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의 A)는 어느 회원님이 쓴
《무아, 참나는 없다》
의 글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고
B)는 다음에서 <무아의 생활화>를
검색하여 (아미산 이덕호)님의 블로그 글을
그대로 복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글인데 블로그에서 복사한
B)에는 A)의 분홍색 글이 없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검색하여 찾아보십시요.
있지도 않은 글을 첨가하여 이 곳에 소개하는
태도는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아래글을 잘 읽어 보시면
이덕호님의 글은
오히려 "무아"를 무조건적으로
"내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취지의 내용입니다.
■즉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온은 anatman》은
당시 브라만교(힌두교)의
<오온(몸과 마음)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
는 주장을 타파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오온은 참나(atta, atman)가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빠알리어 atta는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산스크리트어 anatman은
atman이 아니란(an) 말이다.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비아(非我)론의 주장은
적지 않은 불교학자들과 수행자들이
취하는 관점입니다.
"오온(색수상행식)은
나가 아니다,"
즉 "내가 없다"가 아니라
비아(非我), "내가 아니다"를
말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학자와
수행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본의 세계적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와
여래장 사상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며
스리랑카에서 빠알리어로 씌여진
패엽경을 최초로 가져다가 영국에다
<빠알리 경전협회(Pali Text Society)>
를 만든
《리즈 데이브스(T.W. Rhys Davids)》
와 그의 부인도 비아론을 주장하며
한국에도 비아론을
취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다수 학자와 남방불교도
대부분은 무아론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비아(非我)론을 취하면
"오온이 (참)나가 아니다"란 말이 되어
오온이 아닌 "참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완전히 깨친 뒤에 보면 허환의 오온이
그대로 불성이요, 열반이요,
진아요, 참나가 됩니다
ᆢ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이 주장을 취하는 분들은
불생불멸의 불성,
여래장, 열반, 참나가 있다는
관점을 취하게 되어
학자들 간, 수행자들 간에도
비아론과 무아론의 관점이 갈리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초기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법문과
《나》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께왓다 경, 디가 니까야]
'의식'(열반의식, 순수의식)은 볼 수 없고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이 난다.
여기서 '지수화풍'(4대)은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아름답고 더러운 것,
즉 '정신과 물질'(5온)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5온의 식별)가 소멸하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한다.
2. [범천의 초대 경, 맛지마 니까야]
특징도 한계도 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열반의식)이 있다.
《출처:Peter Harvey, "The selfless mind", Surrey : the curzon press》
3.부처님께서도 쿳다까 니까야
(Khuddaka Nikaya, 小部) 중의
<우다나((優陀那, udana)>라는
자설경(自說經)에서 말하셨다.
열반이란 어떤 것인가?
그곳에는 옴이 없다.
감도, 머묾도, 죽음도 재생(윤회)도
없다. 나루터도 없고,
윤회도 없고, 의지처도 없다.
그러나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더 이상 나고 죽지 않는 세계이며,
더 이상 변화를 겪을 필요가 없는
세계로 재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오고 갈 필요도 없다.
그리고
4.부처님께서는
“나(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셨으며,
(법등명 자등명 법귀의 자귀의:
법을 등불로 삼고 나를 등불로 삼아라
ᆢ經에는 법을 섬으로 삼고 나를 섬으로
삼아라 )
또
5. <법구경>에서는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도 곧 나다.”
라고 설하고 있다.
과연 이때의 나는 어떤 나일까요?
이 법문에서의 나는
《진여자성의 나, 영원 불멸의 참나,
열반의 나》
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1)"나가 없다"라고도 설하시고
2)"나가 있다"라고도 설하신다고 함은
"참 나는 있다" 글 중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에도 나옵니다.
1)나가 없다라고 할 때의 나는
오온(중생)으로서의 나를
말함이요,
2)나가 있다라고 할 때의 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아뇩다라삼막삼보리요,
열반(Nirvana)이요,
불성(佛性)이요, 참나(眞我)요,
부처(佛)로서의 나를 이르는
것이겠지요.
