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 이내번이 지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이다.
선교장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하게 한다고 하여 선교장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세 배나 넓어서 선교장 앞과 烏竹軒 까지 물이 넘쳤다고 한다.
경포호수 주변은 선교장을 비롯하여 오죽헌, 경포대, 경포대 등 문화재가 넘친다.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처사 이후(李厚)가 건립하였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1816년(순조 16)에 이근우(李根宇)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안채 · 사랑채 · 동별당 · 서별당 · 사당 · 정자 · 행랑채를 골고루 갖춘 큰집으로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
집의 배치는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서남향을 하고 있다. 전면에는 줄행랑이 서 있고, 그 가운데 솟을대문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간행랑이 나오고 서쪽으로 가면 사랑 마당에 이르게 된다.
열화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크기로 거의 一자형 평면을 이룬다. 그 구성은 대청 · 사랑방 · 침방 · 누마루로 되어 있고, 대청 앞에 반 칸 너비의 툇마루가 붙어 있다.
특히 사랑채 전면에는 차양(遮陽)이 가설되어 석양의 강한 햇볕과 눈, 비를 가리게 되어 있다. 오량(五樑)가구의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대청의 천장은 널판으로 일부 빗천장을 하고 우물천장을 한 것이 특색이다.
안채는 행랑채 동쪽에 있는 평대문으로 들어가는데 부엌 · 안방 · 대청 · 건넌방으로 구성된다. 동쪽으로는 동별당, 서쪽으로는 중문간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도 오량가구의 민도리집 양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동별당은 안채 동쪽 부엌 앞에 ㄱ자형으로 위치하는데, 서쪽에서부터 온돌방 · 대청 · 마루방 · 온돌방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건물의 가구나 구조는 안채나 사랑채와 비슷하다. 행랑채 앞 넓은 터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정자인 활래정이 있다.
정자는 ㄱ자형으로 방과 누마루로 되어 있다.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처마에는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모두 띠살창호를 달았다.
연못 가운데에는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산을 인공적으로 쌓아 만들었는데, 소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운치를 더하여 준다.
민족시인 심연수를 배출한 삼척 심씨는 선교장 주변에 살면서 머슴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선교장 뒷 산 동네에는 삼척 심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25년 沈連洙의 부모는 고향 강릉을 떠나 연해주로 갔으나 1931년 구소련에서 조선 사람을 중앙아시아로 집단 이주시키는 바람에 중국으로 이주해서 흑룡강성 밀산에 살다가 신안진을 거쳐 1935년부터 용정에 머물렀다.
용정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어렵게 가계는 이어졌다.
집안은 용남촌 은진중학교 주변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다음해 용지촌 연변대학 내 농학원 자리로 이사하여 소작이나마 농사일을 시작했으나 지주가 일제 앞잡이여서 삶의 터전을 또 옮겨야만 했다.
1년 뒤 태평촌으로 옮겨 소작을 하다가 광복 후 토지분배를 받고 자신의 농토를 가지게 되었다. 숙부 심우택이 간도에서 중학교,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서 이곳 사정이 훤했으므로 간도로의 가족이주가 가능했다.
현재 심연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몰락한 전주 이씨가 지은 선교장과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