목욕탕에 수증기가 차게 되면 천정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처럼, 우리 몸 안에 탁한 기운이 차거나 좋지 않은 이물질이 발생하면 얼굴을 통해서 뿜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드름, 알러지, 뾰록지, 등이 생기고, 얼굴색이 탁해지기도 하고, 붉어지기도 하는 등 얼굴에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우리의 얼굴은 자동차의 계기판과 비슷합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계기판에 나타나듯이 몸의 상태가 얼굴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의 양이 계기판에 나타나는 것처럼, 은혜도 우리의 삶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와 은혜가 떨어졌을 때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느 사이트에서 <충만할 때와 떨어질 때>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예수님이 크게 보이고, 은혜가 떨어지면 내가 크게 보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천국을 사모하나, 은혜가 떨어지면 세상이 그리워진다. 은혜가 충만하면 말씀이 꿀맛 같으나, 은혜가 떨어지면 말씀이 지겹게 들린다. 은혜가 충만하면 책망을 들어도 감동이 되나, 은혜가 떨어지면 좋은 말에도 시험에 빠진다. 은혜가 충만하면 내가 죽어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내가 살아난다. 은혜가 충만하면 남을 칭찬하고 높여주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자기를 자랑하고 높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나를 깨뜨리나, 은혜가 떨어지면 남을 깨뜨린다. 은혜가 충만하면 자신의 죄가 크게 보이나, 은혜가 떨어지면 남의 허물이 더 크게 보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사람을 사랑하나,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이 미워진다. 은혜가 충만하면 영혼이 귀하게 보이나,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이 하찮게 보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남을 섬기고 싶어 하나, 은혜가 떨어지면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은혜가 충만하면 고생을 해도 찬송이 나오나, 은혜가 떨어지면 편안한 생활에도 원망이 나온다. 은혜가 충만하면 범사에 감사가 넘치나, 은혜가 떨어지면 매사에 불평이 넘친다. 은혜가 충만하면 겸손이 절로 나오나, 은혜가 떨어지면 교만함이 베어 나온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은혜로 충만하십니까? 아니면 은혜가 떨어졌습니까?
저는 예년처럼 12월과 1월, 두 달 동안 ‘2010년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무엇을 원하실까’ 기대하며 기도를 하는데, 성령께서 계속 제 마음 가운데 이 ‘은혜’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가운데 “조목사야, 다른 것 구하지 말고, 은혜를 구하라. 꿈도 좋고 헌신도 좋고, 전도도 좋고 선교도 좋지만, 은혜가 말라버렸구나? 은혜가 말라버리면 봉사도 헌신도, 전도도 선교도 할 수 없고, 승리도 할 수 없단다.”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충만했던 초대교회를 떠오르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라고 해서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줄 만큼 성도들이 구제에 힘쓴 것은 사실입니다만,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앉은뱅이가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음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그의 다리를 고쳐주기 전까지 아무도 그를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의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의 재산을 판 돈 가운데 얼마는 감추고 사도들 앞에 가져왔음에도 전체를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교인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 사실입니다만, 헬라파 유대인들은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제외되는 것을 보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향하여 원망하는 등 교회 안에 분란도 있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 받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1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했지만, 2차 선교여행 때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갈등을 하다가 서로 갈라서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교회 등 초대교회 안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많았습니다. 사도들과 사도들 간에, 사도들과 교인들 간에, 교인들과 교인들 간에 갈등도 있었고,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닮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오늘날의 교회처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충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아니 은혜로 충만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은혜로 충만한 교회의 특징 네 가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모이기에 힘을 씁니다
첫째,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모이기에 힘을 씁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은혜가 떨어지면 모이는데 게으름을 피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모이기에 힘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충만하면 예배, 기도, 봉사 등에 잘 참여합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에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모이기에 힘쓰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 은혜로 충만하려면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120명이 한 자리에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을 때 마가 다락방에 성령침례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또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 자리에서 말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려면, 은혜로 충만하려면 말씀 듣는 자리에 모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은혜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모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배 자리,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2010년 한 해 동안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모이기에 힘쓰면 은혜가 충만하게 임합니다.