끝으로 현 조계종의 시조격이신
육조혜능 스님의 오도송을
소개하겠습니다.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리요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요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줄
어찌 알았으리요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
어찌 알았으리요
자성이 능히 만법을 만들어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요
*자성이 곧 불성(佛性)이고 법성(法性)이며
열반(nirvana)이고 참나(眞我) 입니다.
何期自性 本自淸淨(하기자성 본자청정)이며
何期自性 本自具足(하기자성 본자구족)이며
何期自性 本不生滅( 하기자성 본불생멸)이며
何期自性 本無動搖(하기자성 본무동요)며
何期自性 能生萬法(하기자성 능생만법)이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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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긴낭님이 올리신 아미산님의 글》
■많은 이들이 무아(無我)를
한자 무(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내가 없다.
그럼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군 인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찰나적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연기에 의한
오온의 집합체)은 있다.
이 게 글을 쓰는 나요, 이 글을 읽는 너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데,
무상(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만은 석가모니불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는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무아는 ‘참나(진아)’도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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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아미산님 블러그 복사글》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무아 = "내가 없다"」가 아니다.
무아란 “고정불변 하는 ― 항상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는 뜻이다.
대부분 불자들이,(무아=나가 없다)는 잘못된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아를 ‘내가 없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잘못된 무아론에 빠져버린다.
무아란 덮어놓고 ‘나’라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아(無我)에서 ‘아(我)’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뜻은 ’나‘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성을 유지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많은 분들이 무아(無我)를
한자 무(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한다.
내가 없다.
그럼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군인가?
이 글을 읽는 너는 누구인가?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찰나적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은 있다.
즉, 연기에 의한 오온의 집합체는 있다.
이 게 글을 쓰는 나요, 이 글을 읽는 너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이다.
무상(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만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는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원본에는 위의 분홍색 글이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무아는
불교 근본교리로서,
고대 인도에는 브라만 교설에 의해
아트만(atman-我)사상이
보편화돼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차적으로
그 ‘아트만(我)’의 관념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설을 주장했다.
즉, 당시 우파니샤드철학이
아(我)를 실체시 하는데
반해 부처님이 이런 견해를
거부한 것이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pali. anatta)이다.
「pali. anatta, skt. anatman」
anatman은 아트만(atman)이
아니란(an) 말이다.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무아라고 해서 ‘나’의 실존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록 가아(假我)이지만
‘나’는 존재한다.
아트만(atman)이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고정 불변의 자아(skt. atman)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아상(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첫댓글 "한국 스님과 불자들만큼 불교학
공부안하는 곳도 없다 ."라는
어느 학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런 논쟁이 사실 마음공부엔
다 부질없는 희론이 될 수도 있지만
이론이 분명해야 또 수행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소 길고 복잡해도 읽어보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를 논박하여 이기고자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기회에 관심있는 불자님들께
이론적으로라도 공부하실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해보자는 뜻입니다.
이런 주장도 있고
또 반대의 관점도 있다는 것을
보아주시고.
널리 혜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깊이도 있고 재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생각도 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이런 논쟁이 마음공부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희론으로 치부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이곳은 부처님의 가름침을 공부하고자 모인 온라인 카페입니다.
간절한 구도심으로 정법을 추구하려는 수행자라면 당연히 이런 문제를 치열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글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간절한 구도심으로 정법을
추구하려는 수행자라면 당연히 이런 문제를
치열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글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참선을 공부하는데에는
큰 방해거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글과 특히 위 동영상이
나르님이 올리신 글에 스님의 답변과는
다른 관점이니 잘 비교해 보시길
바라겠습니다.()()
@munsusari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더욱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열반적정은 "나"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러면 궁금한게 나의 열반적정이 있다면 여기서 나는 무엇입니까?
또 나의 열반적정이 있다면 너의 열반적정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열반적정은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
그리고 제가 정말 몰라서 여쭤보는데 경전에 "참나"라는 표현이 나오는지요?
(저는 열반적정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그 열반적정을 "나"와 연결하시니 이해하기 힘들어서 질문드립니다.)