2.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칭찬을 받습니다. 지난주 금요집회에서 어떤 형제가 생활비가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50불을 길에서 줍게 하셔서 생활비에 보탰다고 간증을 했는데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50불짜리 지폐와 5불짜리 지폐 두 장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어떤 지폐를 주워야 할까요? 50불짜리 지폐입니까? 5불짜리 지폐입니까? 무엇을 주워야 할까요? 저는 ‘둘 다’ 줍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만 주울 것이 아니라, 둘 다 주워야 합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만 칭찬 받을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칭찬을 받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주위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18절에 보면,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칭찬 받은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같이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또 사도행전 2장 47절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온 백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에는 믿는 사람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되고,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많은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칭찬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더 나아가 주위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Woolston 지역 주민들과 Christchurch 시민들과 뉴질랜드의 키위들에게, 더 나아가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3.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셋째,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다같이 15절과 16절을 보겠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놀라운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에 침대를 놓아두고 요를 깔아놓고,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그 위에 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스치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그림자만 닿아도 병들이 낫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문이 온 예루살렘 성안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로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그들의 병은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16절 하반절에서 ‘다 나음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질병의 종류와 상관없이 귀신들린 정도와 상관없이 모든 병자들이 다 회복될 만큼 성령의 역사가 크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표적(miraculous signs)과 기사(wonders)’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 12절 상반절에 보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안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4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보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현재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남미의 교회들도 ‘표적과 기사’ 때문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서양 교회들이 점점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부흥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들은 대부분 뉴라이프, 순복음, 엘림, 등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입니다. 그 교회들의 특징은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큰 건물을 자랑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그 교회는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모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점점 약해지고,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한다 할지라도 교회로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계최대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표적과 기사’ 때문입니다. 1958년 불광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자유케 되고, 문제가 떠나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자, 물밀 듯이 사람들이 몰려와서 현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가 충만한 교회에는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지금도 이런 치유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안에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지만, 올해 2010년도에는 더 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심령, 가정,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계속해서 성장을 합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계속해서 성장을 합니다. 14절에서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 세상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나타나면 교회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시장에서 사과를 파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수없이 전도했지만, 그 아주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옷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어린 아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교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1주일에 세 번씩 우리 가게에 들르는 신사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은 항상 못 생기고 덜 싱싱한 사과를 사갔어요. 너무 미안해서 사과를 몇 개 주었더니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어요. 지금 당장 먹을 것이기 때문에 좀 썩은 것도 괜찮다는 거였어요. 그 대신에 남들에게 싱싱한 것을 팔라고 말씀했죠. 저는 그 때부터 그 분에 대해 조금씩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이 제게 예수님 믿으라고 권하잖아요. 그 분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기 위해 이렇게 두말없이 따라 나섰지요."
<신바람 건강 세미나>로 유명한 황수관박사님의 말에 의하면 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는 사람들은 보통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생선가게에 가서 생선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나서, 사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일가게 주인이나 생선가게 주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싫어한답니다. 여기저기 만지면 과일이 상하고, 생선의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손가락질 당하는 행동을 하면, 나 혼자만 욕먹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욕을 먹고 하나님까지 욕 먹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로 충만하여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행동을 하면,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욕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손가락질 당하는 행동을 하여 교회에 누가 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칭찬 받고 인정을 받아 교회를 부흥케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해보면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고,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며, 계속해서 성장하는,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초대교회 위에 임했던 충만한 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에 돈도 필요하고, 일꾼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악기와 기자재 등,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2월 첫째 주부터 시작되는 우리 교회의 2010년도 표어를 “은혜가 충만한 교회”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사역목표로 ”모이기에 힘을 쓰자, 칭찬받고 인정을 받자, 성령님을 사모하자, 성장을 더욱 기대하자“ 등 네 가지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주제찬양은 <주님께서 세운 교회>입니다. 조금 있다가 불러보겠지만, 가사가 너무 좋습니다. ”주님께서 세운 교회 날로 날로 부흥되도다. 여기 모인 주의 백성 모두 은혜 충만하도다. 은혜가 충만한 교회, 말씀이 충만한 교회, 사랑이 충만한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 주님 다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해. 주님께 감사드리세.“ 앞으로 1년 동안 매 주일예배 축도를 마친 후 이 주제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역을 ‘은혜’에 초점을 맞추며, “은혜로 충만한 성도, 가정, 교회”가 되기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날마다 충만한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고 찾는 자를 만나주시고,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끝으로 과거 중국의 유명한 부흥사요 저술가였던 ‘워치만 니‘라는 분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전에 몇 번 그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는 20대에 중병에 걸려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에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중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난데없이 큰 바위에 부딪혔습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 답답해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바위를 치워주랴, 물이 불어나서 물 위로 배가 지나가게 하랴” 워치만 니는 바위는 그대로 두고 물이 불어나 그 위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양자강 상류에서 물이 쏟아져내려와 물이 불어, 바위에 걸렸던 배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환상을 통해 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이 넘치면 배가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은혜가 넘치면 어떠한 장애물도 넘을 수 있겠구나, 그 동안 나는 물이 넘치기를 구하기보다, 바위가 옮겨지기를 구했구나‘ 이러한 깨달음 후에 그는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고, 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생토록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바위, 즉 고난, 시험, 역경과 같은 문제를 옮겨달라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은혜가 넘치면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아야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100% 맞는 말은 아닙니다. 훈련받아 변화될 것 같으면 이미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다 변화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되지 않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사람은 훈련을 통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체벌들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으면 변화됩니다. 은혜가 넘치면 주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섬김과 나눔이 회복되고, 구제와 선교를 하게 됩니다. 은혜가 넘치면 예배가 즐겁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습니다. 은혜가 넘치면 교회가 성장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2010년도 꿈이요 비전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처럼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날마다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교회
최승윤 목사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에 대단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대단히 큰 사건이었기에 그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또한 매우 컸습니다.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한 마디로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공포가 아니라 일종의 경외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교회 안과 밖에서 모두 발생했습니다. 5절, 1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발생한 “두려움”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커다란 각성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저냥 신앙생활 하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먹고 마시면서 교회 안에서 부덕한 짓을 마음대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면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들었던 사람들이었고, 기도에 전혀 힘을 썼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물건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성도들과 유무상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바나바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서 죽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렇게 한 근본 동기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신령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거역하고, 성령 하나님을 속이는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보이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또 교회 밖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자신들 눈 앞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저런 추측과 이론이 생길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목을 명백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들의 죄는 “성령 하나님을 속인 것이요,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요, 주의 영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막대한 돈을 드렸다는 외형적인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그와 같은 행위가 성령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고,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령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그와 같은 것이 자리할 수 없다는 것을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명백하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들 마음 속에 강력한 도전과 메시지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겠는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신앙생활과 섬김과 봉사와 헌신이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되돌아 보지 않았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발생한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은 함부로, 내 마음대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 동기가 중요한 것이구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충성, 순전한 헌신이 더욱 중요한 것이구나”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의 허영과 거짓과 불순한 동기가 자리할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의 순전함, 깨끗함,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전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과 사랑을 원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깊이 깨닫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와 같은 엄중한 판단에 의해서 초대교회는 더욱 순전해지고, 더욱 신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대단히 두렵고 놀라운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 가운데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아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들에게 임한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여기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하찮게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교회에 나온다면 “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정직하고 반듯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이 참으로 대단한 곳이구나. 함부로 대하거나, 우습게 여겨서는 안되겠구나.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다스리는 곳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두렵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연히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고 마음 먹었던 사람들도 “내 생각을 그대로 갖고 들어가서는 안되겠구나. 하나님의 교회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교회는 마음의 순전한 동기, 깨끗한 양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진실한 헌신,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구나” “과연 내가 그와 같은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는가? 나 같은 사람도 저들처럼 될 수 있을까? 저들이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뻐하며, 감사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유무상통하고,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보니 나도 저들 안에 있고 싶은데 나 같은 것이 저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을까?" 우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이미 마음 가짐과 정신을 세탁하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 그렇게 살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동일한 사람들이고,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동일하게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이유와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한 인물, 그 인물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저들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이요, 지금도 천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들었던 사람들이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완전하게 고쳐준 사건을 들은 사람들 입니다. 그 두 사건을 통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그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교회를 귀하게 생각했고, 두렵게 생각했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그와 같은 순전하고 순결한 초대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사실이 “그냥 저냥 해도 된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세상에서 하던 그대로 해도 된다. 세상의 방식과 가치와 지위와 돈과 권력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할 수 있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를 순전하고 순결한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교회 밖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자신들이 세상에 있을 때 갖고 있었던 것들, 그것이 외형적으로 아무리 크고 놀라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는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세탁하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심어주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 일어난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교회가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2절부터 16절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우선,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 사람들 가운데 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상종하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그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믿으려고 나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15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랬다”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랬다”는 것은 병든 사람들, 그리고 병든 사람들을 메도 온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면 자기 병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 만큼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힘있게 나타났다는 것이요, 병든 사람들의 심령이 그 만큼 절박했다는 것입니다. 그 절박한 심령을 갖고 베드로에게 나아오고, 하나님의 교회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그렇게 나온 사람들, 그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이요,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인데,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사도들과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모두 나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아니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교회는 더욱 신령해졌습니다. 더욱 순전해졌고, 더욱 순결해졌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순전하고 순결한 모습, 초대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유무상통하고, 도덕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확장되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면 자신이 과거에 갖고 있었던 사고방식, 생활, 문화, 삶의 태도, 가치관 가운데 옳지 못한 것,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들을 그대로 갖고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교육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있건 없건, 돈이 있건 없고, 배웠던 배우지 못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알려주시고, 보여주신 그대로 배우고, 학습하고, 익혀서 신앙생활,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몸과 마음과 정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결과 초대교회는 그 당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소망이 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순전하고 신령해진 초대교회는 더욱 큰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었고, 그 능력으로 하여금 힘들고, 어렵고, 짓눌리고, 고통 당하는 세상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채워주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병들고, 마음이 지쳐있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삶의 의미와 목표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참된 치유와 회복과 위로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죄악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깨지고, 뒤틀린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제대로 돌려서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야 할 지, 어떻게 해야만 거룩하고, 아름답고, 순전한 사람을 살아야 할 지를 몰라서 방황하고,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주고, 참 진리를 보여주었고, 의와 희락과 평강을 주는 하나님 나라를 전해주었습니다.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단지 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란 그 사용되는 대상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이 능력이 있는 것이요 다른 것은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의 거룩한 능력과 은혜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앓고 있는 질병을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사도 필요 없고, 약도 필요 없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와 의약품 계발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일반은총의 영역 안에서도 그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의사와 약으로 고쳐주시든지,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고쳐주시든지 모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직접 고쳐주시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크게 드러나고, 돈도 들지 않고,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 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의사나 약으로 고치시든, 하나님께서 직접 고쳐주시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작용해야 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사람들의 삶 전 영역에 아니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총은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적인 모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 세계, 전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총은 그 시대, 그 역사, 한 개인의 인격과 삶과 생활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가운데 임하는 것이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방식과 내용과 형태는 다양하게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항상, 언제나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총의 기구, 능력과 은총의 통로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뿐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희망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초대교회 모습과 오늘 우리가 보는 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고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희망과 회복과 치유를 주고 있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와 내용과 인격과 태도가 구별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그 진리, 그 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시할 수 있는, Demonstration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고 있느냐? 는 말입니다.
최근 안재환, 최진실 그 외에 몇몇 사람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들이 유명 연예인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들 모두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의 자살에 대해서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참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 그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과 힘듦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빛을 비춰주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의 말씀을 전해줌으로 그 말씀이 능력 있게 역사해서 어두움 가운데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과 위로와 지혜를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 말씀은 그 대답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순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순전하고 신령해 질 때 하나님의 능력은 힘있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순전하고 신령해 질 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손가락질 하고, 비웃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순전하고 신령해 질 때 성령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힘있게 부어주셔서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크다고 신령한 것도 아니요, 교회가 작다고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크기는 관계 없습니다. 이 땅에 서 있는 교회가 성령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만큼 순전하고 신령한 교회로 서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순전하고 신령해지려면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순전하고 신령하게, 능력 있는 교회로 만드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려면 성령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망과 야망과 허영과 거짓과 체면과 위선과 시기심과 게으름과 안일함을 그대로 갖고, 인간적인 꾀와 잔재주와 불순한 동기와 타락한 도덕적인 생활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성령 충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찬송을 부를 때도, 기도를 할 때도, 헌금을 드릴 때도, 성도간에 교제를 할 때에도, 주의 말씀을 듣고 배울 때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내가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도 오직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진리의 빛을 따라서 나는 살리라.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서 진리를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며 살리라. 그렇게 살 때 성령 충만은 우리 안에 현실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개인이나 교회가 바로 희망의 사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 희망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모두 힘든 때입니다. 이 힘든 시절, 무엇인가 얻기를 갈망하고 있고, 허덕이고 있고, 휘청거리는 이 세상,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와 여러분들, 우리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것 아닙니까? 세상에 희망이 되려면 순전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어느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 개개인의 문제요, 우리 교회의 문제요, 하나님의 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부터 시작해서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 의와 희락과 평강과 화평과 사랑과 능력과 은총을 주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시할 수 있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헌신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세상으로 손을 펼치는 교회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해주는 대목의 하나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해주는 대목은 오늘 본문 이전에도 몇 군데 있습니다. 행2:43-47에서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했습니다. 4:32-35에서도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기록은 그 전하는 내용에 있어서 이전의 기록들과 한 가지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단어가 "민간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했습니다. "민간에"라는 말은 "백성들 사이에", 즉 "교회 밖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라는 뜻입니다. 믿는 무리들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며 나누고 함께 모여 예배하며 기쁨을 나누던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그 받은 바 영적 능력을 이제는 교회 밖으로 펼치기 시작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적기사를 행한 것은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적기사는 주로 병든 사람을 고치고 더러운 귀신 들려 괴로움 받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행하시는 이는 사실은 하나님이셨고 사도들의 손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게 하신 목적은 교회의 성장과 복음의 전파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를 많이 일으키는 사도들의 손은 사실은 믿음과 기도와 기쁨과 사랑과 나눔으로 충만한 교회의 그 은혜와 능력이 밖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절 이하는 교회에 충만한 은혜와 능력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나타난 결과들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했습니다. 사도들이 행하는 이적기사는 사람들에게서 놀람뿐 아니라 두려움도 일으켰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사건을 전하는 기록의 끝인 5:11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행적이 일으키는 이 두려움은 어떤 부정적인 공포심이라기보다는 순전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로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음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그들과 한 무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사도들이나 신도들 앞에 선뜻 다가가기에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럽게 여겨지는 그런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13절은 그러한 정황을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아무튼 교회가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은 교회가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듣게 된 결과를 또 전하고 있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16절은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민간에 펼친 손이 일으킨 현상의 일면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15절을 봅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표현이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그중 하나는 "거리에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거리에 나간 것은 병든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메고 데려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거리에 나간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들이 있는 그 거리로 사도들이 나간 것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교회가 거리로 나간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다른 한 표현은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와 손을 잡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그림자라도 몸에 덮이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면 나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그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나아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병든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메고 거리로 나오며 사도들의 그림자라도 그들의 몸에 덮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진 절대적 신뢰입니다. 사도들과 그들을 앞세운 교회에 대한 민간의 신뢰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가졌던 그 신뢰입니다.
16절에서는 이 모든 현상의 결과를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루살렘뿐 아니라 예루살렘 부근에서 온 사람들은 병들었건 더러운 귀신 들려 고생하고 있었건 다 나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밖으로 손을 펴 세상사람들의 실제적인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며 사회를 치유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관한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 자신과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먼저 그 안에서부터 은혜가 충만했고, 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썼으며, 함께 예배하는 기쁨이 있었고, 모든 것을 모두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사랑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는 필연적으로 밖으로 손을 펼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모든 문제의 해결과 치유의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고 교회를 탄압하려는 세력도 한 쪽에 있었지만 세상은 교회에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지금 한국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누렸던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불신과 비난과 냉대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어떻게 하든 교회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력들의 악의적인 책동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잃어버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되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먼저는 바른 믿음 위에 서고 사랑으로 충만하여 기쁨이 있고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기쁨과 나눔은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 사이에서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에서 잡고 서로를 보듬는 손길은 반드시 세상을 향해 펼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리로 나가고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봉사의 그림자가 덮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인색한 교회는 세상을 잃게 됩니다. 세상이 교회의 그림자를 싫어하게 된다면 교회는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사회는 거리에 교회가 안 보이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그림자조차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건물을 지으려 하면 방해와 장애가 많습니다. "시끄럽다, 집값 떨어진다. 교통혼잡 일어난다. 주차 힘들어진다" 등 온갖 이유를 들어 교회를 못 짓게 하려고 들고 일어납니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어주기를 원하는 세상이어야 할 터인데 사정은 그 정반대입니다. 예배당이 안 보이면 죽은 마을 같고, 교회가 없으면 불안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으면 기쁨이 없으니 제발 우리 동네에 교회를 세워달라는 민원과 정부의 협조공문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 한낮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슬픈 일입니다. 이런 것을 한 번 상상해봅니다. 교회 가까이 있으면 집값 땅값이 떨어지는 현상이 역전되어 서로 교회 옆에 집을 짓고 싶어 하고 예배당의 그림자가 얼마나 덮이느냐에 따라 집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배당건물의 그림자가 손바닥만큼이라도 덮이는 집에 사는 것을 행복해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날, 그런 세상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며 힘써야 합니다.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때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듯이 세상으로 손을 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감동할 일들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을 해소하기 위하여 봉사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교만의 손길이 아니고 겸손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탐욕의 손이 아니라 희생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손이 아니라 섬기는 손을 건네야 합니다. 더러운 손이 아니라 깨끗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조건과 계산이 따라붙은 손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의 손길을 주어야 합니다. 힘은 없으면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손이 아니라 힘 있는 그러나 온유한 손을 빌려주어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손이 아니라 가슴이 실린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한편으로는 교회를 두려워하면서도 교회를 칭송하게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아오게 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안으로 사랑, 밖으로 봉사", 이것은 우리 교회가 금년에 내걸었던 "모든 것 위에 사랑을"이라는 교회표어의 정신을 계속적으로 살려가는 길일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꾸준히 봉사의 정신을 함양하고 봉사하는 실제적 훈련을 쌓으며 봉사의 자리를 찾아 가는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게 하시려고 벌써 여러 가지 사업을 준비하셨고 이에 따라 할 일을 주시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머지않아 여러분은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온 교인이 힘닿는 대로 크고 작은 봉사의 역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오늘을 자원봉사주일로 정하고 온 교인에게 최소한 한 가지 봉사직 갖기를 작정하게 하는 일도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마지못해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는 무엇이든 봉사하는 일 한 가지 없이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워질지 모릅니다. "새문안교회" 하면 "봉사하는 교회", "어머니처럼 봉사하는 교회", "위하여 기도하는 선교지 하나와 봉사직 하나는 누구나 있는 교회"로 천하가 인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이 사회로부터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시며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아니 이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우리가 됩시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의 삶으로 주님 오신 뜻을 바르게 받드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리스도인의 위상
사도행전 5:12-32 / 박정근 목사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변화'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행하신 표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물이 굉장히 맛있는 포도주가 되었어요.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나빠서 늘 포도주를 즐겨 먹었는데, 그 맛없는 물이 맛있는 포도주가 되었어요. 엄청난 변화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도 예수 믿는 것을 한 마디로 얘기하는데, 변화의 정도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암환자가 나아도 굉장한 일인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어요. 놀라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십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는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변화의 징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가 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혹시 여러분의 남편이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 남편이 여러분이 교회에 나가고 난 다음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이 후부터 어떤 다른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 집사람이 교회에 나가더니 달라졌어!"
또한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의 직장 동료와 상사들이 여러분에게서 어떤 변화를 감지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껍데기만 있는 신앙은 아닌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구원받지 못한, 가치관이 여전히 바뀌지 않은 그저 종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가!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늘 믿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항상 믿는 자로서의 독특성을 지녔습니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과 무언가 달랐어요.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그 위상을 잃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대 예루살렘 성에 예루살렘 교회로 말미암아 그 도시가 떠들썩했어요. '예수 믿는 사람' 하면 그들의 위상이 얼마나 하늘에 있었던지... 로마 시대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은 받았을지언정, 그들의 위상은 전혀 잃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로마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 고관들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잡아넣고 핍박하면서도,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에는 그들의 배우자를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위상이 있었어요. 비록 그들이 재산도 없고, 핍박받는 종교단체의 한 무리일지 몰라도...
그 당시 로마 사회는 지극히 타락해 있었어요. 딸을 시집 보낼 수 없었어요. 너무나 남자들과 여자들이 음탕했어요. 서로 믿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로마 고관들은 그리스도인들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것이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암암리에 그 사회를 이끌어가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들을 향해서 어떤 독특성을,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좁혀서 당신은 어떻습니까? 가정과 직장에서, 친구와 친척에게서, 믿지 않는 그들로부터 어떤 위상을 여러분은 얻고 계십니까?
이 사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변화 -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자신의 몸을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찢기시며, 우리를 변화시킨 이 놀라운 신분의 변화 - 와 위상을 다시 한 번 회복해야 될 때가 왔다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위대한 위상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는가? 본문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야 한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12절에서 16절까지 보면 굉장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특별히 15절을 보세요.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사도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베드로를 한 번 만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까, 베드로만 만나면 모든 병이 다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니까, 병자를 메고 와서 길가에 눕혀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손은 고사하고 그림자라도 한 번 맞으면 낫겠다고 줄을 선 사람이 많았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조금 더 강해(講解)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우리의 믿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그때 사도 바울의 손수건만 갖다 대도 병이 나았다면, 오늘은 왜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영안교회 담임목사인 이 박정근에게는 왜 그 절반의 능력도 없는가? 그림자는 고사하고 안수를 열 번씩 해도 왜 감기 하나 못 떨어뜨리는가?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도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능력이 일어난다고 성경구절을 갖다 댑니다. 철야하며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면 그런 능력을 받지 못할까 봐 기도원에 갑니다. 그냥 하면 안 되니까 40일 금식기도를 2회, 3회 합니다. 혹자들은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며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원에서 병이 나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나은 것은 전부 위장병이요, 속병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은 못 보았어요. 우리 교회에도 수많은 능력 있다는 부흥사가, 제가 오기 전에 다녀가셨더군요. 그 가운데는 사람을 "얍!" 하면 쓰러지게 하는 분도 있어요. 지금 서울에서 큰 목회를 하십니다. 그 분이 하는 부흥회 마지막 날, 전교인을 세워놓고 이마를 치면 다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 교인인 이호놈 집사님의 눈을 뜨게 하지 못했어요. 아무도 그 분의 눈을 보게 하지 못했어요. 그 집사님의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그 당사자의 믿음에 관계없이 사도들이 손수건만 갖다 대고, 머리만 한번 쓰다듬어도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떴다고 성경은 분명 얘기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능력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봅시다. 12절을 보세요.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누구에 의해서인가 하면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입니다.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믿는 자는 누구나 다 능력을 받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얘기합니다. 사도들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켰다고요.
이 사도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특이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당시, 이 땅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셨어요. 그 교회를 세우는 주춧돌을 삼은 사람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이기 때문에 사도들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공급하신 것입니다. 그 능력이 오늘 이들로 하여금 그림자만 쏘이게 했던 겁니다. 손수건만 대어도 병이 나을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일은 우리가 본받고 답습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박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병이 낫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기적이 안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하고 의문이 생기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제 얘기를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오해하니까, 늘 우리 가운데 불신이 생기는 겁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집사람의 암을 낫게 하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배태익 성도의 암을 낫게 하여 살아있는 것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믿는 겁니다.
오늘도 기적은 있어요. 오늘도 힐링(healing)은 있어요. 오늘도 하나님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힐링(healing)은 있되 힐러(healer)가 없다는 겁니다. 병 고침은 있되 병 고치는 자, 오늘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러한 사람을, 사도들을 이 땅에 남겨두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시대 사도들과 같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오늘 아무도 없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밥 먹듯이 해도 그런 일은 나타날 수 없는 겁니다. 왜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병을 고칠 것인가? 내가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면 내 병을 고쳐 주실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저를 데려 가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12절 /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었다고 합니다.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 재미있는 것이 복음서에 보면 '기사'라는 단어밖에 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는데, 그것을 '기사'라고 표현했어요.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가면, 똑같이 예수님이 병 고치고 기적 일으킨 것을 '표적'이라고 얘기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이 사도행전에는 '표적과 기사'가 같이 등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표적과 기사가 다른 사건입니까? 아닙니다. 똑같이 병을 고친 사건인데, 성경이 그것을 다르게 부를 뿐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더니, 사람들이 "와~ 기차다! 와~ 놀랍다! 저건 기사(Wonders)야! 초자연적인 능력이야!" 라고 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가 끝나가면서 사도 요한이 그 말씀 가운데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이 기사만 가지고 놀랄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의 표적으로 인식해야 된다." 표적이란 기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 뒤에 있는 하나님의 교훈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기사가 일어나고 표적이 따라옵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믿는 사람들은 모든 기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그 자체만을 사모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기적을 왜 일으키셨는지, 하나님이 그 기사를 왜 우리 가정과 교회에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사건 자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말씀하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들의 손으로 머리만 쓰다듬어도 병자들이 낫고, 수많은 믿는 자들이 늘어나서 사도들의 능력이 전하여진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의 삶을 영위해야 할까요?
12절에서 16절을 읽어보면 한 가지 굉장히 비슷한 것이 있어요. 이 말씀을 깊이 읽는 가운데 와 닿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서 돌아오신 것 같았어요. 사도들이 행한 기적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과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방법과 그 모양으로 그들을 고치셨어요. 그런데 사도들이 똑같이 예수님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전도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그들의 눈길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겠는가?
원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과거에 죽었던 예수,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나는 예배당에 있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며 변화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사람도 많고, 도를 닦은 사람도 많습니다. 무력을 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 부족한 나를 통해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말한 마디를 할 때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셔서 내 혀를 다스리는 겁니다. 화가 날 때 말을 뱉고 싶다가도 참을 수 있는 겁니다. 행동 하나를 할 때에도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겁니다. 내 생각을 날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위상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살아 계셔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소망!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살아나시게 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옥에 들어갔어요. 천사가 나타나서 그들을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게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 베드로가 마지막에 어디에서 죽었습니까? 그는 감옥에서 죽었어요. 왜 이 때는 풀어주시고, 저 때는 안 풀어 주셨을까요?
사도 바울도 감옥에서 한번 풀려났는데, 그가 마지막에는 감옥에서 죽었어요.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아, 그 때는 기도를 많이 했고, 마지막에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기도를 소홀히 했구나!"
여러분이 이렇게 이해하시면 오늘 저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감옥에서 생활하거나 풀려나거나, 병을 가지고 있거나 앓고 있거나, 그것이 상관없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옥에 있든지, 이 땅에 있든지, 가난하거나 부하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내가 처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살아나시는가!
오늘 세상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늘 기도로 승부를 걸려고 합니다. 능력으로 승부를 걸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자가 1년 사업해서 2천만 원 벌었더라,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십일조를 바치고 기도했더니 6천만 원 벌었더라. 할렐루야! 라고 간증하면 박수를 칩니다.
그러면 병에 걸려 죽는 그리스도인들은 뭡니까? 사도 베드로는 감옥에서 죽었어요. 지금 성경이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건강하게 하실 수도 있고, 병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주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이 다시 현존하는 것이 중요한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환경이 어떻습니까? 가끔 제가 얘기합니다. "전도하십시오."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맨날 구호금 타 먹으면서 전도하니까, 전도가 되겠습니까!"
이 말은 부자가 되어야 전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자에게 가 볼까요? 전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 처했던지 간에, 그 환경 안에서 주님이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시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교인들이었어요.
2.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땅을 사는 인생을 철학적인 면에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후자입니다. 당연히 목적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가? 많은 사람들은 존재하기 위해 삽니다. 나의 존재를 위해 삽니다. 단순히 잘 살고, 병에 안 걸리고, 행복하고... 오복을 다 누리는 이 땅의 존재! 그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기도하는가? 내 존재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왜 헌금하는가? 내 축복을 위해서 헌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부름 받은 삶'이라고 얘기합니다. Calling!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 살아간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왜 이 땅에 보냈습니까? 이 땅에 더 넓은 아파트를 짓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다른 사람은 70년 사는데, 예수 믿었더니 100년 살게 하기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나, 천국에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남겨놓으신 이유를 이미 공부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우리 인생에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는 부름 받은 삶입니다. 하늘나라를 이 땅에 전파하는 대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목적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혔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증인 노릇을 했는가, 아닌가 입니다.
그 예로 14절 보세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병을 고치니까 증거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큰 무리가 되었습니다. "아, 그럼 병 고쳤는데 나와야지!"
그럴까요? 병 고쳤다고 다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를 고쳤는데도, 그것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41-42절 /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병이 낫고,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을 때 전도가 일어났어요. 사실 이 논리는 이상합니다. '사도들이 손만 대면 병자들이 나았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시기하여 군사를 보내 그들을 잡으려 했어요. 그 군사 중 하나가 베드로를 잡으려고 오른쪽 어깨에 손을 댈세, 그 대인 손이 사정없이 부러지더라.' 이렇게 돼야 스토리가 맞는 것 아닙니까?
병 고치는 사도들이 다 감옥에 잡혀갔어요. 그들이 병을 고칠 때, 믿는 무리가 주 앞으로 수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능욕을 받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전도가 계속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전도했어요. 능욕을 받을 때에도 그들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우리가 왜 예수 믿는가? 병 고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땅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이 땅에 남겨놓으신 단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증거하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해야 합니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는 나옵니다. 새벽기도도 나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전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평생에 "교회 나오세요." 이 얘기 말고, 한 영혼을 찾아 가서 성경을 펴고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당신의 죄 때문이며, 주님이 당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라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전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이것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위상을 잃어갑니다.
무엇이 세상을 바꿉니까? 나와 나의 착한 행실이 바꿉니까? 아닙니다. 복음이 바꿀 수 있는 겁니다. 무엇이 깨어져 가는 가정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까? 복음이 합니다. 무엇이 죽어져 가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복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십니까? 복음이 이 사회를 구원할 줄 믿으십니까? 복음이 깨어져 가는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증인 노릇하시기 바랍니다.
이 제명 집사님이 지은 「전도행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옥한흠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사랑의 교회 집사입니다. 그가 누구를 전도했는가? 지존파 6명을 전도했습니다. 지존파는 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마들입니다. 처음 전도할 때, 그들은 발악을 하며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나는 예수 믿을 수 없다!"고 했어요. 특히, 지존파 두목인 김기환은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악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들이 사형을 당하며 교수대에 달릴 때에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자기의 죄를 자백했어요. 특히 김기환은 자신이 가진 재산 전부를,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고 하면서 교회에 재산을 헌납했어요. 찬송가를 부르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죽었습니다.
여러분, 지존파를 전도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전도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복음은 지존파뿐 아니라 고재봉 같은 살인마도 변화시킨 줄 믿습니다.
무엇이 이 사회를 변화시킵니까? 무엇이 당신의 남편을 변화시키고, 무엇이 당신의 자녀를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복음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증거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의 종교 집단이 되어 버렸어요.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면서까지 우리에게 복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증거함으로 잃어 버렸던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29절 /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순종(휘파코에)' 이란 단어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네 번밖에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순종이란 단어가 수백 번 쓰여졌지만, 이 단어는 네 번밖에 없어요. 이 순종, 즉 '휘파코에'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왜 오늘 한국 사회에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는가? 저는 순종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가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은즉' 무슨 말인가 하면, 순종 없이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 없이 헌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이 한국 교회에 벌어졌어요. 예배시간에는 꽉꽉 모입니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끊어버리라고 하는데, 거짓말하면서 사업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깨끗하게 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가정에 가서 올바른 말을 하라고 하는데. 교회에 와서는 찬양하지만, 집에서는 욕을 쏟아냅니다. 사회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릅니다. 가난한 자들을 탄압합니다. 길거리에 다니며 싸우기는 1등입니다. 아파트에서 악마라는 사람으로 소문났는데, 교회에 가면 집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이 다 떨어져 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 위상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순종만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에 왜 참석하셨습니까? 그냥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일에도 순종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순종은 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외를 그리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함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오늘 여러분은 현대판 사울입니다. 사울의 말로(末路)를 아시나요?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버림으로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세상은 저와 여러분을 보고 당신들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면 그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저도 믿고 싶어요,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뭡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도 나와 별다른 것이 없던데요!"
그러는 사이에 그리스도인의 위상은 다 땅에 떨어져버렸습니다.
영안 교우 여러분! 이 위상을 우리가 회복해야 할 줄 믿습니다. 가정에서 먼저 그리스도인 어머니 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인 자녀 여러분! 수많은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에서도 혼자 믿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그 불신자 가정에서 당신의 위상을 회복하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냄으로, 구체적인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므로 직장과 사회에서 잃어버렸던 위상을 회복하십시다. 우리가 이 위상을 회복할 때야말로 이 땅에 복음이 충만할 것이고, 우리의 2세가 사는 이 사회는 지금보다 더 소망 있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